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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모델링한 세운상가 [사진=미디어펜] |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宗廟)는 조선왕조의 뿌리다.
영화나 TV드라마 사극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전하, 종사를 살피소서!”라고 간하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종사란 ‘종묘사직’을 줄인 말이다.
조선은 유교를 기본 국가이념으로 한 나라다.
유교국가의 수도에는 반드시 세 곳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왕이 머무는 궁궐과 왕실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 그리고 토지.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社稷)이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왕실의 제례 문화를 잘 보여준다.
필자는 결코 종묘를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청계천을 거쳐 을지로입구에 이르는 코스를 추천하려 한다.
지하철1호선 종로3가역 11번 출구에서 조금 가면, 종묘광장공원 입구다. 이 곳을 흐르는 제생동천과 종묘전교(宗廟前橋)는 ‘현실 및 세속의 공간’인 종로거리와 ‘역사 및 제향의 공간’인 종묘를 가르는 경계다.
종묘전교는 처음 나무다리였던 것을 세종 때 돌다리로 개축한 것이다.
역대 왕들이 제사 등 각종 행사 때 이용하던 중요한 다리로, 오른쪽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말에서 내려야 하는 것은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종묘를 찾는 사람들은 입구인 외대문 왼쪽 구석에 서 있는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의 동상을 놓치기 십상이다.
월남 선생은 구한말 독립협회의 중심인물 중 하나이자,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가다. 3.1운동을 배후에서 도왔고, 1927년 민족의 ‘단일대오’로 전무후무한 최대 독립운동단체 신간회(新幹會)의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그러나 지난 1986년 세워진 선생의 동상이 왜 여기 있는지는 안내판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종묘 반대쪽으로 종로를 건너면, 세운상가(世運商街)가 우뚝하다.
세운상가는 종로3가와 충무로 사이 약 1km의 초대형 주상복합상가 건물군을 통칭하며, 국내 최초 주상복합 아파트이기도 하다. 세운상가라는 이름은 1966년 당시 서울의 건설 붐을 주도한 ‘불도저’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총 설계는 건축가 김수근이 디자인했지만, 시공사들이 설계를 다 바꿔버려 완전히 엉뚱한 건물이 돼 버린, 김수근의 흑역사(黑歷史)란다.
처음에는 고급주거아파트와 상가가 함께 존재한 건물이었으나, 1960년대부터 이 부근은 미군부대에서 빼내온 각종 고물들을 고쳐서 판매하는 작업장들이 모인 동네였고, 주민은 빠져나간 대신 이런 주변의 작업장들과 결합, 가전을 비롯한 각종 ‘전자제품의 메카’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용산전자상가가 생기면서 상권이 빠르게 쇠락하고, 건물도 슬럼화 돼 버렸다.
이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모든 건물을 철거해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으나, 상인들의 반발과 현실적인 보상비용 문제로 사실상 폐기됐다.
박원순 시장 때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건물과 상가를 재생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세운-청계-대림상가 연결하는 보행데크를 도시재생(都市再生)했으며, 진양상가까지 보행데크를 완성, 종묘부터 충무로(忠武路)까지 연결되는 도심보행 축을 구축할 계획이다.
상가 입구엔 2층에 상징적인 로봇이 서 있고, 내부엔 리모델링된 점포들이 빼곡하다. 주변을 정비하며 발굴된 조선시대 유적과 유물도 전시 중이다.
세운상가 옥상 위에 오르니, 종묘 전체는 물론 멀리 북한산까지 선명하게 조망된다.
상가 좌측 보행로 주변에는 깔끔하게 정비된 점포들이 줄지어 있다. 하지만 주변 일대는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청계상가(淸溪商街) 앞에서 청계천으로 내려와, 복원된 도심하천을 따라 올라간다.
청계3가사거리를 지나, 곧 수표교(水標橋)다. 수표교는 조선 전기에 청계천에 놓인 돌다리로, 수표가 설치돼 있어 강우 시 수량 측정이 가능했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8호로,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에 옮겨졌고, 원래 자리에는 청계천 복원 시 새 다리가 놓였다.
지금 수표교에는 이벽(李蘗) 집터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벽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평가된다. 선교사 없는 조선에서 ‘독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이승훈이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정조 때인 1784년 자신의 집에서 권일신, 정약용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바로 국내 최초의 세례이자, 천주교회 창설이다.
1785년 순교한 그가 살던 집터는 청계천 건너, 다음 블록이다. ‘한국천주교회(韓國天主敎會) 창립 터’ 표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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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기념관 [사진=미디어펜] |
표석 바로 맞은편에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全泰壹) 기념관’이 있다.
