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위주 교육에 몰려 외면…감성과 추억이 없는 삭막한 삶

   
▲ 조세형 서울시립대 교수
11월도 중순을 향해 가니 ‘만추’라는 표현도 시효가 만료된 구호처럼 느껴질 때다. 화려하던 단풍들이 낙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지난 토요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제11회 이안삼 가곡의 밤>이 열렸다.

이안삼 선생은 김동진 선생 세대에 이어 최영섭, 이수인, 임긍수 선생들과 4인가곡집을 펴내는 등 활발히 활동해 오신 분이다. 각계각층의 우호세력들과 함께 ‘한국가곡 희망론’을 내세우고 있는 분인 만큼 바쁜 주말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성황을 이루었다.

우리 세대만 해도 가곡 몇 곡은 입안에서 흥얼흥얼한다. 그럴 정도로 가곡에 대한 정서가 남아 있는 세대이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가 주는 감흥은 사춘기의 감수성과 참 맞아떨어졌다. 더욱이 필자는 그때 문학소년으로서 예술적 감각을 나름 키우고 있던 터였다.

입시의 중압감 속에 무채색으로만 기억될 뻔한 청소년 시절, 음악시간은 환한 빛깔의 낭만을 비춰주곤 하였다. 몇 곡 흥얼거리면 금방 눈물이 핑하고 돌 것만 같던 아름다운 우리나라 가곡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가곡제의 노래들을 듣고 있노라니 사춘기 시절의 감수성이 되살아나는 듯한 감동이 전해졌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아름다운 감동을 곧 그들의 시대를 맞이할 사춘기 소년소녀들과 청년들은 함께 즐길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가곡제가 열린 세종문화회관에는 청소년이나 대학생 등 젊은 층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비목> <그리운 금강산> 같은 ‘가곡 제1전성기’의 노래에 이어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등 새 노래들로 우뚝하니 선 이안삼 선생은 우리 가곡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진다.

왜 한국의 가곡은 이처럼 위태위태하고 안타까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을까. 서양 클래식음악은 물론 매력적이지만, 우리나라 가곡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릴 적 추억 속에 누구나 한 곡씩은 간직하고 있을 가곡 아닌가. 그럼에도 가곡이 발전할 수 없는 원인을, 필자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 이유는 단연코 교육제도의 모순이다. 대학입학을 위해 모든 중등교육이 봉사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음악, 미술, 체육 시간은 점점 사라져간다.

독일의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은 해당연령의 38%만이 입학하고 졸업시험만 통과하면 원칙적으로 모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엘리트코스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고도 생각할 여지가 큰 사실 하나를 들어보겠다. 필수과목이 영어, 수학은 물론 독일어조차도 아닌 데 비해 유일한 필수과목은 체육이고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들어야 하는 선택적 필수과목이 음악과 미술이라는 사실이다.

슬프게도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입시에 치여서 우리나라의 역사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고 이른바 국영수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들은 일단은 뒤로 쳐내는 것이 교육현실 아닌가. 예체능 수업은 아예 없앤 학교들도 많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교육의 결과는 어떤 미래를 낳을까?

감성과 추억이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는 학생들은 삭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그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서도. 인간은 성장과정의 교육과 가정을 통하여 인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법이다. 감동과 감수성을 잃어버린 성장기를 보낸 세대에게는 결국 메마른 사회만 남을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매력은 감정이 있고 감동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안다는 것이 아닐까?

그 결과는 음악 또는 가곡이 존재하고 성장하는 토양까지 사라지게 하는 데 이른다. 그래도 클래식음악은 수용인구가 많은 편이어서 진로를 포함한 시장성이 가곡에 비해 나은 편이다. 그런데 가곡은 진로가 좁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 적어지고 그런 이유로 수용층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음악의 리듬이 젊은 사람들의 정서적인 면까지 채워주지는 못하는 점을 감안할 때, 그 몫을 충분히 해줄 수 있는 가곡의 쇠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문화예술의 비중과 그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요즘, 정작 발전시키고 해외로 진출시켜야 할 우리 가곡은 점점 잊혀지고 있는 현실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서양음악, 현대음악들을 수용하는 한편 우리 가곡을 세계화하는 데도 힘을 쏟아야 함은 불문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관광부에서는 각종 축제, 해외프로그램 등을 통해 가곡을 활성화시키는 정책적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이처럼 국가에서 가곡 발전을 위해 맡아줄 정책적인 몫이 있다면, 어쩌면 더 본질적일 수 있는 문제가 음악인 스스로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술, 문학과 함께 음악은 한 시대를 반영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체일 수밖에 없다. 음악 또한 시대가 바뀌면 바뀐 시대환경에 따라 리듬, 형식, 화성도 변화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곡 역시 익숙해져서 부르기 쉽고 듣기 편안한 표현방식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하나, 필자의 전공과 관련한 관심일 수도 있는, 그렇지만 가곡에서 곡 못지않게 중요한 시(가사)에 대해 덧붙여 본다. 가곡의 시도 당연히 시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그러한 수준에서도 질적인 욕구를 채워주어야 한다.

물론 문학에서 비중있게 다루는 시와 가곡에 적합한 시가 다른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가곡의 바탕이 되는 시 또한 시의 운율과 문법, 그리고 무엇보다 감성에 와닿을 시적인 표현이 요구된다는 점은 매우 긴요하다. 이른바 가요시(song-like poem)의 시학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끝으로, <이안삼 가곡의 밤>을 다녀온 후기의 성격이 있는 글인 만큼, 그에 대한 소감을 짤막하게 적으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배려가 돋보인 반주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권경순 선생은 후배 성악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배려하며 반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몇몇 출연자들은 그러한 반주자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무대 위에서 정중한 인사로써 표시했다. 보고 있는 관객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준 장면이었다.

그날의 주인공인 작곡가 이안삼 선생 또한 넉넉한 인품으로 후배 출연자들에게 무대 가운데를 양보하는 흐뭇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생은 우리 가곡사의 중요한 인물이자 ‘가곡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분이다.

이제 우리는 가곡의 대를 이어가기 위해 모두 함께 고민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선생 또한 우리 가곡의 대를 이어갈 젊은 인재들 양성에도 힘써주실 것으로 기대한다. /조세형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문대학장 겸 도시인문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