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서예솜씨와 애국충정 오롯이…마지막 순간까지 조국 걱정 '뭉클'

나는 평소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였다. 무엇보다 안 의사는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나라를 한탄하고 그의 주모자는 일본, 그리고 그의 두목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고 단정하여 그를 살해하는 용기와 그를 통해 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해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先覺者임으로 나는 누구보다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다.
 

그런데 어떤 모임에 가서 내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다고 했더니 상당한 學識이 있는 분이 말하기를 자기는 안중근 의사는 의술을 전하는 안중근으로 한참 알고 있었다고 해서 너무 오래 전에 일이어서 안중근 의사의 위대한 거사가 잊혀진 것이 아닌지 생각이 되었다.
 

작년 5월 14일에서 16일까지 2泊3日의 日程으로 그동안 한 번 가보려고 생각했던 中國의 大連에 여행을 했다. 사실 그 많은 지역 중에 大連을 고른 것은 지금은 大連市에 편입된 旅順을 가보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안중근 의사가 옥사하신 여순 감옥을 가보기 위해서였다.
 

大連과 旅順은 東北三省의 제일 남쪽이 되는 遼東半島에 자리 잡고 있다. 대련은 중국 제2의 무역항구이며, 東北地方(만주)의 창문이다. 또 여순은 安重根 義士가 순국한 여순 감옥이 있고, 또 노일전쟁에서 日本이 많은 희생자를 낸 203高地가 있다. 여순과 합쳐서 한 때 旅大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그냥 大連이라고 부른다.

中國 사람들은 “泰山에 올라 해돋이 구경하고” “大連에 가서 해수욕한다.”는 말이 있듯이 대련에는 星海公園과 성해공원 해수욕장, 老虎灘공원 등 그림같이 아름다운 해상 및 해변 공원으로 유명하다. 
 

   
▲ 중국 하얼빈시 하얼빈역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기념관 모습.

안내원이 일러준 말에 따르면 中國 사람은 세 가지를 못하고 죽는다고 한다. 첫째는 땅이 너무 넓어서 다 가보지 못하는 일이고, 둘째는 음식이 너무 다양하여 다 먹어보지 못하고, 셋째는 한문이 너무 많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여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1. 大連
 

唐代초기 大連은 “三山浦”라고 불리는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자 淸朝政府는 그 勢力에 굴복, 1898년 제정 러시아에게 旅順(중국 발음은 뤼슌)과 대련을 租借하는 조약을 체결한다.

다음 해 帝政 러시아의 칙령에 의해 청니와(靑泥窪-그 지방의 고유명) 일대는 “다리니”(러시아어로는 멀고 먼 땅이라는 의미)로 불렸다. 그 후 러일전쟁(1904-5)을 거치면서 일본에 의해 植民地 시대가 시작된 1905년, 일본에 의해 “大連-일본발음은 다이렌”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
 

大連시에는 러시아 그리고 일본에 의한 침략시대의 흔적은 현재도 시내 곳곳에 남아 있다. 관광객으로 느낀 점은 보통 다른 中國 도시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은데 대련에서는 도시가 고개가 많아 자전거 탄 사람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 특징이다.
 

大連의 이름난 곳으로는 우선 老虎灘공원이 있다. 이는 海上공원으로 대련시 남동쪽에 있어 우리가 비행장에서 대련에 들어오면서 처음 들려 본 곳이다. 기암절경이 3면으로 둘러싸인 멋있는 곳이고 화강암으로 만든 대형 호랑이가 인상적이다.

이곳은 傳說에 의하면 백호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인간 세상의 선과 악을 가려 마귀를 물리치고 바다 밑에 갇혔던「미인어」를 구하여 노호탄 벼랑에 올랐다고 하여 호랑이의 조형물을 만들어 놓아 관광객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다음으로 星海공원이 이름 있는 곳이다. 大連의 남쪽 아주 넓은 곳에 위치한 대련의 자랑이며 아치형 해변 공원이다. 星海라는 이름은 하늘의 별이 바다 속에 떨어졌다는 전설로 이곳을 星海公園이라고 하며 해수욕장과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놀이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공원 중앙에 대련의 100년 동안 사람들의 발자국을 청동판에 새겨 놓은 것은 대련의 볼거리의 하나이다.
 

