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 글로벌 누진세는 역성장책 결국 모두의 빈곤 불러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 자유주의연구회에서는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발표로 ‘격차(隔差)’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가졌다. 신중섭 교수는 '토끼와 거북'의 우화 등 11가지 이야기로 '격차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신 교수는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기 위해 동일한 출반선에서 모든 사람이 출발하도록 해야 한다는 비유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인생의 목적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기회는 원천적으로 균등할 수 없으며 기회의 균등에 ‘법 앞의 평등’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실제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미디어펜은 신중섭교수의 발표문을 상중하로 나눠 3회에 걸처 연재한다.

격차 이야기<중>

   
▲ 신중섭 강원대 교수
이야기 5 : 뚱뚱이와 홀쭉이

많은 사람들은 뚱뚱이가 뚱뚱하고 홀쭉이가 홀쭉한 것이 문제이듯이 부자는 부자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에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특성이고 이것을 바로 잡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부자가 부자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는다. 마르크스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부자에게 착취를 당해서 그렇다고 함으로써 부자를 타도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오늘날 마르크스를 추종하여 공공연하게 폭력 혁명을 통해 빈부의 격차를 일거에 제거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빈부 격차는 해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에 이런 주장을 하여 스타 경제학자가 된 사람이 바로 피케티이다.

피케티는 뚱뚱이가 뚱뚱한 이유는 뚱뚱이가 탐욕적이거나 홀쭉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자본이라는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홀쭉이는 낮은 임금만을 받는데 뚱뚱이는 유전으로 받은 자본의 혜택을 보아 점점 뚱뚱해진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런 자본주의에 세습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을 상속받지 못한 사람은 항상 가난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피케티는 홀쭉이를 뚱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뚱뚱이를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놓고 그의 살을 베어 홀쭉이에게 옮겨야 한다는 처방을 제시했다. 그는 이것에 ‘글로벌 재산세’라는 이름을 붙였다. 뚱뚱이가 뚱뚱한 것은 영양 공급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홀쭉이를 뚱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뚱뚱이의 위에 빨대를 꽂아서 홀쭉이 위와 연결하여 움식물이 흘러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것에 ‘누진적 소득세’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 역할을 국가가 해야 한다고 해서 새롭게 ‘정치경제학’ 부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피케티의 이러한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없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럴까.

로크는 자연권설에 기초하여 ‘자기소유권’을 창안하였다. ‘자기소유권’에 따르면 ‘각 개인은 자기 신체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자기소유권은 ’人身 소유권‘이다. 노직은 ’자기 신체 각 부분의 강제적 재분배‘의 한 사례로서 ’안구의 추첨‘을 들고 있다.

의술의 발달로 안구 이식 수술 성공률이 완벽하게 되면, 어느 사람의 안구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할 수 있다. 안구가 없는 사람이나 안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건강한 사람의 안구를 재분배해야 하는가.

물론 건강한 안구를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안구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안구를 기증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추첨을 통해 안구를 강제로 증여하게 할 수 있는가. 물론 정부가 이렇게 하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추첨을 통해 안구를 강제로 재분배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는 절대적이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나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국가도 예외는 아니다. 노직은 자신의 신체나 생명에 대해 개인이 절대적 권리를 가지듯이 재산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 뚱뚱이와 홀쭉이

안구나 생명은 자신의 소유로 다른 사람의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강제로 재분배될 수 없듯이 재산도 그렇다는 것이다. 개인의 재산도 재분배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주의자들은 재산을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재산은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가 아니다. 평등주의자들은 ‘파이’를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파이의 소유권이 누구인가이다. 평등주의자들은 소유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분배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피케티의 ‘글로벌 누진 과세’나 좌파가 주장하는 ‘부자 증세’는 안구를 재분배하자는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이런 노직의 철학에서는 자선을 통한 사회적 부조를 제외하고,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정책적으로 안전망을 확보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물론 가진 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공동체에 속한 약자들을 돕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안전망 확보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시장의 자기조절 기능을 존중하면서, 원천적으로 시장에 참여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시장 질서를 통해 재화가 분배되는 것을 일차적으로 인정하면서, 이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를 ‘안전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6 : 격차와 마르크스

격차가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격차’는 ‘빈익빈 부익부’, ‘20:80’, ‘1:99’의 다른 표현이다. ‘빈익빈 부익부’, ‘1:99’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은 ‘빈익빈 부익부’, ‘1:99’를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 말에는 경제적 불균형을 나쁜 것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시정해야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더 부자가 되는 사이에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되었고, 부자는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경제 체제를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빈익빈 부익부’나 격차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폐기하지 않은 채 노동자의 임금을 높이거나 노동 시간을 단축한다고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폐기하지 않고, 문제점을 해소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오리려 자본주의를 연명하게 하여 사람들의 고통을 더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타도라는 과업으로부터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게 할 뿐이다.

