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편들기보다 사회갈등 해소·치유에 당당히 앞장서야

전우현 민족과 자유의 새 지평(13)-지식인이여, 어서 깨어나야

   
▲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는 당당히 아시아 2위, 스포츠 강국자리를 다시 한 번 굳혔다. 빛나는 위업이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가 심상치 않다. 철강, 정유, 조선은 물론 자동차 심지어 IT산업까지 급격한 내리막길이다. 이대로라면 일자리고 복지고 다 없다.

여러 단기적 처방이 관료, 경제학자 사이에서 나오고 있지만, 길게 반성하면 30년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은 댓가다. 어찌 보면 나라야 어렵건 말건 우선 내 주장만 앞세우고, 법을 빙자한 합법적 대한민국 괴롭히기가 도를 넘은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다. 이런 풍토에서 어찌 국제경쟁력을 키우고 젊은이를 고용할 넓은 공장을 세우랴?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할 일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지식인부터 깨어야 한다.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좌파적 습성을 버리고 힘써 건설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나라와 배달겨레가 산다. 지식인은 정신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자 또는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노동자이다. 비록 권력은 없으나 사회에서 혜택을 받은 계층이다.

또, 여론형성에서 나름대로 주도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식인도 잘못 판단하거나 자기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때가 많다. 특히 지식인이라고 하여 부자(富者)인 것도 아니다. 지식인이 계급사상과 평등 포퓰리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같다. 그러나, 지식인은 일반 민중보다 더 지혜가 있다. 그러니 국민 전체를 살릴 방향을 판단하고 가르치려고 애써야 한다. 약소국 대한민국의 지식인에게는 이것이 더욱 절실하다. 그리고, 지식인은 어느 한 쪽 편을 들어서 사회갈등을 조장하기보다 화해, 용서,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본래 지식인이 무산계급, 즉 프롤레타리아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계급사상(階級思想)에 불을 붙이는 것은 맞지 않는다. 어찌보면 허위의식(虛僞意識)인 것 같기도 하고 편치 못한 곤혹함도 있다. 그런데 지식인 자신이 사회의 주류집단에서 소외되거나 주변화될 때 이러한 동일시(同一視)가 촉진되기도 한다.

   
▲ 지식인이 무산계급, 즉 프롤레타리아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계급사상(階級思想)에 불을 붙이는 것은 맞지 않는다. 지식인은 어느 한 쪽 편을 들어서 사회갈등을 조장하기보다 화해, 용서,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인문사회과학 지식인들이 주변인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간혹 생겨났다. 인문사회과학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시장경제의 상품을 생산하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형 지식인, 인문사회과학의 지식인들은 상품경제에서 위기를 맞고 흔히 주변화(周邊化)의 압력을 받는다. 지식인의 급진화(急進化), 좌경화(左傾化)는 여기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다 그런 것도 아니다. 예외도 많다. 인문사회과학 주변화에도 불구, 계급사상의 오류를 지적하고 국민, 민족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자유민주사상, 국제협조, 시장경제 원리를 피할 수 없다고 외치는 학자도 적지 않다. 자신의 존재를 넘어 사회전체를 꿰뚫어보고 용기를 보이는 지식인이 진정한 지식인이다.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 노력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다.

과거를 돌아볼 때 일제 식민지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나타났던 주관적 이유는 조선 내부의 지식인 엘리트들이 자신과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면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탓이다. 이는 식민지 지식인에게 문학과 과학이 중요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면모다. 뒤쳐진 변방의 조선을 세계의 대열에 합류시키는 수단이자 교양인의 내면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몰두한 것이 문학과 과학이었는데, 그와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든 것이다.