전태일, 우리나라 노동운동사를 대표하는 ‘노동열사’가 바로 그다. 평화시장 봉제노동자들의 엄혹한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개선하려 분투하다,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근로기준법(勤勞基準法)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자살, 한국 노동운동의 ‘신화’가 된 인물이다.
한국전쟁 후 청계천 변에서는 실향민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복과 담요를 수선해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이들은 서울시에서 땅을 제공받아 1962년 상가를 짓고,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아 평화시장(平和市場)이라 불렀다.
곧 이곳 일대는 한국 의류산업을 대표하는 복합단지로, 전국 기성복 수요의 70%를 감당했다.
그러나 일대 550개 공장 2만여 봉제(縫製)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열악’ 그 자체였다. 더럽고 비위생적인 작업장에서 하루 평균 14~15시간씩 밤낮 없이 일하며, 임금은 많이 주는 곳이 숙련 미싱사 월급이 3만원, 실밥 뜯기 등 잡일을 하는 ‘시다’(미싱보조)는 8000원일 정도였다.
시다는 평균 15세의 어린 소녀,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해 박봉을 집에 부쳐야 했던 아이들...
전태일기념관에서는 당시 작업장을 재현해 놓았다.
좁은 공간에 나무침대로 1~2층을 나눠, 1층에는 미싱사가 재봉틀을 돌리고, 2층에선 전문가인 재단사가 옷을 만든다. 시다들은 그 옆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일을 도왔다. 실내는 실밥과 먼지, 유독약품 냄새가 가득하다. 여기서 밤새 일하다, 새벽이면 현장에서 그냥 잠들곤 했다.
1980년대 초 대학생 때 평화시장 시다 일을 경험해 본 필자는 당시의 참상(慘喪)을 잘 안다. 노동운동을 위해 위장취업(僞裝就業)한 게 아니다. 한 푼이라도 벌려는 ‘단기 알바’였을 뿐...
전태일은 재단사로 일하며 불쌍한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 먹이다, 노동운동에 눈을 떴다.
청계천 하류 평화시장 인근에는 전태일다리(버들다리)도 있고, 전태일 열사의 흉상과 시비를 만날 수 있다.
무거운 마음으로 기념관을 나서, 삼일교를 건넌다.
다리 바로 옆에 있는 삼일(三一)빌딩은 건축가 김중업의 설계로 1970년 완공된, 당시로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31층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3.1운동을 상징하기도 했다. 삼미그룹 본사와 한때 한국산업은행 본점이 있던 곳이다.
삼일교 너머 한화그룹 본사인 한화빌딩 앞에는 ‘청계천베를린광장’이라는 작은 광장이 있다.
비석 같기도 하고 콘크리트 건물벽 잔해 같기도 한, 괴상한 건조물이 서있다. 바로 1989년 독일통일(獨逸統一) 당시 철거된 ‘베를린장벽’의 유산이다. 베를린의 한 공원에 있던 동.서독 분단의 상징물을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아, 2005년 이 곳에 옮겨 설치한 것이다.
한쪽 벽면에는 베를린의 상징인 곰의 상이, 반대쪽에는 독일인들의 이산가족상봉(離散家族相逢)과 통일 염원 글들이 쓰여 있고, 양쪽에 브란덴부르크문과 서울 남대문도 그려놓았다.
그 옆엔 독일 전통 가로등과 보도 포장, 의자도 함께 배치했다.
다시 삼일대로를 따라 서울고용노동청과 IBK기업은행 본점을 지나, 을지로2가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고, 을지로입구역으로 향한다.
한때 KEB하나은행의 본점이기도 했던 옛 외환은행(外換銀行) 본점건물 직전, 전국은행연합회가 있는 은행회관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우당 이회영 길’ 안내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다.
일제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모든 가족을 리드해 중국 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우고 ‘독립전쟁’을 주도했으며,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1932년 일본경찰에 검거돼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신, 우리나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대표하는 분이다.
서울 명동 출신이어서, 중구청이 2017년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이 길을 명예 도로로 지정했다고 한다.
하나은행 건물 앞 도로변에는 장악원(掌樂院) 터 표석이 있다. 조선시대 음악 관련 교육과 서적편찬 및 교육을 맡았던 관아, 장악원이 있던 곳이다.
은행 바로 왼쪽 옆에는 또 한분의 독립운동가가 기다린다. 나석주(羅錫疇) 의사 동상이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던 나 의사는 ‘의열단’ 단원으로서, 1926년 12월 일제 경제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東洋拓植)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폭탄을 던지고, 혼자서 수백 명의 일경들과 시가전을 벌이다 순국하신 분이다.
동양척식이 있던 자리에 동상을 세웠는데, 분명 무기를 사용해 항전한 ‘의사’지만 ‘열사’라고 잘못 표기, 씁쓸한 마음이 든다.
지척에 지하철2호선 을지로입구역이 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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