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접근 필요…격차 해소보다 '가난 추방'이 현실적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 자유주의연구회에서는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발표로 ‘격차(隔差)’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가졌다. 신중섭 교수는 '토끼와 거북'의 우화 등 11가지 이야기로 '격차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신 교수는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기 위해 동일한 출반선에서 모든 사람이 출발하도록 해야 한다는 비유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인생의 목적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기회는 원천적으로 균등할 수 없으며 기회의 균등에 ‘법 앞의 평등’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실제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미디어펜은 신중섭교수의 발표문을 상중하로 나눠 3회에 걸처 연재한다.

격차 이야기<하>

   
▲ 신중섭 강원대 교수
이야기 9 : 격차 논의의 긍정적 부산물들

그러나 격차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부정적인 결과만 초래한 것은 아니다. 양극화 논의는 우리 사회에서 이념 문제를 선명하게 부각시켜 일반 시민들에게 이념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이념 논쟁은 우리가 잘못된 이념을 선택하게 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을 확산시킨다. 이런 논쟁에 주목함으로써 시민들도 이념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시민들은 누구의 말이 사회를 지배할 때 시민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적 여건이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정치권과 운동권에서 촉발한 양극화 논쟁도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의 적절성을 판단할 수 있는 시민들의 사회 인식 능력을 많이 신장시켜 주었다.

2006년 3월 7일 동아일보는 청와대와 뉴라이트 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러한 언론의 분석을 통해 시민들은 자신의 삶의 질과 관련된 사회 경제적 환경에 대한 지식, 사회 경제적 환경의 운행 방식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사회 현상에 대한 원인과 진단은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동일한 사회 현상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라고 할지라도 상황이 변하면 달라질 수 있다. 정책은 종교적 신념이 아니다. 사회적인 정책 결정에서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자유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합의를 이루어가는 정치적 능력이다.

정책은 그 정책이 낳은 결과에 대해 정직하게 반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정책 의도의 진정성보다 정책의 결과이다. 예측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정책 실패를 인정하고 그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 정책의 결과에 대한 승복은 윤리적 덕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결과를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중언부언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이야기 10 : 격차와 정부의 역할

격차가 심화되는 이유는 사회가 정의롭지 않거나 가진 자들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산업의 구조가 급격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부의 원천이 노동이 아니라 지식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지식 사회가 도래함으로써 지식을 생산하는 창조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소득이 늘어나고, 늘어나는 소득은 곧 자산으로 이동하여 시간이 갈수록 임금과 부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부자는 더욱 더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더욱더 가난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자칭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이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소득과 부의 격차가 이 사회를 파멸로 인도하는 것처럼 과장된 주장을 하고 있다. 수적으로 격차 확대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의 결론은 자명하다. 정부의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부자증세’를 통한 복지국가의 강화를 외친다. 선거 때마다 복지국가를 외치는 정당이 많은 표를 얻는다. 결국 격차 이론은 ‘분배 정치학’, ‘분배 경제학’으로 귀착된다.

모든 정책이 격차 해소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정책은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은 정책이다. 사회적 합의가 견고하지 않은 정책을 시행하면 갈등을 증폭시켜 사회의 에너지를 비생산적인 것에 소진한다. 정치가 갈등과 증오를 증폭시키면 개인과 국가의 잠재력은 사라진다.

   
▲ 교육재정파탄극복 국민운동본부와 친환경무료급식뿌리국민연대 회원들이 6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정부에 무상보육과 무상급식에 대한 재정확대를 요구하고 있다./뉴시스
정치권이 자신의 입장만을 앞세워 사회적 저항이 강한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면 갈등과 증오를 증폭시키게 된다. 갈등과 증오가 지배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원래 의도한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정책의 원래 의도마저 퇴색한다.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정책은 정부의 신뢰를 잠식하고, 신뢰를 획득하지 못한 정책은 실패하기 십상이다.

뿐만 아니라 격차 이론에 기초한 ‘분배 정치학’과 ‘분배 경제학’은 사회적 관심을 격차에 맞추게 함으로써 ‘증오와 분노의 정치경제학’, ‘르상티망의 정치경제학’을 만들어 낸다. 정치인들은 상대적 차이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시민들의 박탈감에 기대어 ‘르상티망의 정치경제학’을 주도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경제 성장의 동인을 잠식한다. 경제 성장이 엔진이 멈추면, ‘르상티망의 정치경제학’은 더 강화된다.

좌우 가릴 것 없이 모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격차 해소 정책이 사회적 논란과 갈등만 초래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격차 해소’라는 의제 자체가 사회적 갈등을 전제하고, 갈등의 증폭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사회 통합이 아닌 배제와 갈등을 본질로 한다.

격차 해소는 본질적으로 제로섬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정책이다. 정치권이 진정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면, 정책 의제를 ‘격차 해소’가 아니라 ‘가난의 추방’으로 바꾸어야 한다. 가난은 사회적인 악이지만 격차는 사회적 악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격차 해소라는 명분으로 강화되는 복지는 필연적으로 국가 부채를 늘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킨다. 복지국가의 강화는 자존감이 없는 의존적 인간을 양산하여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선도한다.

