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사옥 인수 현대미술의 큰손 (주)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와의 대화<중>

(주)아라리오 김창일(64) 회장은 세계 200대(大) 미술품 컬렉터의 한 명으로 유명하다. 한국인으로는 그가 유일한데, 그런 김 회장이 요즘 잇달아 사고를 치고 있다. 제주국제공항에서 10여 분 거리인 탑동에 미술관 세 곳을 10월1일 동시 오픈했다. 김창일의 예술영토가 제주도까지 넓어진 것이다. 한 달 전 그는 서울의 도심에서도 승부수를 띄웠다. 지난해 화제를 뿌리며 인수했던 건축가 김수근(1986 작고)의 대표작인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 사옥' 에 대한 리모델링을 끝내고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란 이름으로 9월1일 오픈했다. 구(舊) 사옥은 전시공간으로, 새로 지은 유리 건물은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꾼 변신이다. 경영자이자, 미술작가이기도 한 그는 도깨비가 맞다. 며칠 전 제주도 미술관 오픈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꿈을 이룬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 노래를 참을 수 없다 "며 가수 전일권의 노래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불러제꼈다. 청년 같은 설렘과 에너지의 김창일, 전에 없던 문화 비지니스의 최전선에 선 그와의 대화를 세 차례로 나눠 싣는다. 그와의 대화는 우리시대의 문화 경영에 암시를 준다. 다음은 '중' 편이다. [편집자주].

   
▲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에게는 자본의 논리를 예술시장에 적용한다는 일부 비난도 없지 않지만, 그건 '위대하게 은밀하게' 돌아가는 자본과 아트 사이의 멋진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볼멘소리일 뿐이다. 그는 종종 그걸 공룡 이야기로 비유한다.

공룡이 약해서 멸종했을까? 환경에 적응 못해서 죽었듯이 국내미술도 자전거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자동차 시대로 진화해야 한다는 지론이고, 자신이 작가-화상-콜렉터-전시공간의 네 개의 바퀴를 갖춘 것도 그런 맥락이다. 오래 전 개관한 서울과 베이징과 뉴욕의 아라리오화랑도 글로벌 시대를 위한 베이스캠프다.
 

어쨌거나 김창일에게 뗄래야 뗄 수 없는 게 아트와 비즈니스, 미술과 돈 사이의 이중주다. 그는 스물일곱 살에 미술과 인연을 맺었다. 빨랐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미술 콜렉션이란 보통 부자들이 뛰어드는 최후의 취미인데, 김창일에게 미술이란 실은 첫사랑이었다고 그는 대화에서 밝혔다.

터미널사업으로 돈을 만지던 그는 바로 서울 인사동 출입을 시작했는데,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이나 운보 김기창의 작품을 사들였다. 젊은 그를 화랑 주인들이 거들떠도 보지도 않자 <한국미술전집> 10권 사들여 1년 동안 좔좔 외운 뒤 현장에 나가는 근성을 발휘했다.
 

실은 터미널사업 전부터 돈을 좀 만질 줄 알았다. 그때 벌써 주식 투자로 한몫 잡았다. 그의 고백대로 "내 눈에는 남이 못 보는 걸 보는 무엇"인가가 있었는지 경희대에 복학한 1974년 말 주식 투자 정보를 갖고 있는 한 학과 교수에게 학생들이 수익금의 5~6%를 주면서 투자를 배우던 걸 눈여겨 봤다.

그 교수에게 배팅했다. 15% 이익금을 드릴테니 족집게 정보를 달라고 담대한 제안을 했다. 교수로부터 건설주와 은행주를 사라는 조언을 받았고, 바로 투자했다. 놀랍게도 3년이 채 안된 시점에서 수수료 15%를 제한 뒤에도 2500만 원을 쥘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는 아파트 한 채가 1000만 원이 채 안되던 무렵이었다.

   
▲ 세계 200대 미술품 컬렉터의 한 명으로 손 꼽히는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
"아트와 비즈니스, 미술과 돈 사이의 이중주에 나는 일찍 눈 떴다"

