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말기, “일본이 항복하면 우리는 해방이 되고 자주 독립이 이루어 진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은 한국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
해방은 곧 우리민족의 독립을뜻했습니다. 1945년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끝나자 한 반도 전역은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혔고 온 국민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이 한마디가 그날의 감격을 요약했습니다. 그런데 '대한 독립'이란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요. 나라가 스스로 일어 선다는 말은 곧 신생국 대한의 건국을 뜻했습니다. 온 국민은 일본이 항복한 날, 8월15일 당일자로 우리나라 '대한'이 건국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도, 그 다 다음 날에도 조선 총독부는 간판을 그대로 달고 있었고 정문앞 국기 게양대에는 여전히 일장기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며칠간의 과도기가 지나면 대한 독립의 시대가 오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일장기가 국기 게양대에서 9월 9일까지 내려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2000만 동포들을 오판케 한 데에는 국내 언론들의 오보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언론들은 일본의 패전은 미영중 3대국 영수들이 43년 11월 말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합의한 카이로 선언을 수락하는 것을 의미 한다고 해설했습니다. 카이로 선언이 약속한 대한독립에 관한 내용은 단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귀중한 문장입니다. 그대로 옯겨 보겠습니다.
“The three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국내의 언론들은 이 선언문을 “3 연합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 )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했다”라고 번역, 보도했습니다. 이 보도 내용을 읽은 국민들은 한국의 독립이 눈앞에 닥아 온 것으로 이해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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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끝나자 한 반도 전역은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혔고 온 국민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곧바로 '대한 독립'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지만 이는 외교문서상 문구를 오판케 한 국내 언론들의 오보가 원인이었다. |
그런데 이 결의문 중의 괄호안에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 하지 않았습니다. 괄호 안에서 말한 “ in due course”란 표현을 국내 신문들은 무시하거나 “단기간 내에” 정도로 이해 했습니다. 그러나 in due course란 말은 결코 “단 시일 내에”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시일을 확정할수 없는 경우의 외교 문서에 종종 등장하는 이 말은 최소한 “상당한 시일이 지난 이후, 적절한 시기에” 라고 번역하는게 타당합니다. 그런데 국내 신문들이 카이로 선언에 의거, 대한 독립이 눈앞에 닥아 온것 처럼 잘못된 보도를 함으로써 국민들의 기대심리을 잔뜩 놓여 놓았다가 이 기대심리가 불가능 해 지자 분노로 돌변 한 것입니다.
카이로 선언의 주역은 미국이란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우리에게 독립시켜 준다고 약속해 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미 군정이 실시된 직후 “미국X 믿지 말자, 일본X 일어난다”라는 구호가 일반 국민들 사이에 갑자기 퍼져 나간 이유는 당시의 언론들의 오보가 그 원인이던 셈입니다. 약속 불이행의 책임은 국내 언론에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한국인의 반미 감정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짧은 영어 문구에 대한 오보가 원인이었다는 사실은 이후의 해방 정국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갔습니다.
해방 정국의 최대 쟁점은 신탁통치 문제 였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등 3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방침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국내에 타전되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듯한 충격이었습니다.
국내의 모든 정파는 좌와 우를 막론하고 신탁통치 결정에 결사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조만간에 자주 독립이 이루어 지리라고 믿어 온 국민들은 미영소 3국의 외무장관 회의가 결정했다는 5년간 신탁 통치방침은 민족의 사망신고에 해당한다고 풀이했습니다. 당시의 국내 여건은 모스크바에 특파원을 보낸다거나 회의에 참석한 3국 외무장관과 직접 대화를 할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외국 통신이라는 제3자를 통해 들어온 외신 보도가 바깥 세상을 내다 볼수 있는 유일한 창문이었습니다. 제1신으로 전해진 신탁통치 관련 기사는 “미영중소등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동시에 한국에 새 임시정부를 설립케하여 장차 독립에 대비할 것인데 신탁통치 기간은 5년으로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외신보도에 놀란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28일 밤 임시 정부의 청사로 이용되어 온 서울 서대문 로터리 근처의 죽첨장(竹添莊)에 모여 반탁운동의방법론을 논의했습니다.
조속한 독립을 갈망하고 있던 김구 임정 주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에게 독립을 약속하고 신탁을 실시하려는 것은 마치 약주고 병주는 격이 아니겠소. 이제 우리 임시정부로서는 강력한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신탁통치를 물리치고 독립정부를 즉각 세울수 있도록 미 군정과 싸우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오. 동지들께서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이제부터 어떤 방벙으로 미 군정을 상대하여 투쟁해 나갈 것인지 의논하도록 합시다.”
