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33) - 용맹한 전사이자 탁월한 리더 퀸투스 쿠루티우스 루푸스(41년?~79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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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기원전 4세기와 3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기록이 풍성했었다. 하지만, 거의 다 멸실되고 단편들만 남았다. 그 중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원정에 동행했던 칼리스테네스가 쓴 전기와 플루타르코스가 쓴 열전이 조금 많은 분량으로 전한다. 알렉산더에 대한 전기로 가장 충실하고 상세하게 균형적 시각으로 쓴 책은 바로 퀸투스 쿠루티우스 루푸스(41년?~79년?)의 작품이다.
루푸스는 로마 제국의 클라우디우스 황제 또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시기에 이 책을 저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서기 41년에서 79년 사이에 활동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유력하다. 루푸스는 로마의 수사 학자이자 정치가였다고 알려진다.
이 책은 국내 최초의 완역본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된 알렉산더 전기들은 아주 소략한 내용의 발췌 본이었다. 이 책은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다른 단편들에서 보이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군대운용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알렉산더가 정복 활동에서 겪는 고난과 역경은 물론 이민족 정복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고결한 정신, 영웅적 활약과 잔인성 등 양면적 특성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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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북부 지방의 펠라에 있는 알렉산더의 왕궁 유적이다. 평원에 계획도시 형태로 건설된 마케도니아 왕궁의 거대한 왕궁 터가 남아있다. ⓒ박경귀 |
알렉산더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많이 엇갈린다.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일궈 문명의 교류를 만들어낸 불세출의 영웅으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끝 모를 정복욕과 허영으로 이민족의 무고한 생명과 재산을 앗아간 잔인한 약탈자로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한 가지로 알렉산더를 규정할 수는 없다.
알렉산더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은 그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조명해 보는 일이다. 특히 현재적 관점이 아니라 알렉산더가 활약하던 당대 그리스인과 주변국의 입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알렉산더의 언행과 행적 그 자체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알렉산더의 야망은 너무나 컸다. 그가 동방원정에 나선 정치적 명분은 그리스를 3차례 침공하여 약탈했던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인 국가의 해방이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갈등의 해소 및 중재자 역할도 자임했다.
물론 전 세계를 지배하고 싶었던 알렉산더는 욕망이 깔려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전 세계의 통일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키고 동서양의 통합과 평화로운 교류를 꿈꿨을 수 있다. 따라서 알렉산더의 정복 활동이 정의로운가 아니면 부당한 것인가는 한마디로 평가하기 어렵다.
33세의 알렉산더의 불꽃같은 삶을 있는 그대로 추적해 보는 것도 다면적인 그의 심층을 제대로 이해하는 출발이 될 것 같다. 먼저 알렉산더는 최고의 전략가이자 전사였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탁월한 전투 능력을 갖춘 전사이자 군대 운용과 지휘 통솔에서 최고의 역량을 보여준 사령관이었다.
알렉산더는 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갖고 다니며 즐겨 읽었다. 그가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영웅들을 숭배하고 그들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전쟁터에 나서면 왕으로 군림하며 뒤에서 명령하기보다 한 사람의 용감한 전사로서 전열의 맨 앞에 나섰다.
그는 아킬레스나 헤라클레스가 된 듯 두려움 없이 적진 속으로 돌진했다.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용맹을 보임으로써 적이 먼저 기(氣)가 질리도록 했고 적을 정신력은 물론 전투력에서 압도했다. 병사들에 앞서서 성벽에 사다리를 놓고 직접 기어오르는 선봉에 섰던 왕은 아마 동서고금을 통해 알렉산더가 유일할 듯싶다.
인도 말리아(Malia)족과의 전투가 대표적인 예다. 병사와 장군들이 공성용 사다리를 아무도 오르려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성벽 꼭대기에 올라 혼자 흉장(胸墻)에 갇혀 사방에서 집중적으로 공격받아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아예 죽음의 장으로 뛰어든다. 알렉산더 혼자 적이 가득한 성내로 뛰어내려 싸운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던지는 무모함 그 자체다. 결국 알렉산더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고, 뒤이어 진입한 자신의 병사들에 의해 간신히 구출되어 생명을 유지한다.
이런 식의 물불 안 가리는 전투 장면은 수없이 반복된다. 화살이나 창을 맞아 여러 번 부상을 입고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알렉산더의 이런 용맹과 무공이 병사와 장군들을 따르게 하는 카리스마와 신화를 만들어냈다.
적 앞에서 겁을 먹는 병사들이 왕의 돌진 앞에 부끄러울 수밖에 없고,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전쟁과정의 어려움을 병사들과 나누려는 동고동락의 예도 무수히 많다. 왕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고락을 함께하는 왕을 장군과 병사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단순히 신기한 무공을 가진 용맹한 전사이기만 했다면 페르시아 전역을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치밀한 군사 전략가이자 전술 운용에 달통한 지휘관이었다. 급류의 강을 도강할 때나 험준한 산악 고지를 공략할 때 등 다양한 위험 상황마다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창안하고 실행했다.