-젊은 혈기에 잠시 흥청망청했다는 무렵도 그때인가요?
"맞아요. 한 달 가까이 서울 약수동 부근의 술집 등을 찾아다지며 비싼 술 마시고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아니구나 하는 판단이 바로 들었어요. 왠줄 아세요? 제가 밤마다 악몽을 꾸는 겁니다. 시험을 보는데, 분명 답을 알겠어요. 그러나 시간에 없어서 못 쓰고 발을 동동거리는 아주 끔찍한 악몽인데, 이 과정에서 아 이렇게 먹고 마시고 노는 건 내 길이 아니구나하는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바로 발을 끊었다가 이듬해에 어머니의 제안으로 천안에 내려가서 터미널 매점 사업을 시작했고, 돈을 모으자 미술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때 상황에서 비즈니스라면 제조업 같은 데 눈을 돌렸을텐데, 왜 그런 쪽엔 관심이 없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대학 졸업 뒤에 저도 처음에는 제조업에 뛰어들려고 했죠. 구체적으로 검토했던 아이템이 하나 있었습니다. 규사 즉 모래로 만든 가다(틀)에 쇳물을 부어 솥단지나 그런 주물(鑄物)을 만들어내는 사업을 하려던 바로 그 무렵에 어머님이 천안에 내려가라는 지시를 했고, 생각이 확 바뀌었던 겁니다. 참 묘하죠? 그 한 마디로 제 인생의 그림이 뒤바뀌었어요. 운명이란 게 따로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랑 주변의 조각엔 ‘I’m hungry. I wanna eat a dream’이란 글귀가 붙어있습니다. 입구 인형에도, 심지어 엘리베이터의 소품에도….
“나는 꿈꾼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절대 신봉합니다. 꿈을 먹는다고 표현한 것도 그게 일상이어야 한다는 뜻이죠. 아직도 나는 꿈이 고파요. 제 모토가 그거 아닙니까. 나는 꿈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dream, therefore I am.)
 

-이미 성공하신 거 아닙니까?
"그건 아녜요. 아라리오 그룹이 안정된 건 요즘 몇 년 사이예요. 회사 재정이 힘들고 어려웠고, 회계사들이 절대로 더 콜렉션하면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치곤했습니다. 비즈니스란 때론 생존이 문제인 겁니다."

"모든 이들의 반대 무릎 쓰고 신세계백화점과의 제휴한 것도 내 소신"

-겉보기와는 또 다를 수도 있는 것이군요. 예전 야우리백화점을 신세계백화점 충청점으로 바꾸는 결정도 그런 것인가요?
"그렇죠. 천안 고객들에게 더 좋은 걸 보여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예전의 야우리백화점 가지곤 안 되죠. 좋은 서비스 제공도 어렵겠지만, 미래의 생존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세계와 제휴를 결정한 겁니다. 백화점은 우리 소유이고 운영하지만, 신세계라는 브랜드를 가져다가 쓰고, 세계 수준에 도달한 그들의 경영지도를 받는 겁니다."
 

-이제 본질을 여쭤보는데, 김 회장께서 생각하는 서비스와 아름다움이란 결국 하나인가요?
"제가 전세계의 좋은 백화점은 죄다 가보고, 미술품 콜렉션을 하면서 나름 깨달은 것인데, 상업과 비즈니스에서 말하는 서비스와, 아트에서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게 결코 아닙니다. 아름다움이나 미학이란 관객이 느끼면 됩니다. 물론 많은 교양체험과 인문학적 배경이 전제가 되겠지요. 서비스란 뭐냐? 그것도 순수함, 감동과 생명력이 살아있는 서비스를 제공할 때 진짜이거든요. 갑자기 비가 오면 직원들이 나가서 고객에게 우선을 씌워드립니다. 그때 느낌 생명력 영혼 같은 게 전달되지 않으면 서비스란 겉치레와 위선에 그치고 맙니다. 그런가 아닌가를 고객들은 삽시간에 알아챕니다."
 

-그렇군요. 아주 무섭네요.
"예술도 그래요. 아름다움이란 뿌리가 잘린 채 꽃병에 담겨진 꽃을 보고 그냥 해보는 찬사 같은 게 아니잖아요. 역설인데 디지털시대에 접어들어 본질이나 인문학적 정신, 그리고 철학적인 것이 생존을 위해 중요해졌습니다. 쉽게 말해 진정성이 살아있는 서비스, 생동감과 생명이 담긴 아트의 중요성은 더 커집니다. 인터넷이다, SNS다 하는 걸 통해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진짜와 가짜를 알아냅니다."(이날 대화의 어록 중 하나가 이것인데, 김창일은 둘 중의 하나다. 화려한 말잔치의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제대로 된 큰 장사꾼이거나….)
 

-그럼 서비스란 아름다움의 하위개념 같은 게 아니라고 보십니까?
"하위개념이 결코 아니죠."
-답변 좋습니다. 그럼 혹시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인 아트에 인간을 치유하는 기능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세요?
"물론이죠. 현대미술 중에는 위선적 아트나 거품 같은 것도 끼어있을 겁니다. 그러나 진짜 좋은 예술이 따로 있는데, 그건 다릅니다. 인간 안의 선(善)을 키우고 붇돋아줍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이란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에 따라 선이 키워질 수도, 악이 지배적일 수도 있죠. 이때 좋은 아트를 만나면 선함, 본질을 키울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외국을 보세요. 왜 기를 쓰고 공연장과 뮤지엄을 지으려고 합니까? 그게 종국에 가선 사회정화에 이바지하니까요."

