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외면하는 무책임과 극단적인 노동운동, 정치운동 중단해야

14. 시지프스 고통과 지식인의 책임

   
▲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우리 한국사회는 살 만하다 싶으면 곧 위기가 온다. 6.25가 그랬고 IMF 외환위기, 유럽발 금융위기 등이 그렇다. 최근에는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했다. 무거운 돌을 굴려 산 위에 올려놓으면 금새 아래로 굴러떨어져 다시금 올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신화 그대로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지식인이 각성하지 못한 탓이다.

지식인에게 잘못 배운 모범생 제자는 오만한 권력자나 방탕한 졸부(猝富)가 되어 서민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그 반대로 지식인 스승으로부터 평등지상주의를 주입받은 제자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 어느 쪽도 한국사회에 바람직하지 않다. 이래서는 바닥이 튼튼해지지 않는다. 견고하지 않은 바닥이므로 언제든지 역사전쟁이나 경제위기가 온다.

지나치게 단순하게 본 것 같지만, 대한민국에 시지프스의 고통을 가져오는 3가지 부류를 본다면 다음과 같다. ⅰ) 첫째, 핵, 미사일 등으로 무장한 북한의 정규군사력이다. ⅱ) 둘째, 남한 내부의 주체사상파이다. ⅲ)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기주의와 지역주의, 계파싸움주의, 오만함과 권위의식에 빠진 사람들이다.

ⅰ)그룹이 자유주의 대한민국에 가장 큰 불안과 고통을 가져오는 적대세력이라고 한다면 ⅱ)와 ⅲ)은 대한민국 내부의 적이다. ⅲ)그룹이 훌륭한 신념과 헌신적 행동으로 바로 설 수만 있다면 ⅰ), ⅱ)도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대한민국을 지킬 수 없다. 그런데, 현재 ⅲ) 중 많은 이들은 민족주의나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지 않는다.

현실의 정치적·사상적 지형도(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 김일성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애써 외면한다. 특히 ⅲ)의 그룹은 사실상 자유민주주의자도 아니면서 부정부패, 이기주의로 일반 국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도덕성 문제가 있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들은 출세지상주의, 보신지상주의로 자신을 무장한 무(無)이념, 무(無)이상주의자, 웰빙 족들이다.

그저 현실에 안주하여 돈만 벌고 권력을 손아귀에 넣어 안락을 누리면 된다는 사람들이다. 패망 직전 베트남의 티우나 키 대통령의 의식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어찌 한국인이 시지프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지식인은 이를 알고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인간의 진정한 힘은 신념이나 사상에서 나온다. 큰 다툼도 그 사상 차이에서 온다. 이는 이미 탈 선사시대 즉, 역사시대 이후에서 증명된 바이다. 특히 중세 이후 유럽에서 일어났던 치열한 논쟁의 원인은 신념, 즉 신앙상 교리 때문이었다. 총, 포, 칼보다 무서운 힘, 부모·형제·민족의 동질성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것이 신념 내지 신앙의 차이였다. 이를 무시하려는 것은 인류역사, 특히 우리의 경우 냉엄한 남북대치 현실에 대한 무지‧무감각의 소치이다.

내가 아는 한국사람 중에는 법원지상주의의 사고를 가진 판사, 교회 지상주의의 생각을 지닌 사제, 대학이면 세상의 복잡한 일로부터 매우 안전한 지대라는 생각을 지닌 교수도 있다. 아마도 법원 안, 또는 교회 안 또는 상아탑 안에서 인생의 모든 혜택을 다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착각이다. 우리 사회의 중심축이 좌익 내지 좌파로 넘어가면 법원지상주의나 교회 지상주의가 어디에 있고 대학교수 안전주의가 어디에 있나? 이러한 비겁한 처신, 보신주의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반을 부실하게 만들었다.

지식인 엘리트들은 대체로 국어, 영어, 수학의 모범생들(소위 범생들)이었겠지만, 윤리도덕이나 사회적 책무의식이 좀 부족함도 사실이다. 자신의 불이익에는 민감하고 신속하게 반응하면서도 나라 자체를 파괴하는 사상적 공세에 대해서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방관자가 된다. 공산주의나 주체사상 등 집단적 폭력에 맞서볼 용기가 나지 않아 비굴하게 이들을 용인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기주의적 엘리트로서는 대한민국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무너져 내린 무거운 돌을 다시 굴러올림은 후세의 고통으로 남겨진다. 이런 사람들 1,000만 명이 있어도 사상적으로 무장된 1만 명을 당해낼 수 없다. 싸움에서 적은 숫자의 군사가 숫자도 훨씬 많고 무기도 훌륭한 상대에게 이긴 사례는 무수하다. 싸움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무기가 하는 것이 아니다.