여기에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마르크스가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통해 공산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그것의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본질적 특성을 달리한다.

물론 사회민주주의도 여러 갈래이며, 역사의 궁극적 목적지로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정된 사회민주주의는 현실 국가의 무력론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구별된다. 마르크스의 ‘정치 무력론(無力論)’은 그의 유물사관에서 나왔다.

유물사관에 따르면 정치는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조금도 못하고 전적으로 부정적인 역할만 수행한다. 법률 제도나 정치 제도의 기초가 되는 것들이 경제 체제에 의해 결정된다면, 정치 제도를 통해 체제를 바꿀 수 없다는 관점이다. 현실 국가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법률과 정치 제도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많이 수정해 왔다. 노동자 복지의 증대, 국가 보험제도, 실업 수당 등은 자본주의 안에서 제도 변화를 통해 이룩한 성과들이다.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된 제도들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누진 소득세, 경제 운용의 중앙 집권화, 주요 산업의 국유화, 의무 교육 등은 자본주의 안에서 점진적 개혁을 통해 이룩된 성과들이다.

평등주의자들은 이러한 성과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국가가 수용하여 자본주의를 수정함으로써 쟁취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국가가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여 시장의 실패를 보정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빈익빈 부익부’나 격차를 교정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들은 대부분 실패했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가 채택한 정책은 일시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여러 가지 사회ㆍ경제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야기 7 : 2006년에 시작된 이야기

2006년 참여정부의 비서실장은 재외공관장회의 강연에서 “한국은 빈부격차 정도가 OECD 회원국 중 최악의 수준”이라며 “이런 상태를 방치한다면 한반도는 빈부격차로 인한 2개의 대한민국과 북한, 즉 3개의 코리아로 나뉠지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때맞추어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비정한 사회, 따뜻한 사회 - 양극화 시한폭탄,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기획물이 14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청와대는 “사회적 양극화 심화라는 내부적 모순이 악화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빈곤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못 본 체 하고 있다”며 이 특별 기획에서 언론계·학계·정치권 등 여론 주도층을 비판했다.

이 특집은 "IMF 이후 대부분의 언론들은 '한강의 기적'을 낳은 압축성장의 명암을 파헤치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문제를 본격 제기하고 일부 신문은 계급투쟁의 우려까지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7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상장이냐 분배냐'의 낡은 관념에 함몰되어 자기진단에 소홀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가가치 창출의 핵심 역할을 하는 기업이 자동차 엔진이라면 빈곤층 생활보장을 위한 사회안전망은 브레이크와 같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는 없듯이 사회안전망 없는 선진 자본주의는 없다"며 성장과 복지는 같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특집은 양극화를 ‘시한폭탄’에 비유함으로써 양극화에 의해 우리 사회가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풍기고 있다. 물론 ‘시한폭탄’의 시계가 어디에 맞추어져 있는가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살기 힘든 80%만이 아니라 잘 나가는 20%에게도 양극화는 재앙이 될 것입니다. …… 이 기획은 양극화 해결을 위한 참여정부의 출사표입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양극화가 ‘살기 힘든 사람’뿐만 아니라 ‘잘 나가는 사람’에게도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양극화를 극복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고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획을 시작하며’의 첫 장에는 “복지예산,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10월 31일 출입기자 오찬 간담회에서 한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잘 나가는 상장 기업은 역대 최고의 수익을 기록하고 있는데도 서민들은 계속 어려운 양극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생이 어려운 근본 원인입니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복지예산,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라는 문구는 적어도 2가지 의미, 곧 복지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복지확대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복지는 반성장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복지를 확대함으로써 미래를 위한 투자를 확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복지축소가 아니라 복지확대는 경제 성장과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사실에 의해 진위가 결정될 수 있는 경험적 문장이지만, 경제학에서는 진위를 판명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기적과 절망, 두 개의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을 단 첫 번째 글은 『조선일보』(1999년 7월 19일)와 『신동아』(1988년 6월호)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중산층에서 탈락해 절대빈곤층으로 몰락한 우리 이웃들은 '살기가 갈수록 더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한국 사회가 소수의 부유층과 절대다수의 빈곤층으로 양극화하는 이른바 '20 대 80 사회'로 가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중략)… 이 같은 계층간 빈부격차가 계속될 경우, 계층간 적대감이 확산되면서 사회가 흉포화 되는 등 불안정해질 것으로 우려된다.(조선일보)