"정말 좋은 예술은 인간의 선(善)을 키우고 붇돋아준다."

-좋아요. 이제부터는 김 회장 평생의 꿈인 뮤지엄 이야기입니다. 나는 꿈꾼다. 고로 존재한다는 게 결코 몽상이나 백일몽은 아니잖습니까?
"뮤지엄, 즉 미술관이라는 단어가 저에게는 너무 너무 좋아요. 꿈이자 상징이고, 삶의 모든 것입니다. 혹시 어떤 이들에게 뮤지엄이란 자신의 돈과 재산을 포장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겠고, 또 부자의 최후 취미일 수도 있겠죠. 저는 많이 달라요. 김창일의 최종목표이고, 꿈이라서 끝내 가야만하는 그걸 겁니다."
 

-루이 뷔똥이나 구찌를 소유한 오너들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겠죠?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분명한 건 미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뭔가 불편한 게 있잖아요. 그건 미술동네가 좀 음성적인 대목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있어서 저런 걸 가졌지?'하는 의구심을 사람들은 품고 있습니다. 사실 콜렉션한 분들도 그게 마음에 좀 걸려서 자기 콜렉션을 공공장소에 내놓지 못하거나, 그렇다고 해도 구입 가격만은 비밀로 해달라고 쉬쉬합니다. 아라리오는 투명하게 죄다 공개를 합니다. 정당한 소득으로 작품 사들이고, 세금 꼬박꼬박 다 냅니다. 아까 말한대로 얼마 전 구입한 앤디 워홀의 마릴린 몬로 연작(10점)이 240만 달러라고 액수를 다 밝혔던 것도 그래서 가능합니다. 이거 말을 하다 보니 제 자랑 같은데 이거 어떻게 하죠?"
 

-뭐가 문제입니까? 저야 김 회장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죠.
"사실 저는 땅을 한 번도 사본 일이 없습니다. 천안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땅에 투자했던 분이지만, 가장 크게 망한 분들도 땅만 찾아다닌 분이더라구요. (주)아라리오가 우리나라 100대 기업도 아니잖습니까? 그런 제가 어쨌거나 여기까지 온 것은 그래도 정신이 온전하고, 꿈이 살아있으니까 가능했던 것 아닐까요?"
 

-꿈에 투자하신 셈인데….
"무수한 실험과 실패를 통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실험과 실패는 우리의 재산이고, 미래를 위해 나가는 계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78년 첫 그림을 구입하고, 버스터미널을 인수한 89년 아라리오갤러리를 개관했습니다. 이후 서울과 뉴욕 베이징에 아라리오 갤러리(상업화랑)를 뒀지만, 최종 목표는 뮤지엄(미술관)입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생명력과 진정성이 살아있는 그런 공간이 될 겁니다. 본질이나 인문정신, 그리고 철학을 얻어갈 수 있는 뮤지엄을 꿈꿉니다. 그러나 규모로 관객을 누르지 않는, 즉 권력지향적 뮤지엄과 다른 무엇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드립니다."
 

   
▲ 김창일에게 뗄래야 뗄 수 없는 게 아트와 비즈니스, 미술과 돈 사이의 이중주다. 그는 스물일곱 살에 미술과 인연을 맺었다. 빨랐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미술 콜렉션이란 보통 부자들이 뛰어드는 최후의 취미인데, 김창일에게 미술이란 실은 첫사랑이었다고 그는 대화에서 밝혔다.
 

-얼마 전 오픈한 제주도 미술관이 꿈 속의 뮤지엄이네요. 서울의 공간사옥도 그렇구요.
"제주도 미술관은 생각해보면 참 운명적이예요. 8년 전인가 와이프의 친구 초대로 제주도를 갔어요. 여행을 끝내고 마침 시간이 한 시간 남는데, 하도리에 가보자는 제안이 있었어요. 제주공항에서 한 시간 거리인데, 딱 보자마자 그곳이야말로 제가 동경해오던 공간인 겁니다. 비행기 조종석 레이더망으로 찾던, 바로 그런 사이트예요. 그냥 꽂혀가지고 제가 아는 건축가 이종환 씨에게 바로 연락했습니다. '이땅을 내가 살테니까 당신이 당장 와서 주변을 살펴보고 설계도 해줘라.' 그리고 6개월만에 미술관 공사 시작했으니까요."(이번 개관한 탑동 미술관 세 곳 이전에 하도리부터 그는 시작했다.)