또한 러시아거리, 일명 하얼빈가라 불리는 곳은 러시아 사람이 개발한 시가지이다. 옛날 제정 러시아인이 만든 거리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고 그곳에 가면 러시아 인형 같은 물건들을 파는 상점이 많이 있어 러시아가 짧은 기간 통치한 흔적을 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2. 旅順
 

1) 安重根 義士와 旅順 監獄
 

한국의병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조선의 독립과 아시아 平和를 이룩하기 위한 애국주의적 정신 즉, 大我를 위하여 小我를 버린 정신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孫文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극구 찬양하였다. “공적이 삼한을 뒤덮고 이름을 만방에 날리니, 비록 백년을 살지 못하여도 천추에 영생하라. 약소국의 죄인이 강대국을 상대하여 이국땅에서 쓰러진 것은 역시 이토이다.” 라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功盡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弱國罪人强國相, 從然易地亦藤候가 그것이다.
 

여순에는 日本關東法院이 있어 그에 관련된 감옥이 있고, 하루 오후를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安重根 義士는 1909년 10월 26일 거사하여 즉시 체포되어 일본 하얼빈(哈爾濱)총영사관을 거쳐 여순 감옥으로 오셨다. 여순 감옥은 1902년 러시아 정부에서 만들었고 1904-5 러일전쟁 중에는 러시아군의 醫院과 騎兵隊營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1907년 11월 日本 關東都督監獄, 1920年 關東府監獄, 1934年 關東刑務所로 개명, 1939-45年 旅順刑務所로 개명되었다. 우리나라 의병대장이며 역사학자 신채호선생(1880-1931)도 여기에서 돌아가셨다. 주로 思想犯 등을 많이 收容되었다고 들었다.
 

安重根 義士가 지내시던 獨房과 고문당하시던 방, 그리고 書道를 하신 物件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中國當局의 협조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또 1910년 3월 26일 死刑(교수형)이 집행되었는데 그 장소도 잘 보존되어 있다.
 

2)安重根 의사와 그의 어머니
 

안중근 의사의 훌륭한 거사와 관련하여 여순 현지에서 듣고 배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안중근의사가 사형집행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어머니가 안의사의 수의를 손수 만드시고 여순 감옥까지 가지고 와서 사형 될 때 흰색의 수의를 입고 순국하셨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둘째로 안의사의 어머니도 천주교신자이신 조 마리아 인데 그 어머니의 편지가 너무나 훌륭해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옳은 일 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효도이다.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거라.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다.
너무나 훌륭하고 의사의 어머니다운 편지이어서 지금도 눈물이 난다.
 

3)安重根 의사의 뛰어난 書藝 솜씨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1월 3일 하얼빈으로부터 旅順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러니까 안중근 의사는 약 4개월 동안 여순 감옥세서 지내셨는데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書道로 마음을 달래고 또 그의 愛國心과 哲學을 글로 나타낸 훌륭한 분이다. 그가 사용한 독방에는 서도를 위한 많은 물건들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언제 그런 글 솜씨를 익혔는지는 잘 알 수가 없고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지난 8월 7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서소문·동소문 별곡' 특별전 기자설명회에서 참석자들이 안중근 의사의 유묵 '경천'(敬天)을 관람하고 있다.

그 중에서 안 의사의 좌우명이라고 할 見利思義 見危授命(이로운 것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고 위급한일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은 그의 正義感을 잘 나타낸 글로 인정된다. 또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생긴다.)은 어려서 서당에서 글을 배워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또한 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와 같이 아무리 황금이 백만량이 있다 한들 자식을 가르치지 못하면 아무소용 없다고 하여 자식 가르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안 의사의 글은 참으로 선각자 다운 교훈을 준다.
 

이 많은 名筆이 현제도 여순 감옥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 당시 여순 감옥에는 난방이 안 된 추운 감방인데 그 곳에서 그런 名筆의 作品을 쓰신 安 義士의 心理的 安靜感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安 義士의 글에는 애국심에 호소하는 글 외에도 獨立, 第一江山, 百世淸風, 忍耐와 같이 일반 敎養人으로 가져야할 德目 등도 많이 작품으로 남겼다.
 

