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5%를 차지하는 경제의 기둥이다. 건설업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발전과 궤를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마다의 성공 DNA장착한 국내 건설사들은 이제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서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본보에서는 건설 성공 DNA를 일깨운 주요 현장 및 사사(社史), 오너 일가 등의 스토리를 재조명해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건설사 성공DNA⑤-대우건설(1)]창립 자본금 6000만원…'국내 최초·세계 최대' 타이틀 영광
[미디어펜=유진의 기자]대우건설은 지난 2018년 발표한 뉴비전 ‘Build Together’와 핵심전략을 통해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기업가치 제고 활동을 통한 끊임없는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같이 축적된 기술역량 및 경영능력 그리고 업계 최고의 인재를 바탕으로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건설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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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 대우건설 사옥 전경./사진=대우건설 |
◆자본금 6000만원으로 시작한 대우건설
1970년대부터 중동을 중심으로 한 해외건설 붐에 발맞춰 해외 지향적으로 사업을 전개해 온 대우그룹은 건설 시장에 참여하기 위해 1973년 국내 도급순위 604위였던 영세 건설업체인 영진토건사의 영업권을 인수해 같은해 8월 1일 대우건설 주식회사로 바꿨다. 자본금 6000만원이었던 대우건설은 1974년 11월 1일자로 상호를 대우개발주식회사로 출범하며 본격적으로 건설업종에 뛰어들었다.
1976년 2월에는 전기통신설비공사업 면허를, 같은해 8월과 12월에는 해외건설업 면허, 포장공사업 면허를 취득해 종합건설업체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한 대우건설은 1981년 대우실업 무역부문을 흡수합병하면서 대우로 상호를 변경해 제 2의 도약기를 맞이했다.
대우건설의 창업과 초기 성장사를 돌아보면 뚜렷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해외건설을 주력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이뤘다는 것이다. 1976년 남미 에콰도로의 퀴토시 도로포장 공사를 시작으로 당시 국내 건설업체 간의 과당경쟁이 치열했던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의 기존 건설 시장을 탈피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또 해외 건설 시장에 참여한 대우건설은 이후 어디서나 특유의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 시장 개척, 국내 최초의 수주방식 등의 단골 수식어를 만들어 내며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후 1977년 임시 주주총회와 신주 공모, 기업공개를 통해 주식회사로 거듭난 대우건설은 이후 국내외 토목·플랜트 공사에 참여하면서 외형신장과 수지개선에 최선을 다해 결국 해외건설공사 도급 3위, 국내건설공사 12위의 성장을 했으며 대형종합건설회사로서 새롭게 출발했다.
이러한 성장을 통해 대우건설은 대한민국 건설산업을 선도하며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오고 있다. 도로, 철도, 교량, 항만, 공항 등 다양한 분야의 사회 기반시설 구축은 물론 친환경 주거시설 및 초고층 상업용 건물을 시공했으며, 원자력, 화력, 조력 등 발전설비와 산업단지 등 대규모의 산업설비 시설을 건설했다.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명실공히 국가 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온 것이다.
특히 이같은 성과의 배경에는 대우건설 특유의 도전정신과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남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시장과 분야에 대해 과감한 도전과 투자를 통해 성공을 이끌어 낸데 있다. 임직원 하나하나가 책임감을 가지고 속도있게 업무를 추진해온 기업문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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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건설이 서울에서 남서쪽으로 약 40㎞ 떨어진 시화호에 만든 국내 최초, 세계 최대 규모인 발전용량 25만4000㎾의 시화호 조력발전소 전경./사진=대우건설 |
◆국내 건설사 최초·세계 최대라는 업적을 쌓으며 리딩컴퍼니로 거듭
대우건설은 1973년 창사 이래 40여년 동안 대한민국 건설산업을 선도하며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해왔다.특히 대우건설은 국내외에서 국내 건설사 최초, 세계 최대라는 업적을 쌓으며 리딩컴퍼니로서 거듭났다.