"오너의 정신이 온전하고, 꿈이 살아있는 기업은 끝내 성공한다"

-부인께서 말리셨을텐데.
"지완 아빠, 지금 제 정신이야? 그러더구요. 나중에 보니 관리비만 연 1억 원이 듭니다. 실은 저는 그런 개념조차 없는데, 뮤지엄 즉 미래의 꿈을 찾았으니까 다른 생각은 전혀 안 드는 겁니다."(파워콜렉터 김창일은 허툴게 돈을 쓰지 않는다. 택시요금 4800원이 나오면, 거스름돈 200원을 반드시 챙긴다. 청년 김창일을 애태우던 경기여고 출신 아내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했던 비장의 카드도 자신만의 자린고비 정신이었다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민트향 나는, 구멍 뚫린 사탕 하나를 서울 명동 길거리에서 사서 그걸 예전부터 예고했던 선물이라며 들이밀었는데, 콧대 높은 아내가 '이 남자 괜찮네'라며 순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단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 허세없는 사람이었던 서로를 알아본 계기다. 반면 그는 많은 이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해주는 비즈니스, 수십 억 원대 미술품 배팅에는 가히 몬스터급이니, 그 또한 신기하다.)
 

-8년 전 꽂혔던 하도리가 지금도 여전히 좋은 겁니까?
"물론이죠. 제가 한번 내려가면 10일 동안 묵는 것도 그곳이 너무 좋아서 그런 겁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지역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앞으로 미술관 경영은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지금까지 우리나라 뮤지엄은 국공립이건 사립이건 설립 이후가 문제입니다. 사립의 경우 나도 뮤지엄을 한다는, 약간 과시하거나 으스대는 성격이 없지 않았고, 때문에 경영은 뒷전이었죠. 저는 감히 말합니다. '미술관은 좋은데, 운영이 어렵다'는 식의 슬픈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3700점 콜렉션은 세계 수준이니까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데, 나머지 절반을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문화서비스로 채웁니다. 가슴 두근대는 생명력과 만족감 그리고 진정성을 전달하는 게 관건입니다."

"제주도 관광객 1000만 명의 10%를 미술관에 끌어들일 생각"

-과연 어떻게가 문제 아닙니까?
"100만 명이 목표이죠."
-우와! 한 해 관람객 숫자를 그렇게 많이 잡으신 겁니까?
"맞아요. 연 100만 명."
 

-삼성에서 하는 미술관 리움은 얼마나 들지요?
"그건 잘 몰라요. 세계 최고라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이나, 영국 테이트모던갤러리의 경우 연 250만 명이 찾아오는 걸로 압니다.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이 1000만 명이 좀 넘는다니까."('미술관은 좋은데, 운영이 어렵다'는 슬픈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는 말에 밑줄을 쫙 그었지만, 경영 마인드를 도입한 뮤지엄의 앞날이 궁금해진 건 그의 꿈과 스케일 때문이다. 감히 MoMA나, 테이트모던과 비견하려 하다니. 생각해보니 그는 껌 팔며 꿈을 품었던 인생이 아니던가? 100만 관객이 어렵다는 건 김창일을 모르는, 예단일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걸 늦게 물어봅니다. 대체 언제 뮤지엄의 꿈에 사로 잡힌 겁니까?
"그걸 저도 정확하게 잘 모르겠어요. 제주도에 내려가 명상을 좀 더 해보고 딱 깨우친 다음에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가를 말씀 드릴께요. 단 제 가슴에, 마음의 밭에 뮤지엄이란 씨앗이 툭 하고 떨어졌던 순간의 하나는 198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에 가서 현대미술을 접했을 때인 건 분명합니다. 화집에서만 보던 미술작품이 눈앞에 쪽있던데, 그 전율은 말도 못해요. 돌아와서도 그때 봤던 작품들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 겁니다. 그걸로 제 인생의 꿈과 목표는 정해진 겁니다. 지금도 그래요. 내가 뮤지엄을 하면 그림을, 조각을 어떻게 걸고 설치할까 생각하면 너무 행복한 겁니다."
 

-그런 걸 많은 사람들이 느끼게 하고 싶은 꿈?
"그럼요. 나중에 제 미술관 왔을 때, 1백만 명 중 한 명이라도 1980년 당시 저 같은 감동을 느꼈다면 전 그걸로 돼요. 인터뷰 기사를 보신 독자들 중에서 몇 분이라도 저와 같은 꿈을 품게 되었더라면 저는 만족해요."
 

-좋습니다. 저는 좀 다르게 봐요. 김 회장 마음의 밭에 뮤지엄이란 씨앗이 심어진 건 어쩌면 타고난 거, 즉 DNA인지도 몰라요. MOCA는 그냥 계기였을 겁니다. MOCA 다녀왔다고 모두 뮤지엄을 꿈꾸나요?
"맞는 말이기도 해요. 사업가로 성공하지 못하면 뮤지엄의 꿈도 완전히 날아가 버린다는 조바심이 항상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몰입을 했고, 과정 하나하나가 즐거웠죠."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