경제 위기가 가속되면서 폭동이나 소요 같은 사회불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폭동의 원인으로 꼽히는 요소는 장기적인 고실업과 중산층의 몰락이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하층민으로 몰락한 화이트칼라, 부도를 맞고 길거리로 내몰린 자영업자들, 삶의 질이 급락한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난 10년 동안 임금이 약 2배 가까이 상승하면서 빈부간 임금격차가 크게 줄었던 게 사실이다. 중산층이 넓게 분포하면서 생활기대수준이 넓게 나타난 사회였다. 그런 현상이 1년 만에 무너진 것이다. IMF체제가 낳은 결과는 부익부 빈익빈으로 나타나고 있다.(신동아)

참여정부가 양극화 해결을 위한 출사표를 던졌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정권은 마감되었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정치권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뒤 이어 이명박 정부도 동반성장을 내걸었고 현 정부도 경제민주화와 맞춤형 복지를 표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계기로 부와 소득의 양극화 극복 또는 격차 해소가 사회정치적 담론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야기 8 : 과장된 격차와 협박 수준의 경고

청와대는 홈페이지에 ‘비정한 사회 따뜻한 사회 - 사회 양극화 이대로 둘 것인가’를 게재하여 양극화의 심각성을 경고하였다. 청와대는 “우리 앞에 가공할 폭발력을 지닌 사회적 ‘시한폭탄’이 놓여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며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형태를 달리한 또 다른 외환 위기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큰 재앙이 올것이라는 경고는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2006년에 청와대가 내놓은 격차의 확대는 ‘시한폭탄’이라는 경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시한폭탄’은 시간에 맞추어 폭발한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시한폭탄을 많이 본다. 악당이 시한폭탄을 장착하면 경찰은 그것을 제거한다. 대부분의 경우 시한폭탄은 폭파 직전에 해체된다. 그것을 제거하는 사람은 목숨을 걸고 한다. 폭발 전에 제거하지 못하면 자신의 몸으로 그것을 막는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목숨을 건 사람들은 국가 기관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여 폭탄을 제거한다. 그것이 그들의 일이다. 목숨을 걸고 국가에 충성함으로써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그것이 국가의 일이다.

시한폭탄을 발견한 사람은 시한폭탄이 있다고 거리에서 외치지 않는다. 조용히 빠르게 민첩하게 제거한다. 물론 대비가 필요한 경우에는 치밀하게 시민들을 대피시킨다. 그것이 정상적인 국가가 하는 일이다. 시한폭탄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시민들의 불필요한 불안과 혼란을 초래하고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시한폭탄’인지 그냥 ‘플라스틱 장난감’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시한폭탄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청와대에서 시한폭탄이라고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는 양극화가 실재하는 ‘시한폭탄’인가에 대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사 외형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시한폭탄이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하고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을 시한폭탄이라고 단정하면서 시민들에게 겁을 주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가가 할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 시한폭탄의 제조자와 설치자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으로 규정하고 마녀 사냥을 함으로써 사회를 갈등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한폭탄의 제조자가 바로 자기 자신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한 채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설사 그것이 시한폭탄이라 하더라도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기 전에 전문가들이 모여 그것이 폭발하기 전에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양극화를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이 거기에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의혹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격차를 정치적 의제로 부각시키는 것은 그것이 표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 정치인은 그것을 선거를 겨냥해서 사용한다. 양극화가 20: 80, 10:90, 2:98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한다면, 아래에 있는 80%, 90%, 98%의 유권자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양극화라는 말이 앞으로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정부는 거대 국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모든 정부는 끊임없이 국가 기구를 확대하고, 공무원 수를 늘리고, 복지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증세 정책을 선택한다. 경제를 위축시켜놓고 증세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투자 저축 근로 의욕은 없는데 세금만 더 거두겠다니 시민들의 저항은 당연하다. 역성장정책으로 생산과 소비가 침체돼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는 계층은 빈곤에 허덕이는 저소득층이다. <계속>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서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