   
▲ 백 번 양보하여 좌파운동을 이해하더라도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바탕 위에 있어야 한다. 진정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므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일,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무책임하고 극단적인 노동운동, 정치운동을 할 게 아니라 사회개혁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일이다.

심지어 지식인 중에는 대한민국을 홀대하는 사람도 있다. 부모에게 100% 만족하는 자식이 거의 없듯이 조국 대한민국에 100% 만족하는 국민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만족하지 않더라도 내 가족에게 협박하는 강도에 맞서 싸워야 하듯이 대한민국이 위태로울 때는 나라를 지키도록 애써야 한다. 또, 반공주의를 심히 비판하는 지식인도 꽤나 보았다. 따져보자. 냉전체제가 앞서 존재하였고 그 후 북한의 한반도 적화통일노선, 남한의 반공산주의 노선이 생겼다.

그런데, 반공산주의 노선만 왜 냉전체제의 상징이라고 매도되어야 하는가? 왜 반공노선만 비난받아야 하나? 반공(反共)입장은 엄밀히 말하면 우파라기보다는 반좌파(反左派)에 불과하다. 반좌파(反左派)의 주장도 못하게 하는 이렇게 편파적인 태도는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간에 순전히 북한의 공산정권에만 유리하고 남한에는 불리하기 짝이 없다. 북한의 대남비방(反대한민국), 자유반대(反자유)에는 왜 한 마디의 비판이 없는가? 내 나라 대한민국이 없었다면 중국, 일본의 식민지인으로 살거나 북한 김일성, 김정일 우상숭배 체제에서 하루 세 끼 옥수수죽도 겨우 먹을 삶이었을텐데 말이다.

한반도에서 과장되고 미화되어온 좌파운동을 다시 보자. 좌파운동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주류였는가?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현재 좌파 운동의 도덕성을 인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과거의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은 좌파가 주도하지 않았느냐고 하는 좌파 추켜세우기가 없지 않다. 잘못된 논리이다.

항일독립운동은 민족진영, 사회주의진영, 중도파 진영 등 민족 전체의 총궐기였지 계급갈등·투쟁론 일색인 좌파가 주도했다고 한다면 대단한 오류이다. 더구나 좌파가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 항일무장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하여도 이는 계급투쟁의 한 수단일 뿐이었다. 민족운동 자체로서는 순수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피할 길이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식민지 조선을 해방시키지 못하였다. 일제하 사회주의는 시기적으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과 일본인 공산주의자의 지적, 혁명적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비주체적 사상흐름이었다.

그리고 국제정세에 적극적·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리 주권의 회복과 민족공동체의 재건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또, 해방 공간의 한반도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조적 적용을 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이들은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비합법적 폭동운동을 주요 정치 수단으로 하였다(총파업, 5.10총선거를 반대한 폭동, 여순반란사건, 대구폭동사건 등). 그리하여 이들을 식민지 조선의 올바른독립운동 노선 내지 해방공간의 모범적인 운동이었다고 인식한다면 잘못이다.

또 귀기울여 들어보자. 산업화 이후 민주화 운동을 좌파가 주도했다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대중들이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좋아서였다고 한다면 땅을 칠 일이다. 학생들은 민간인이 정부를 만드는 나라를 원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고 싶어한 것 뿐이다. 부르조아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를 원했을 따름이다. 80년대의 경우 학생운동권은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원할 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애써 학생대중들에게 홍보하고 다녔었다.

이제와서 자기네가 사실은 좌파였었노라고? 소수 몇 명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99%는 순수한 민주주의 열정 때문이었음을 증언할 사람은 무수히 남아있다. 우파는 좌파에 비해 도덕의식, 윤리의식의 열등감이 전혀 없다.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자유주의 나라로 만들고 경제혁명, 민주화까지 이루어온 자부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사업만 봐도 많은 우파‧중도파 독립운동가와 조봉암 같은 합리적 좌파까지도 모두 참여시킨 범국민적 거사였다.

다시 한 번 돌아보자.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조봉암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투신한 홍명희, 어느 쪽이 옳았던가? 두 사람은 각자 자기 나름의 가치판단 기준과 이유를 가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고뇌와 희생을 각오하고 고통스런 선택을 내렸다.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은 이렇게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불가피하다. 이 선택의 결과를 판단할 때 공산주의로 기운 홍명희보다 대한민국이 좋았다는 조봉암이 백 번 옳았다.

