[미디어펜=김소정 기자]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이례적으로 남한까지 와서 북한을 향해 만나자고 공개적으로 회동을 제안한 것은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명분 쌓기’의 목적이 큰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자신들이 정한 ‘연말 시한’을 앞두고 서서히 긴장 수위를 올리는 상황에서 미국은 대화 의지를 피력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는 막겠다는 것이다. 앞서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한 미사일’ 회의를 소집한 만큼 향후 북한이 ICBM을 발사할 경우에도 대응할 근거를 쌓는 차원이다.
한편으로 지난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에서 보듯이 북한이 요구하는 대북제재 완화 등을 당장 대화 테이블에 올릴 수 없는 미국으로선 일단 ‘연말 시한’을 넘기기 위해 비건 대표가 나설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2020년 대통령선거까지 답보 상태로나마 북한의 고강도 도발을 막아야 하는 미국이 특별히 준비한 카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건 대표가 남한에 와서 회동을 제안한 것은 북미 간 물밑채널이 작동하지 않았던 방증이기도 하다.
비건 대표는 이례적으로 외교부 청사에서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브리핑을 갖고 “미국은 데드라인이 없으며, 싱가포르 1차 북미정상회담 합의를 실천하기 위한 목표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 대화 의지를 피력했다.
당초 비건의 회동 제안에 북한이 응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낮았지만 예상대로 북한은 묵묵부답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8주기를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 비건 대표는 이날 오후 ‘빈손’으로 일본으로 출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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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전 청와대에서 방한 중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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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는 비건의 방한에 맞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북제재를 일부 해제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안했다. 중‧러가 이전에도 대북제재 해제 주장을 한 적은 있지만 결의안 제출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안보리에서 이 논의를 공식화하는데 시동을 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북한이 제시한 ‘새로운 길’이 북미대화의 틀을 벗어나 중국‧러시아를 중심으로 국제연대를 모색하는 것이고 중‧러가 이에 호응했다는 관측도 나왔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은 2020년 ‘김정은 신년사’를 통해 다시금 핵무력 완성과 핵보유국임을 재확인하고, 대내적으로는 자력갱생을 바탕으로 경제에 매진하는 새로운 전략노선과 대외적으로는 북미협상의 틀을 탈피해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국제연대를 통한 돌파구를 모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실적으로 중‧러의 제안이 안보리에서 통과되기는 어렵다. 안보리에서 기존 제재를 해제 또는 완화하려면 새로운 결의안을 채택해야 하는데 중‧러를 포함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5개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15개 상임·비상임 이사국 중 9개국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장 미 국무부 고위당국자는 “평양이 비핵화 논의를 위한 만남을 거부하며 긴장 고조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지금은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완화 제안을 고려할 시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동엽 교수의 지적처럼 유엔 안보리에서 9개국 찬성을 얻기는 쉽지 않겠지만 북한이나 중국, 러시아는 손해 볼 일이 없다. 김 교수는 “북한이 이미 지름길이 아닌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상태에서 국제사회에서 제재 문제가 제기되는 자체만으로 미국의 제재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회담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안보리 대북제재 중 일부를 해제해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이후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안보리 제재 해제를 주도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중‧러와 협력하는 ‘새로운 길’을 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근 동창리 시험장을 다시 열고 두차례 엔진시험을 마쳐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포함된 동창리 시험장과 영변 시설의 위력을 과시하는 듯하다. 미국 측의 저평가로 하노이회담이 결렬된 것에 대한 책임을 미국이 져야 한다는 식으로도 해석된다.
이제 북한이 공언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무엇일지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북한은 예고한 ICBM 도발을 감행하며 ‘새로운 길’을 선포, 그 책임을 미국에 돌릴 가능성이 커졌다. 그런 만큼 ‘연말 시한’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일정대로 협상을 끌고가고 싶어하는 미국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할지 주목된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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