중국에서도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은 좌파 지식인일수록 흔히 가난한 이웃에 대한 의무감, 배려심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무감의 발로로 모택동 시절처럼 문화혁명을 다시 부르짖는 좌파가 된다면 이해받을 수 있을까? 가난한 민중에 대해 좌파지식인들은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순결하여 때묻지 않았고 우수하며 혁명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들은 하층의식으로 모택동을 이해했고 그를 시적으로 승화하며 민중주의 혁명의 성인(聖人)으로 모신다. 여전히 이들은 모택동이 한 문화대혁명 유토피아 사상의 오류나 문화대혁명이 중국인에게 가한 고난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비판이나 반성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오히려 진리 편에 있다고 여기고 강렬한 도덕적 우월감마저 지니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모든 사물을 ‘정의(正義)’가 아니면 ‘부정의(不正義)’라는 양극(兩極)으로 나눈다. 또 인민, 민중의 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부도덕하다고 몰아세운다. 또,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독단은 이들의 심리상태를 극히 편협하게 만들고 대단히 살기등등하게 하였다.

이 심리는 폴포트식의 혁명적 격정과 체 게바라 정신과 같은 급진적 좌파의 사유방식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부자(富者)를 공격하여 가난을 구제한다’는 전통적 평등주의(傳統的 平等主義)가 공산주의의 정치문화에 내재한 전통적 요소(혁명적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생각은 민중을 동원한 평등사회의 실현에 강한 흥미를 보이는 것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좌파의 밑바닥에는 폭동을 일으킨 민중정치의 혁명적 경향, 하층 혁명의식, 민중 동원에 호소하는 내적 충동이 배어 있다. 심지어 체제로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실패는 인정하더라도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가치유지와 체제의 실패는 별개라고 여긴다. 사회주의의 가치는 영원하다고도 한다. 유토피아는 존재가치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의 마음에 담긴 미래의 이상사회는 평등하고 착취가 없으며 비인간적인 경쟁이 없는 휴머니즘이 가득찬 사회이다. 세계를 부자(富者)와 빈자(貧者)로 나눈 후 부자는 도덕적으로 부패, 타락, 부정한 자이며 빈자는 선량, 순결, 도덕적으로 고상한 자라고 한다. 따라서 부자에 대한 빈자의 혁명은 자연스럽게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생각 즉, 부자에 대한 빈자의 혁명사상은 공산당의 혁명 이데올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하여 시장경제와 대외개방정책에 극도로 반대한다. 그러나, 중국 안에서도 이러한 좌파는 환영받지 못하고 비판받고 있다.

‘날씨가 추워져 감기에 걸리기 쉽다고 외출을 안할 게 아니라 나가서 신체를 단련해야’ 하듯이 시장경제의 새 흐름에 맞추지 않으면 중국인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이다. 진정 정직하고 착한 부자마저 부정하고 대외개방에 반대하는 좌파의 방식대로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없게 되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하여 시장주의 자체에 대한 좌파 지식인의 비난은 틀렸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인 중 자유주의자, 시장경제주의자의 절대다수도 시장화 과정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규범상실(반법치주의), 부정부패, 사회적 불공정에는 반대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가고 대외적으로 뛰어나게 자유주의로 이끌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저성장(低成長), 장기불황(長期不況)의 위험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내야 한다. 한민족의 희망은 대한민국 밖에 없지 않은가? 연구실에서의 소극적인 정부비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이것이 지식인 개인의 성취와 사회적 대의실현을 연결하는 열쇠이다.

그리하여 지식인의 개인성취와 사회적 대의실현이라는 두 과제는 모순충돌관계에 있지 않다. 공산주의, 계급사상이라면 대의실현의 슬로건을 내세워 개인을 가차없이 사회 앞에서 희생시키지만, 계급사상에서 깨어난 지식인이라면 얼마든지 이 둘을 조화할 수 있다.

수신(修身)‧제가(濟家)에서 터득한 덕성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에서 응용된다. 따라서 지식인은 안정되고 희망을 부르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과 한민족을 밝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한반도에 사는 지식인의 소명임을 받아들이고 깨어나야 한다. /전우현(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