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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희 전 방통위대변인 |
표현의 자유에 대한 아주 고전적이고 유명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자. 미국 건국초기 언론자유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인 인물인 벤자민 플랭클린은 “글을 처벌할 수 있는 위임받은 장관이 있다면, 그는 가장 파괴적이고 끔찍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셈이다. 무성한 가지를 쳐낸다는 구실로 그는 나무를 죽이기 십상일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국가의 통제는 제도적 폭력으로 변해 민주주의를 고사시킬 것이라는 의미이다.
최근 검찰의 ‘사이버 검열’을 둘러싼 논란은 18세기 언론자유 사상가의 말을 고리타분한 역사책에서 다시 끄집어내게 만든다. 오비이락격인지 몰라도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 도를 넘고 있다”고 발언한지 불과 이틀만에 사이버 검열 방침을 발표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은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우리사회에 꾸준히 증가되어 그 적폐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만큼 인터넷 실시간 모니터링을 통해 허위사실 유포 사범을 상시 적발하겠다”며 ‘인터넷 검열자’로 나선 것이다.
검찰의 발표는 당장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시민단체들의 반발을 불러왔지만, 검찰 조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의견도 제기된다. 지난 주말 아침 한 방송사의 대담프로에 출연한 한 변호사는 자신의 경험을 들며 “검찰이 모니터링을 하면 많은 이용자들이 진위가 불분명한 글들을 올리거나 옮길 때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라며 ‘예방적 효과’를 강조했다. 아마도 검찰의 논리도 이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사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법조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중상모략이나 음란물, 욕설 등 거친 표현들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와 마찬가지로 사이버공간에서의 이와 같은 표현들은 처벌된다. 그럼에도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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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카오톡과 공권력의 사이버사찰에 항의하는 시민모임 회원들이 서울 한남동 다음카카오 사무소 앞에서 카카오톡 검열 논란과 관련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글을 올릴 때 검찰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고 생각해보자. ‘아, 이건 좀 위험할 수 있는데, 혹시 나중에 보복당하지 않을까, 혹시 검찰에서 문제되는 것 아냐’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것이다. 이 과정에서 명예훼손적 글은 물론 정상적이고 자유로운 의견 표현까지도 ‘위축’될 수 여지가 생긴다. 이른바 ‘위축효과’(chilling effect)이다.
법원이 공인이나 공적영역에 대한 비판에 대해 관대한 이유도 위축효과를 방지하고 표현의 자유가 ‘숨 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경우 연방대법원은 1964년 뉴욕타임즈 대 셜리번 사건 (New York Times v. Sullivan, 376 U. S. 254)에서 언론이 ‘현실적인 악의’가 없는 한 다소의 허위사실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공인에 대한 비판에는 면책을 주어야 한다는 기념비적 판결을 했고, 우리나라 대법원도 공인과 공적 영역에 대한 비판에 대해선 두터운 법률적 보호막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확립된 판례이다.
가령 1%의 명예훼손적 표현물을 규제하기 위해 국가가 엄격한 칼을 들이대면 자칫 99%의 건강한 표현행위가 얼어붙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공적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쉽지 않고, 풍자와 패러디 등에서 보듯 명예훼손적 표현과 비판의 경계가 모호하며, 일반인들이 어떤 사건에 대한 진위확인이 쉽지 않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어디까지 허용할지에 대한 기준도 자의적이다.
특히 SNS와 같은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의 중간적 성격의 대화공간에서 이러한 기준은 더욱 애매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검찰이 모든 국민을 상대로 사이버 공간의 대화나 게시글 등을 잠재적으로든 실재로든 검열대위에 올려놓고 ‘건강성’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나섰으니 이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2002년 인터넷을 ‘가장 참여적인 (사상의 자유)시장’이자 ‘표현촉진적인 매체’라고 규정했다. 사이버 공간을 “질서위주의 사고로만 규제하려 해선 안된다”면서 “국가는 규제의 과잉보다는 오히려 규제의 부족을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악이 명백히 검증된 것이 아닌 표현을 규제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고 보는 것이다.
헌재의 논법을 검찰의 사이버검열에 대입해보면, 검찰은 오히려 위축효과를 적극적으로 야기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국민을 쫄게 만들어 인터넷 시장에서 대화나 토론의 질서를 잡겠다는 위험한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의 사이버검열은 그러나 플랭클린이 우려한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인터넷 산업마저 질식시킬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실제 카카오톡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검찰의 검열이 미칠 것이라는 ‘검열공포’로 인해 무려 150만명 이상이 텔레그램과 같은 외국 SNS로 ‘사이버망명’을 떠났다.
이용자의 반란이다. 덕분에 토종메신저로 국내 SNS시장을 지키던 ‘카카오톡’은 큰 시련을 맞고 있다. 사실 인터넷 산업의 역사는 규제와의 힘겨운 대결을 벌여왔다. 과거 인터넷 실명제로 인해 이메일과 동영상 시장을 G메일과 유튜브에 손쉽게 잠식당한데 이어 인터넷게임산업도 ‘셧다운제’라는 이상한 법률에 발목잡혀 있다. 이제는 SNS가 다시 규제로 질식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창조경제를 만들어갈 가장 창의적인 분야인 인터넷 산업이 규제로 인해 가위눌리고 있는 모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규제의 역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논란의 와중에 카카오톡에 대해 지난해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검찰· 국정원등으로부터 감청 요청이 총 147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은 새로운 양상을 맞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SNS의 대화내용까지 저장되고 검열되느냐”고 문제삼으며 검찰을 공격하고 있다.
물론 감청의 남용됐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감청 자체는 다음카카오의 해명처럼 법에 따라 ‘국가안보 등 극히 제한적인 조건에서 법원의 영장에 의해 집행’되는 수사기관의 정상적인 수사 및 증거 확보 방법이다.
앞서 검찰의 방법이 모든 국민(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전방위 상시 검열이기에 위헌소지가 크지만, 문제가 된 카카오 감청은 ‘범죄용의자’라는 극히 제한적인 대상과 제한적 기간과 범위내에서 행해진다는 점에서 전자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영장에 의한 계좌추적이나 가택수색과 다르지 않다.
만약 이러한 수사방식마저 문제가 된다면 범죄에 대한 사회의 방어력은 현저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남용의 소지가 있다면 법원이 보다 영장허가기준을 더욱 엄격히 하거나 법을 엄격히 만들면 되지, 감청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
최근 트위터가 정부의 감청 요청건수를 공개하겠다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도 합법적 감청 자체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남용방지’에 목적이 있다. 카카오톡은 앞으로 대화내용 서버 저장기간을 대폭 축소할 방침이라고 한다. 규제 이슈를 돌파하기 위한 기술의 생존전략이다. 현실화된다면 감청 자체가 무의미해지거나 효과가 반감될 것이다.
다시 우리 검찰의 사이버검열을 생각한다. 검찰이 지향하는 사이버 공간은 어떤 모습인가. 검찰은 시대에 맞지 않는, 선진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사이버 검열로 표현의 자유를 위태롭게 하고, 국내 인터넷 산업은 활력을 잃고 있다. 검찰 스스로는 ‘감청’이라는 합법적 수사기법 마저 고사시키려 하는 자승자박에 빠졌다.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다. /이태희 (재)TEIN협력센터 사무총장, 전 방송통신위 대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