해방 직후 많은 중간파의 작가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하여 월북을 감행함에는 민족의 단결을 구호로 내세운 좌익의 전술이 주효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당시 이념의 주도권을 장악한 좌파에 무임승차하려 한 지식인의 나약하고 기회주의적 태도였다. 그러나, 조금더 강인하고 현명했어야 했다. 소련을 직접 방문한 결과 히틀러의 독일보다 더 가혹한 전체주의 냄새를 맡았던 공산주의자 앙드레 지드처럼 공산주의의 터무니없음을 예감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당시의 좌파지식인들도 북한과 그 산파인 공산주의 조국, 소련의 실체를 투시할 수 있었다. 당시 좌파의 논리와 이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명확한 성찰도 없이 좌익에 몸담은 지식인들은 급박하게 진행된 북한의 개혁과정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결국 이들은 극좌파의 비판을 받아 숙청되는 비운을 겪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은 해방 직후 아득히 혼미한 때와 달리 암흑지옥같은 북한과 자랑스럽게 성공한 대한민국이 극명한 대조가 된다. 아무리 극좌파라도 북한을 선택하여 가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니 북한 정권에게 민족사의 정통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역사관과 그를 선전하는 무모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건국 이후 우파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적게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행정 공무원, 국회의원, 법관, 직업군인, 거부(巨富)의 CEO 등 전문직이나 기술관 중심으로 발달한 실용적 지식인 중심의 우파그룹은 거시적인 국가 형성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근본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좌파그룹 역사관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연구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술관료 중심의 지적, 문화 예술적 공동화(空洞化)는 좌파가 그들의 이념을 확산‧심화시키기에 더할 수 없이 좋은 토양이 되었다.

그런데 백 번 양보하여 좌파운동을 이해하더라도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바탕 위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인이 좌파운동을 하려면 진정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도 각자는 자신의 이익에 대응되는 집단군과 사회계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집단과 사회계층을 대상으로 온건한 좌파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진정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하므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일,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무책임하고 극단적인 노동운동, 정치운동을 할 게 아니다. 사회개혁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일이다.

그런데 문학 등 문화영역을 보면 참으로 문제가 많다. 소설 등에서 지식인들이 비록 픽션 형식을 빌어서 하는 말이지만 너무나 좌경적인 것은 충격적이다. 자신이 대한민국에 등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서 젊은이를 비롯한 독자에게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성향을 심는다면 어찌되는가?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것까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무제한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 속의 한반도는 남이나 북이나 온통 공산주의 찬양, 대한민국 저주로 가득하다.

이런 글을 읽은 청년과 대학생들이 어찌 대한민국을 온전한 조국으로 생각하겠는가? 이 글들만이라면 대한민국은 이미 무너져야 할 나라,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이다. 비록 여러 등장인물 중 몇몇이지만 그 주된 흐름은 대한민국에 총부리를 겨누고 칼로 대한민국의 경찰을 테러하는 것을 애국적인 것으로 미화,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정치적인 주제로 쓰는 소설은 소설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한반도의 사상적 지형도를 바꾼다.

우리는 분단국가, 위기국가이기에 이러한 조그만 구멍도 나라의 미래에 좋지 않다. “이 정도는 허용하는 것이 자유, 자유주의 국가가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등장인물이 대한민국을 철천지 원수로 여긴 이현상, 박헌영 등 실명(實名)이다. 이들을 사실상 미화(美化)하는 내용을 자유롭게 읽히는 대한민국은 그 운명이 곧 다할 것이다.

아무리 창작의 자유, 문화의 자유라고 하여도 지식인의 운동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시, 소설, 영화, 연극 방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한민국을 희롱하는 작가, 영화인들은 소영웅주의를 느끼고 정치적 주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영웅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는 흠이 될 것이다. 조국을 욕되게 하고 북한 체제를 유리하게 하며 통일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깎아내리는 충격적인 내용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좋은 소재를 구할 수 있다. 훌륭한 시, 소설, 영화, 연극의 소재는 도처에 널려 있다. 이를 찾아내는 것이 진정한 작가정신이고 예술혼이다. 대한민국을 가지고 농단하는 작품이 아닌, 더 문화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창작해 줄 것을 기대한다. 영적 전쟁, 정신의 전쟁이 경제 전쟁, 정치 전쟁보다 더 뿌리가 깊고 상처도 오래 간다.

사실 사회주의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세력을 키워온 것은 지식인들이 무책임하게도 동조하거나 방조한 탓이다.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의 모순과 폐해를 정곡을 찔러 지적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매번 양쪽 날개에서 나타난 좀 더 극단적인 좌파 운동방향을 향해 이동시켰다. 좌클릭, 좌클릭했다.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 고통받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대한민국 국민의 현실에 눈을 감았다. 그러니 힘겹게 올린 무거운 돌은 다시 굴러내린다. 끊임없는 고통, 시지프스의 사슬이 이어졌다. 책상 앞 공론, 환상적 낭만주의에 물든 지식인의 책임이 크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