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다양한 불행을 모두 경쟁의 탓으로 돌린다. 많은 이들은 경쟁의 본질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폄하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불행의 원인이 된 경쟁은 다름 아닌 시장경제에서 나왔다고 단정하여 시장경제를 비판한다. 최근 자유경제원은 경쟁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경쟁의 의미 되새기기 위해 '경쟁은 아름답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에 미디어펜 경쟁에 대한 편견을 깨고 경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경쟁은 아름답다'를 일부 발췌하여 5편에 걸처 연재한다. 아래 글은 복거일 소설가가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본 경쟁의 모습이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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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거일 소설가 |
당장 살아가는 데는 절대적 복지 수준이 중요하다. 그러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 좋은 자식들을 낳아서 생물학적 목표를 이루려면, 둘레의 사람들보다 더 매력적이어야 한다.
남성들은 자식들을 낳아 기르는 데 충분한 부나 권력을 지녀야 하고, 여성들은 그렇게 좋은 조건을 갖춘 남성을 배우자로 얻을 만한 성적 매력을 지녀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매력이든, 경제력이든, 권력이든, 모두 고루 가질 수 없다. 명예처럼, 사람들이 갈구하는 재화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희소하므로 가치가 있다. 모두 훈장을 받는다면, 훈장이 무슨 가치를 지니겠는가? 모두 명성을 누리거나 권력의 정점에 설 수도 없다. 매력도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
우리가 그렇게 비교하는 동물이므로, 우리는 우리보다 처지가 나은 사람들에 대해서 부러움과 미움을 품는다. 사회의 최상층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빼놓으면, 모두 자신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게 되고, 그런 불만은 곧 자신들보다 사회적 지위나 소득이 높은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미움으로 바뀐다.
자신의 처지를 보다 낫게 만들기는 아주 어려우므로, 그런 부러움과 미움은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를 낳은 체제에 대한 반감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보다 평등한 사회의 청사진을 내놓는 사람들의 추종자들이 된다.
이런 ‘부러움의 정치(politics of envy)’는 어느 사회에서나 나오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선 특히 강력하다. 분배의 문제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일정이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먼 미래에 사람의 마음이 크게 진화해서 훨씬 더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나라나 가정을 가진 사람들은 적은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해야 한다(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는 공자 말씀이 사회 운영의 핵심적 진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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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러움의 정치, 교육의 평등한 분배를 내세워서 교육의 하향 평준화를 꾀하는 <자사고 폐지> 이슈. 11월 3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서대문독립공원 독립문 앞에서 서울자사고학부모연합회 소속 학부모들이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조치에 맞서서 '자율형사립고 지정취소 철회'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뉴시스 |
부러움의 정치가 가장 거센 분야는 교육이다. 교육의 기회는 절대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만 거센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회들에서 교육은 소득과는 별다른 관련 없이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따라 배급된다.
영국의 경우는 전형적이다. “분노, 부러움 그리고 부족에 대한 충성심은 독립적 유료 학교들이 영국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으키는 비교적 온화한 감정들 가운데 몇이다. 운이 좋은 7%의 학생들에게 한 해 또는 그 이상의 기간에 7,000파운드(11,500달러)를 받고 그 학교들은 좋은 교육을 제공한다.
비판자들은 그것을 교육적 인종격리라 부른다: 이기적 중산층 부모들이 많은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들로부터 가장 유능한 학생들과 가장 좋은 교사들을 뽑아내서 소수의 학생들에게 특혜를 주는 제도라는 얘기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그런 사정은 자연스럽다는 것이 드러난다. 교육은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유전자 전달자(gene carrier)’이므로, 위에서 살핀 것처럼, 자식들을 위해서 투자하려는 부모들의 욕구는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크다.
그리고 교육이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하므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려는 욕구도 당연히 거세다. 여기서 좋은 교육은 물론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좋은 교육을 뜻한다. 그래서 자신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와 낮은 상대소득을 참아온 사람들도 그런 처지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고, 그런 가난의 세습을 불러올 열등한 교육도 당연히 거부한다.
시장 경제의 논리를 따라, 교육을 시장에 맡겨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을 통해서 효율을 높이고, 그런 경쟁에서 뒤진 소비자들에겐, 즉 가난한 학생들에겐, 정부가 사회안전망인 공교육을 제공한다는 체제는 다수파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기 자식들의 사회적 지위지 사회의 전반적 교육 수준이 아니다. 그들이 외치는 것은, 아주 거칠게 말하면, “내 자식이 가장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도 그것을 받을 수 없다”이다.
새뮤얼 브리튼에 따르면, 비슷한 구호가 영국에서 큰 매력을 지녔었다: “누구도 그가 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자식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도록 해주거나 더 좋은 의료를 받아선 안 된다.” 이른바 ‘교육의 하향 평준화’가 그리도 뿌리를 든든하게 내린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