안 의사의 글 속에는 軍人으로 지켜야 할 덕목을 많이 남기고 있다. 爲國獻身軍人本分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군인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아는바 로는 이글이 안의사의 사형집행 직전에 쓴 마지막 글이다.

또 이 글은 안 의사를 지키던 일본군인 간수 치바 도시치(千葉十七)가 너무 마음에 들어 이 글을 써 주었다는 것이다. 이 일본사람은 안의사의 사진과 같이 이 글을 고향에 가지고 가 정중히 모셨다가 그의 사후 미망인과 양녀 미우라(三浦)가 봉안하였다가 구리고마의 다이린지(大林寺)를 거처 1980년 동경 국제한국연구원을 통하여 서울의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기증 되었다.
 

또 國家安危 勞心焦思, 臨敵先進爲將義務, 장군의 의무는 敵을 보면 언제나 前進해야 함을 강조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노심초사해야 한다고 함으로 안 의사의 애국심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4) 書藝를 통해 본 그의 생의 哲學
 

지금까지 50여 점의 안중근 의사의 유묵 작품을 통해 그의 서도와 그곳에 나타난 정신과 철학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중국의 儒家 사상과 거기에 나오는 格言들을 많이 적었다. 예를 들어 志士仁人 殺身成仁(지사와 어진 사람은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한다.), 사람이 멀리 생각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人無遠慮 難成大業)가 그 대표적 작품이다.
 

둘째로 하늘을 노래한 내용이 많다. 例를 들어 敬天, 天堂之福 永遠之樂(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이 있다. 그리고 百世淸風이 그의 대표작인데 안 의사는 가톨릭교도이다. 그러나 하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그의 作品에서 잘 나타나 있다.
 

셋째는 祖國江山을 사랑하고 끝없는 애착심을 표시하였다. 例를 들어 第一江山, 靑草塘,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마다 계절마다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고 변한다) 중요한 철학을 표현한 글 이다.
 

넷째는 日本政府의 침략 행위의 질책이 중요한 항목이다. 弱肉强食 風塵時代 (약한 자를 강한 자가 잡아먹는 풍진시대이다). 이런 글을 안 의사는 사형집행이 되는 그 해 3月까지 썼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다섯 번째는 조국을 위해 韓國 사람들이 헌신할 것을 당부하는 글들이 많다.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위해 노심초사)라든지,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다(一勤天下 无難事)와 같은 글은 당시 게을렀던 우리 民族을 일깨우는 글이라고 본다. 그 외 세월을 헛되게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白日莫虛渡 靑春不再來). 이런 글들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중요한 충고의 말씀이다.

3. 旅順 감옥에 가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는 일
 

1) 安重根 義士의 고결하고 철저 한 愛國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약 100年 前 홀로 莫强한 日本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人物 伊藤博文을 사살하고 약 4~5個月의 生死를 초월한 감방생활을 하신 것을 보니 위대한 先烈로 머리가 숙여 진다. 일생 안중근 의사를 나의 제일 숭배 인물로 정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2) 나라가 弱하고 國家로 존재하지 않았던(外交上으로) 일은 참으로 비극이다. 우리나라가 1905년부터 完全히 日本의 統治를 받아온 것,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가 外交權도 없고 해서 國際的으로 우리의 생각을 表示할 수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고 지금의 完全獨立 國家인 大韓民國을 생각하니 참으로 자랑스럽다. 요동반도에도 옛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이 660m 고지에 있어 멀리서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 우리가 가슴 아픈 일은 國權이 없을 때 淸나라가 현재 심양에서 나라를 세우는 바람에 滿洲땅에 있던 많은 고구려의 땅이 중국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 들어간 것이 가슴 아프다.
 

3) 100년 만에 安重根 義士를 旅順 감옥에서 그가 사형집행 전까지 작성한 약 50여 개의 서예 작품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 기회에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을 100년 후에 남아 이해할 수 있었음을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하고, 安重根 義士와 같은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 자리에서 그가 가르쳐 주신 愛國 愛族과 ‘바른 길’을 살아 갈 것을 강조하신 의사님의 고결한 뜻을 100년 후에라도 이룩할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 해야 할 것이다. /유종해 서울법대 문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