게다가 항복하는 자에겐 관용과 자비를 베풀고, 저항하는 자에겐 잔인한 죽음과 파괴를 안기는 양면 전략은 아직 접전하지 않은 적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자진하여 굴복하게 만드는 심리적 효과까지 거두게 된다.
끝까지 항전하다 정복된 도시는 모든 병사를 몰살하고 남은 시민을 노예로 팔아넘긴 후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6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당한 티로스, 테베가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 이런 전략은 거의 모든 정복자나 치열한 전쟁터에서 일상화된 전략이다.
칭기즈칸 역시 항복하지 않은 자에 대한 처참한 살육을 통해 적에게 공포심을 안겨 스스로 굴복하게 만드는 전략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반면 알렉산더는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한 도시나 왕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왕권을 그대로 돌려주기도 했다. 철저하고 잔인한 보복과 관용과 자비의 양면 전략으로 대항세력을 무력화 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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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도니아 왕궁이 있었던 펠라의 작은 마을 거리에 세워진 알렉산더 동상, 오른손에 승리를 상징하는 니케여신상을 들고 있다. ⓒ박경귀 |
이민족과의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알렉산더는 포용 정책을 적절히 구사했다. 페르시아 공략에서 생포한 다리우스의 모후와 황후 및 공주들을 가족처럼 돌봐줌으로써 다리우스와 페르시아 인들의 민심을 얻었다. 나아가 다리우스를 죽인 부하 총독을 끝까지 추적하여 척살했다.
비록 자신의 적이었지만 왕을 시해한 모반과 배신의 죄를 물음으로써 알렉산드로스가 신의를 중시한다는 것을 페르시아 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이는 페르시아 인들이 알렉산더를 페르시아 제국의 정당한 계승자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기여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나 이집트, 인도의 정벌에서 현지의 관습과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가 페르시아풍의 옷을 즐겨 입고, 이집트의 아몬 신전에서 제례를 올린 것이 대표적인 예다. 알렉산더가 아시아 정벌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유럽과 아시아의 통합이었다.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및 다른 이민족과 대규모 결혼을 추진한 것도 결연을 통한 상호 동화와 교류를 촉진시키려는 의도였다. 자신이 박트리아의 귀족의 딸과 결혼했고 휘하 장군 및 병사 1만 명의 대규모 합동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또 전승지마다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만들어 제대 군인 및 그리스인들을 정주시킨 것도 동서양의 문명교류의 물꼬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집트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가 대표적이지만 페르시아 전역에 크고 작은 알렉산드리아가 69개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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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중부 지방 고르디온에 있는 미다스 왕 무덤 인근에 있는 박물관 벽을 장식한 알렉산더 대왕의 모자이크 복제 작품이다. 알렉산더가 터키 및 페르시아 지방에서도 영웅시 되고 있는 일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박경귀 |
알렉산더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지나친 자신감과 정복의 연이은 성공에 따라 높아진 자만심이 화근이었다. 그는 사후에 신이 된 헤라클레스를 넘어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받길 내심 희구했다. 이집트의 사제로부터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언명을 받은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싶었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길 바랐다. 알렉산더 자신을 신격화 하려던 것이었다.
자신을 알현할 때 그리스인도 페르시아 식으로 무릎을 꿇고 절을 할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이런 점이 자유의 정신이 투철한 그리스인들의 반발을 크게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왕 또한 동료 시민의 한 사람 정도로 여기는 그리스인에게 페르시아 식 부복(仆伏)은 굴종의 상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인 및 이민족을 왕의 친위대에 발탁하고, 페르시아 관습을 중시하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알렉산더가 자신에 행태와 정책에 대해 험담과 비판을 가하던 휘하 장수 여럿을 죽이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 알렉산더의 리더십에 큰 상처를 준 사건이다. 필로타스, 칼리스테네스, 파르메니오가 그 희생양이 되었다. 명분은 모반의 죄를 물은 것이었지만, 사실 알렉산더의 권위에 도전한 것에 대한 징벌의 성격이 짙었다.
알렉산더가 적지 않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그 이전에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대 제국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 탁월한 용맹과 실천하는 리더십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알렉산더는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설득할 수 있는 연설 능력이 탁월했다. 전략 전술의 운용도 창의적이고 유연했다. 게다가 유럽과 아시아의 융합을 시도한 시대를 뛰어넘은 통찰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가 33세의 이른 나이로 죽자마자 대 제국의 통치를 둘러싼 부하 장군들의 분열과 대립으로 제국이 분할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장악력과 통솔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반증해준다. 그가 좀 더 오래 생존했다면 자신이 공언했듯이 아라비아 반도 및 아프리카 정복으로 당시 인식되는 거의 전 세계의 통일을 이루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알렉산더의 아시아 정복은 그가 희구하던 대로 유럽과 아시아가 완전하게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동서양의 문명의 교류를 촉진시켜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가 칭기즈칸이나 나폴레옹, 카이사르와 같은 정복자와 다르게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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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도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지음, 윤진 옮김, 충북대학교 출판부(2011, 2쇄). 50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