정부의 역할은 격차를 해소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복지 정책을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선별적 복지로 전환해야 한다. 반값등록금이나 영유아 보육비는 어려운 학생과 영유아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우리 헌법은 “(1) 사회적ㆍ경제적 약자와 소외계층, 특히 산업사회가 성립하면서 대량으로 발생한 무산근로 대중의 생존을 보호하고 (2) 정의로운 사회ㆍ경제 질서를 확립하기”위한 ‘사회 국가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2)를 위해 (1)이 희생된다.

정책 결정이 이익 집단의 타협의 결과이고, 투표에서도 (2)를 표방하는 것이 (1)을 표방하는 것보다 득표에 유리하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위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때문에 저소득층을 위한 교육 예산이 사라지는 것은 바로 선거에서 (2)가 (1)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1)과 (2)가 충돌하는 경우 (1)이 우선해야 한다는 헌법적 해석도 가능하다.

제한된 국가 재정에서는 중산층을 위한 ‘정의로운 국가’보다는 저소득층을 위한 ‘안전 국가’가 우선해야 한다.

나아가 복지 확대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도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 헌법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ㆍ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을 확대 해석하면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의 과잉 복지로 인한 국가의 재정 파탄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는 시민의 복지권을 제한할 수 있다.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곧 국가 재정 파탄을 ‘공공복리’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인정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재정준칙주의’를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

이야기 11 : 불가능한 격차 해소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격차는 해소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회통합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격차가 심하면 사회통합이 깨어져 사회가 불안해지고, 이 불안이 증폭되면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득이 높고 재산이 많은 부유층도 자신의 재산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정책을 지지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다. 국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 돈 많은 상인은 항상 주변 사람들이나 관리들에게 인심을 잃지 말아야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관리가 바뀔 때마다 관리에게 뇌물을 바쳤다.

이들은 모두 상인을 공격하여 재산을 빼앗아 갈 수 있는 물리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돈 많은 사람은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부자들은 항상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회 보험을 들고, 그 보험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근대 국가가 형성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권력을 가진 국가는 개인의 재산을 지켜주는 것이 자신의 고유한 책무 가운데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국방과 치안이 국가의 고유한 역할이며, 이를 통해 국가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켰다. 그것에 대한 대가로 시민들은 세금을 납부하고 국가가 정한 규칙을 준수하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격차를 줄여 사회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격차는 자연스러운 경제 활동의 결과이고, 국가가 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경제적 행위의 결과이다. 격차가 위법이나 불공정한 경제 행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용인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격차가 적은 사회, 격차가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말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인간의 행복도가 개선되지 않습니다. 빈부격차가 커지게 되면 행복도가 굉장히 떨어집니다. 국민 행복을 위해서는 정신 작용에 대한 수련도 해야 하지만, 빈부격차도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경제민주화죠.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첫째 경쟁이 공정해야 해요, 그래서 부의 집중을 막고 격차를 줄여야 해요. 둘째 경쟁 자체도 못하는 사람들, 어린아이, 노인, 장애인 등에게는 기본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것을 복지사회라고 하죠. 그런 면에서 유럽의 시스템을 잘 연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 낮추어야 할 격차가 ‘불공정 경쟁’이 초래한 격차인지 아니면 공정한 경쟁이 초래한 격차까지 포함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에서 격차 해소의 당위성을 말한다. 사람은 시샘하고 비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격차가 심하면 이런 본성이 작동하여 불행을 느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부자는 가난한자의 시샘을 자극하여 의도하지 않은 불행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가 안고 있는 난점은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해지기 전에는 시샘과 비교하여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시샘이 없는 세상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권력을 통해 모든 사람을 어느 순간에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할 수 있어도 하루만 지나도 불평등은 발생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알콜중독에 빠진 사람, 도박에 빠진 사람 사이에는 경제적 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매순간 사회를 reset해서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격차가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부작용을 정부의 역할을 통해 해소할 수는 없다.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열등감, 시기심, 부러움을 없앨 수는 없다. 차이가 크나 적으나 사람들은 열등감, 시기심, 부러움을 느낀다. 격차의 부작용은 정치나 경제를 통해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뿐이다.

   
 
표 ‘부와 행복의 관계’가 보여주듯이 경험적인 연구에 의하면 부가 증가한다고 그에 따라 행복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최저수준’의 부만 주어지면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경험적인 연구는 부의 증가가 행복의 증가를 항상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경제학이나 정치학이 줄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아담 스미스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부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사람을 ‘현명한 자’, 그렇지 못한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자’는 이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무한정 부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을 인류에게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어리석음은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국부를 늘려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헤겔이 말하는 ‘이성의 간지’의 작용이다. 이제 우리는 격차를 정치ㆍ경제적 관점에만 국한 시키지 않고, 그것을 인문학적 관점에서도 성찰해야 한다. <끝>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서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