각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들은 미 군정을 엎어버리고 임정이 독립을 선포하여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감정이 격해진 이날밤 회의장에서 누구하나 차분하게 대책을 세우자고 주장할수 있는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대표들이 죽첨장 회의실에서 열을 올리고 있던 같은 시각에 모스크바 회의의 상보가 국내 언론기관에 입수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장황하게 서술되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2) 임시정부 구성을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둔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사항들은 미소 양국 정부에 의해 최종결정되며 그에 앞서 미영중소 정부의 심의를 받는다.
3) 미소 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민주적 단체들과 협의하여 4개국 신탁통치 협정 초안을 작성하여 미영중소 4개국 정부의 공동심의에 회부한다. 공동위원회 제안사항은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최장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성안하고 4개국 정부의 공동심의에 회부한다.
4) 미소 공동위원회 문제등을 협의하기 위해 2주내에 한반도 주둔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회의를 소집한다. 외신 제1보와 밤중에 들어온 신탁통치에 관한 원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선 눈에 띄는 문제점은 제1보는 미영중소 4개국 정부가 모두 찬성하는 경우에 한해서 한반도의 신탄통치를 할수 있다고 보도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미소 양국사이에 신탁통치에 관한 완전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으면 신탁통치 계획은 한발짝도 전진할수 없다는 게 모스크바 합의 사항의 골자였습니다. 외신 1보는 그런 단서를 부연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과 오해를 몰고온 오보였음이 확실합니다. 실천 가능성이 없는 합의문을 합의사항으로 둔갑시켜 발표하는 사례는 다국가 간의 외교 회담에서는 흔이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합의사항은 내 놓아야 하고 내심으로는 합의할 의향이 없는 경우, 마치 합의한것 처럼 대외용 공동성명은 발표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조건들을 나열해서 발표문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당시 민족진영의 최고 지도자 였던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이 밤 12시쯤 김준연 장택상씨 등을 대동하고 죽첨장 회의실에 찾아 왔습니다.
민족진영 일행은 각 단체 지도자들이 신탁통치 반대를 위해 미 군정을 상대로 결사투쟁 방침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반탁은 하되 미 군정청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된다”고 말하자 회의장 구석구석에서 “집어 치우라”는 강한 항의가 쏟아져 나왔고, 엄항섭 임정 공보부장은 “여보시요. 고하 (古下. 송진우의 호) 당신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있는거요”라 싸울듯이 말했다 합니다.
죽첨장 회의실의 분위기는 외신 1보가 전한 것 처럼 신탁통치 방침이 이미 결정된 것으로 믿고 있었고 송진우선생 일행은 밤 늦게 입전된 외신 상보에 의거, 냉정을 찾자는 발언을 했지만 양측 사이에 오해의 골만 깊게 파게한 결과만을 남겼을 뿐입니다.
외국 통신사 기자들의 무지 내지 무관심이 만들어 낸 엉터리 보도가 오보였음은 이듬해 초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1.2차)가 무위로 끝나면서 확실하게 그 진의가 밝혀졌음에도 보도내용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재 검토 시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좌익 진영이 소련의 지령에 의해 찬탁으로 변신하면서 반탁과 찬탁을 둘러싸고 유혈 투쟁이 전개 되었고, 임정이 주도한 범 민족 규모의 반탁 투쟁은 미 군정을 적대 관계로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 오고 말았습니다. 미 군정은 임정에 대한 종래의 우호적인 입장을 전면 수정했고 이후 임정과 미 군정은 관계 개선을 시도할 기회 조차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민족 진영을 이끌어 온 고하 송진우 선생은 죽첨장 회의의 다음날 새벽, 담장을 넘어온 한 현우(당시 34세)등 백의사 단원 4.5명이 쏜 총탄을 맞고 자택에서 숨졌습니다. 당시 나이 56세 였습니다.
3.1운동을 기획하고 민족의 경제력 제고와 교육 진흥에 전 생애를 바친 민족의 지도자가 외신이 전한 오보가 원인이 되어 해방 4개월만에 동족이 쏜 흉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습니다.
최근에 발생한 판교 환풍구 참사 사건이 발생하자 jtbc 방송의 손석희 앵커는 “경기도 성남 판교 테크노 밸리에서 걸 그룹 공연 도중 환풍구가 붕괴하면서 25명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대부분이 안타깝게도 학생이었는데요."라고 첫보도를 했습니다. 사망자 중에는 학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보의 전형이었습니다.
현장기자를 연결한 그는 “사망자가 대부분 학생 맞습니까?”라고 질문까지 했다네요. 학생 사망자가 없었다는사실이 몹시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광우병 소동 촛불 시위, 세월호 해난 사고, 문창극 총리후보 중도사퇴 동의 대형 사건 주변에 서식했던 거짓 과장 짜깁기 등등 독버섯들이 남겨 놓은 오물의 썩는 냄새가 쉽게 가셔질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정말 딱한 일입니다. /양준용 재미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