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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문화평론가 |
서울 도심의 대규모 숲을 군사작전하듯 베어내는 대규모 환경파괴가 논란이다. 이화여대가 기숙사를 짓기 위한 부지로 축구장 다섯 개 면적 (약 3만 평방미터)의 밀어버리고 있는 북아현동 안산 숲이 문제의 공사현장이다. 한 달 전 공사가 시작된 이곳에서는 지금도 1200그루 나무와 200종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다.
국민행동본부를 비롯한 종북척결단 등 우파 시민단체는 오늘(31일) 도심 숲의 제거를 허가한 서울시장 박원순의 위선적 환경정책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서울시청 앞에서 갖는 등 압박에 들어간다. 박원순이 곤혹스럽게 된 건 그가 큰돈을 들여 돌고래를 바다에 돌려보내는 쇼를 즐기고, 시청 옥상에서 벌을 키우는 '생태주의 코스프레'에 몰두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보수단체의 공격에 환경단체도 지금 혼쭐나고 있다. 그동안 저들은 도룡룡 알을 사수해야 한다며 국책사업인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방해했고, 구럼비 바위를 보호한다며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식의 정치 지향성을 보여왔다. 도룡룡 알과 해안가의 바위 정도에 흥분해 난리를 치던 저들이 냉큼 잘려나가는 서울도심의 허파 문제엔 아연 침묵을 선택한다?
오늘 우파 시민단체들 박원순의 환경정책 항의 기자회견 등 압박
거기에다 걸핏하면 국가보안법 폐지를 곁들이던 환경단체들의 이중성은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때문에 증폭됐다. 그는 최열과 함께 환경운동연합의 공동대표를 지낸 경력이 있다. 박원순의 위선, 좌파 환경운동 단체와 대학의 이중성을 어떻게 봐야 할까? 왜 명분 그럴싸한 환경주의 혹은 생태주의 깃발이 어느 순간 때 묻고 타락해버렸는가?
실은 20세기 중후반 이후 좌파와 생태주의는 특별한 파트너십을 키워왔다. 빼어난 저술인 <지식인과 자본주의>를 쓴 미국 역사학자 앨런 케이헌은 “생태주의야말로 지식인을 위한 새로운 아편”이라고 지적하는데, 필자 역시 공감한다. 즉 생태주의가 어느 순간 변질된 게 아니라 본래부터 정치성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생태주의는 자칫 근본주의적 충동으로 달려갈 경우 모든 종류의 개발을 환경파괴라는 이유로 반대하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를 거부하는 일도 불사한다. 녹색운동이란 보호색 아래 숨어있으면 웬지 순수해보이고 외부의 정치적 공격을 피할 수도 있으니 환경운동가들에게 생태주의 깃발이 여러 모로 편리했다.
미국 역사학자 “생태주의야말로 지식인을 위한 새로운 아편”
때문에 케이헌은 이렇게 분석했다. 19세기 이래 좀 똑똑하다는 서구의 지식인은 거의 예외없이 반(反)자본주의, 반 시장경제에 열중하면서 속으론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짝사랑해왔는데, 공산주의 몰락 이후 새로 붙잡은 신줏단지가 생태주의라는 새 도그마였다. 실은 전부터도 그러했다. 공산주의 몰락 훨씬 전에 등장했던 책자인 <성장의 한계-로마클럽보고서>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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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일 서울 중구 서울역 고가에서 열린 '서울역 고가 시민개방' 행사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역 고가 공원 사업에 반대하는 시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뉴시스 |
보고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유한한 지구자원을 빠르게 고갈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종말이 온다는 예언을 담고 있었다. 일테면 아연·금·석유·천연가스 매장량이 고갈되는 해를 1992년으로 설정했다. 21세기는 문명이 붕괴된다는 단정이었다. 미 뉴욕타임스가 엄숙한 어조로 그 보고서야말로 우리시대의 성경이라고 평가했지만, 그게 모두 오판에 그치고 말았다.
신기한 건 두 가지다. 지식인들은 체질적으로 급진적 생태주의 신념을 좋아하지만, 과학의 옷을 입은 저들의 묵시록적 예언은 거의 매번 틀린다는 점이다. 더 기이한 건 생태주의를 따르는 추종자 그룹은 줄어들지 않고 항상 새롭게 확보되면서 '성업 중'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생태주의는 옳고 그름을 넘어서 차라리 신앙의 영역이라고 해야 옳다.
반 개발주의, 반 자본주의 심리를 한 몸에 구현한 박원순
지금 생태주의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상한 좌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동네이고, 좌파가 극성을 부리는 국내에도 예외 없다. 지금 저들은 심각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소비주의· 개발주의 철학이나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자본주의에 구원은 영원히 없다"고….
그런 환경운동가들의 생태주의와 반 시장주의는 언제라도 캉캉춤을 함께 출 수 있는데, 반 개발주의, 반 자본주의 심리를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대표적 정치인이 국내에서는 서울시장 박원순이다. 그건 필자의 판단이 아니라 그에게 비판적인 거의 모든 우파진영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다. 사실 그가 펼쳐온 행정은 반 시장경제, 그리고 반 도시, 반 문명을 특징으로 하는데, 그 배면에도 이런 얼치기 생태주의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그동안 8000개를 목표로 협동조합을 만들겠다, 마을공동체 사업에 예산을 지원하겠다, 노들섬에서 도시농업을 하겠다는 식의 정책은 그가 세계 8위 권의 거대도시의 수장(首長)이라는 게 안 믿어질 정도였다. 왜 이럴까? 박원순이 도시기능 자체에 무지하다는 요인 외에 그가 가진 생태주의 마인드가 서울을 서울로 보는 안목 자체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박원순이 근본적 생태주의자일까?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자연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좋다는 식의 로맨틱한 차원의 반 개발주의 논리, 나이브한 생태주의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게 박원순 표 생태주의의 냉정한 주소일 것이다. 즉 무원칙한 이중적 정책 사이를 오락가락할 수 있는 정도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몸은 도시에서 살면서도 마음은 농촌에 살고 있는 어정쩡한 우리 모습
때문에 다분히 편의주의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을 하는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이화여대 뒷산 숲 제거를 허가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이 하는 개발은 생태파괴이고, 자신이 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식이다. 그래서 돌고래를 바다에 놓아주고, 도심에서 양봉을 하며, 멀쩡한 숲을 한 순간에 베어버리는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서울역 고가도로 콘크리트 위에 새로운 녹지공원을 만들겠다고 나선다.
때문에 이번 이화여대 숲 제거 사건은 박원순의 지적-정서적 한계와 일부 좌파의 논리적 허구를 함께 드러낼 썩 좋은 사례가 분명하다. 인왕산과 함께 서울 구도심를 나란히 품고 있는 두 개의 산인 안산 자락의 숲을 제거하고 들어설 이화여대 기숙사는 위선적 환경운동-생태주의가 어떻게 변질되었나는 증언해줄 거대한 흉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박원순의 위선적 생태주의의 마각을 드러냈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몸은 도시에서 살면서도 마음은 농촌에, 19세기 이전 조선왕조에 살고 있는 어정쩡한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고 그래서 혼란이 거듭되는지도 모른다. 그건 다음 회에 한 번 더 다루려 한다. 조금 전 사학자 앨런 케이헌 말한 생태주의라는 아편에 취한 것은 박원순만이 아니라는 요지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