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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정 기자 |
[미디어펜=김소정 기자]“성추행 사건 가해자가 자살하는 결말도, 피해자를 피해자로 못 부르는 것도 생전 처음 본다.” 성범죄 관련 전문가로 많이 알려진 한 전문가가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한 말이다.
피해자의 충격과 고통을 잠시 뒤로 하고 범죄 자체만 놓고 볼 때 박원순 시장의 사건은 뻔한 사건이다. 흔하게 보던 위계적인 조직 구조에서 위력에 의해 취약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 사건이었다. 그래서 흉악범죄자도 아닌 가해자의 자살을 막지 못한 안타까움이 분명 있다.
하지만 박 시장 사망 이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기승을 부렸고, 4년동안 조직 내 ‘은폐 의혹’이 드러나면서 이번 사건의 새로운 본질이 된 것은 더욱 충격적이다. 일부 극성 지지자들 사이에서 “왜 4년이나 참았나” “계획된 행동이 아니냐”는 억측이 나왔다. “이순신 장군도 관노와 잠자리에 들었다”는 피해자를 관노에 비유한 주장이 나왔고, 비판 성명을 낸 여기자협회에 ‘창X’라며 욕을 내뱉더니 여당 대표는 성추행 의혹을 묻는 기자를 노려보며 “XX자식”이라고 했다. 한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는 “여성들이 그만한 ‘남자사람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막말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도 그랬고 오거돈 전 부산시장도 그랬던 흔한, 하지만 역겨운 성범죄가 정치권과 지지층의 막무가내식 대응으로 변질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경찰에 신고된 사건의 고소인을 피해자로 부르는 것은 형사법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도 피해자 대신 피해 호소인, 고소인으로 부르겠다고 고집부리던 여권은 역풍을 맞았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피해자와 함께하겠다는 연대 움직임에 불을 지핀 것이다.
박 시장은 우리나라 1호 ‘미투’(MeToo·나도 당했다)로 꼽히는 일명 ‘우 조교 사건’의 변호인이었다. ‘직장 내 성희롱’의 첫 민사소송인데다 1992~1993년까지 서울대라는 배경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 사건 법정에선 ‘무심코 던진 돌에 연못의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유명한 변론도 나왔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에 취임한 박 시장은 그에게 따라붙었던 ‘페미니스트’ ‘인권변호사’란 닉네임에 어울리게 ’성희롱·성차별 없는 평등한 직장 만들기 종합계획’도 발표했다. 이 매뉴얼에는 ‘무관용 원칙’ ‘관리자 징계’ ‘익명 제보’ ‘2차 피해 방지’ 등 대책도 차례로 포함됐다.
이랬던 박 시장이 정작 본인에게는 자신이 만든 매뉴얼을 적용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 의문을 가졌지만 ‘관념 따로 습관 따로인 그저 평범한 인간 박원순’이란 설명 외 정답은 없어 보인다. 이제 의문 부호는 박 시장의 죽음이 아니라 추종자들의 조직적 은폐와 2차 가해로 옮겨갔다. 일각에선 안희정‧오거돈에 이은 지자체장의 잇단 성범죄는 선출직 정치인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가신들의 문제’도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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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 서울시장의 친필 유서./연합뉴스 |
박 시장의 성추행도 측근들의 방조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피해자가 인사 담당자에게 고충을 털어놓았을 때 이 담당자는 인사이동과 관련해 ‘시장에게 직접 허락을 받으라’며 책임을 회피했다고 피해자측은 발표했다. 지금 피해자측은 피고소인의 죽음으로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증거인멸의 기회가 주어졌고, 피해자는 수사 과정과 재판에서 진술할 권리, 사법 판단과 처벌 과정 등을 통해 분노하고, 용서하고, 회복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피해자는 과연 외압없이 이 사건의 수사가 진행될 수 있을까 피해자로서 보호받을 수 있을까 불안을 느끼고 있다.
앞서 ‘이런 사건은 생전 처음 본다’고 말한 전문가는 “여론에 떠밀려 경찰이 조사를 벌였으니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은 어느 정도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은폐 의혹’까지 낱낱이 밝혀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박 시장의 죽음으로 본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건이 없는 은폐 의혹을 과연 밝힐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자는 여성운동은 18세기 후반 프랑스혁명 때 시작됐다. 이후 여성운동은 두세대동안 잠들어 있다가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다시 깨어났다. 영국에서 1870년대에 여성들의 대학교육과 직업교육에 대한 토론이 시작됐다. 1891년 독일 사회민주당은 여성 투표권의 요구를 당 정책으로 채택했다.
우리사회에선 21세기인 지금에서야 미투 운동이 조심스럽게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미투가 언론에 꽤 자주 등장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위계 성범죄’는 벌어지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진보 진영에서 이번처럼 피해자에 2차 가해가 자행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제 ‘문명은 결국 약자가 만드는 것’이란 말을 떠올리고 싶다. “약자들이 ‘매너’라는 것을 고안해 강자로 하여금 네안데르탈인처럼 행동하지 않게 유도해왔다”고 한 현자는 말했다. 분노하고, 용서하고, 회복할 기회를 잃어버린 박 시장의 피해자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이기를 바랄 뿐이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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