대우건설은 1976년 남미 에콰도로 도로공사를 수주해 국내 최초로 남미 건설시장에 진출했고, 1979년에는 국내 최초의 턴키(설계시공 일괄입찰)인 대전 철도정비시설 건설공사를 거머쥐었다.
이어 대우건설은 1982년 대우 건설부문으로 출범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3년 국내 최초로 건설기술연구소를 세워 세계적인 기술력을 확보하는 토대를 마련했고, 1985년에는 국내 첫 열병합발전소인 목동 열병합발전소를 따냈다.
1988년에는 시애틀 은퇴 노인촌 조성사업을 따내 국내 최초로 미국시장에 진출했고, 1993년에는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ISO 9000 품질 인증을 획득해 설계·시공·관리를 아우르는 전체 건설사업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이어 1999년에는 당시 국내 최장 터널이 포함된 영동선 동백산∼도계 간 철도 이설공사를 수주해 2007년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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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건설이 시공해 2010년 개통한 세계 최장, 국내 최초의 자동차 전용 침매터널 '거가대로'./사진=대우건설 |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침매터널로 이라크 진출까지…시공능력 인증
대우건설이 시공중인 부산~거제간 연결도로는 한국의 제 1의 항구도시이자 항만 물류의 중심지인 부산과 한국 조선산업의 중심인 거제도를 연결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의 물류 및 교통혁신을 가져온 획기적인 사업이다.
부산~거제간 연결도로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에서 부산시 강서구 천성동 가덕도 까지 총 8.2km 구간을 국내 최초로 시공된 해저침매터널 구간과 사장교 구간으로 나눠 건설됐고, 총 공사비는 1조4469억원 규모이다.
동쪽으로는 부산해안순환도로 및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되고, 서쪽에서는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우리나라 산업물동량 처리에 크게 기여할 뿐 만 아니라, 천혜의 남해안 관광벨트 개발로 이어져 부산․경남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부산 가덕도와 중죽도·대죽도 사이 3.7km를 연결하는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침매터널구간은 우리나라 최초로 시도되는 해저침매터널로 건설됐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터널 등 대부분의 해저·하저 터널이 바다 밑에 굴을 뚫어 관통하는 굴착식으로 건설되는 반면 부산~거제간 연결도로의 침매터널구간은 터널 구조물을 육상에서 미리 만들어 바다 속에서 구조물들을 연결하여 터널을 만드는 침매터널 방식이다.
침매터널은 일반 사장교 건설에 비하여 공사비용이 저렴하고 안정성이 높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오래 전에 일반화된 건설방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우건설이 부산~거제간 연결도로에서 처음으로 침매터널공법을 도입했으며, 그 규모에 있어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고 있다.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침매터널은 통영에 위치한 안정제작장에서 제작된 길이 180m, 너비 26.5m, 높이 9.75m, 무게 4만5000톤 규모의 왕복 4차선 터널구조물(침매함체) 18개를 자체 부력을 이용해 이동시켜 바다속에 가라앉힌 다음, 바다속에서 연결시켜 터널을 완성시켰다.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침매터널은 길이가 3.7km로 아시아에서 가장 길며, 침매터널구간에 사용되는 침매함체의 규모도 세계 최대다. 왕복 4차선 도로의 콘크리트 구조물인 하나의 함체가 180m의 길이로 세계 최장이며, 그 무게만도 4만5000여톤에 이르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또한 세계 최초로 외해(外海)에 건설되는 침매터널로 콘크리트 도로터널 방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48m의 바다 밑에 건설됐다.
대우건설은 이러한 초정밀 첨단 건설 기술력을 인정받아 이라크에서 8600만달러 규모의 침매터널 제작장 조성 공사를 수주했다. 향후 침매터널 건설 공사 역시 수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 발주처 관계자들이 부산~거제간 연결도로를 방문해 실제로 시공된 해저터널의 모습을 확인했으며, 높은 기술력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고 대우건설은 설명했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공사에서 적용된 다양한 최첨단 건설 기술력과 경험은 전세계 해저터널 시장에서 대우건설이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시켜줬으며, 이라크 침매터널 공사를 비롯해 향후 세계 시장에서 지속적인 수주를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유진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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