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사업체 과밀과 적체 한국경제 특질…호혜·협동의 미덕 절실
한국제도·경제학회(이하 학회)는 27일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한국경제에 대한 신제도경제학적 이해>를 주제로 2014년 한국제도·경제학회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학회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경제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신제도경제학적 접근을 통해 한국경제를 개선하고 선진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아래 글은 한국제도·경제학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발표한 <한국시장경제의 특질 –지경학적 조건과 사회·문화의 토대에서> 발제문이다. 미디어펜은 발제문을 상·하로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한국시장경제의 특질 –지경학적 조건과 사회·문화의 토대에서(상)

치킨집들은 왜 출혈경쟁을 할까, 우리나라는 동업이 불가능한 저신뢰 사회

주류 경제학의 인습적 사고방식과 달리 경제는 정치, 사회, 문화와 함께 어우러지는 총 과정이다. 비용과 편익의 분석에서 도출된 경제적 인센티브나 그것을 보장하는 공식적 제도만으로는 인간들의 경제적 선택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신제도경제학은 반복게임의 전략적 균형이라는 틀로 이를 해명하고 있다. 게임의 반복성과 지속성, 그에 대한 개별 경기자의 믿음은 어떤 외적인 인지적 원천에 의존한다. 그것은 법, 도덕, 단체, 종교와 같은 것들로서 곧 공식적 및 비공식적 제도의 총체이다.

몇 차례 비슷한 보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서울 구로구 신도림역 주변 1.5㎢에 30여개의 치킨집이 출혈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 중의 절반은 3년 이내에 감당할 수 없는 가계부채와 함께 도산할 것이다. 무엇이 합리적 선택인지는 명확하다. 서로 통합하는 것이다. 5개로 통합한다면 임대료, 인건비, 광고비 등이 거의 1/6로 줄어, 치킨 수요가 고정적이라 해도,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 모두가 평화롭게 공생하는 길이다.

그럼에도 그 길은 갈 수가 없다. 치킨집 사장들 사이에 동업을 가능케 할 어떠한 수준의 신뢰도 없기 때문이다. 개인 간 신뢰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단체도 없다. 사람들이 신도림동에서 주민등록을 유지하는 기간은 평균 5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게 대부분의 주민은 뜨내기이다. 그런 가운데 동네의 상권을 지배하는 상인단체는 원래 없었다. 사회의 이러한 상태에서 동업의 게임은 불가능하다. 낯선 이방인에게 재산을 맡기는 것만큼 어리석고 위험한 일은 없을 터이다.

   
▲ 27일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제도·경제학회의 2014년 한국제도·경제학회 추계학술대회 <한국경제에 대한 신제도경제학적 이해>의 전경. 

영세사업체의 과밀과 적체, 한국경제의 특질

나는 이 작은 사례 하나로 한국경제가 정형화된 사실로 노정하는, 영세사업체의 과밀과 적체라는 특질을, 그 인과관계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경제에서 동업의 기회나 사례가 빈약함은 사업체의 형태에서도 확인된다.

1991년 제조업을 포함한 전 산업에서 사업체 총수는 211만이다. 그 중에 개인사업체는 196만으로서 92.7%이다. 회사법인은 총 85,487인데, 주식회사가 81,418로서 95.2%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나머지 4.8%가 합명·합자·유한회사로서 동업 관계의 회사들이다.

이들 수치를 독일과 비교해 보자. 1990년 독일의 사업체 총수는 210만이다. 그 중에 개인사업체는 154만으로서 73.4%이다. 회사법인은 총 523,571인데, 합명·합자·유한회사가 521,854, 99.7%로 거의 전부이다. 주식회사는 ‘주식회사 및 주식합자회사’로 보고되는데 고작 1,717, 0.3%에 불과하다.

요컨대 독일에 비해 한국에서는 사업체가 법인으로 조직되는 정도가 낮은 가운데, 법인이라 해도 천편일률로 주식회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좀 더 세밀히 살펴야겠지만, 한국의 주식회사는 1인 지배의 구조가 대부분일 터이다. 대조적으로 주식회사의 본 고장으로 알려진 독일에서 주식회사는 소수 대기업에 한하는 예외적 형태인 가운데, 대부분의 회사 조직은 동업 관계로 영위된다.

두 나라의 사업체 형태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앞서 지적한대로 시장 게임의 균형해를 규정하는 공식적, 비공식적 제도가 상이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들이 서로 믿고, 의지하고, 협동하는 사회의 짜임새, 그 원리가 다른 것이다.

   
▲ 27일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제도·경제학회의 2014년 한국제도·경제학회 추계학술대회 <한국경제에 대한 신제도경제학적 이해>에서 발표하고 있는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한국 전통사회는 공동체로 조직된 신뢰사회가 아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공유하는 믿음과 달리, 한국의 전통사회는 공동체로 조직된 신뢰사회가 아니었다. 14세기까지 존속한 지연, 직능, 종교에 바탕을 둔, 향도로 불린, 어떤 원초적 공동체는 15세기 이후 이른바 ‘유교적 전환’(Confucian transformation)의 개시와 더불어 해체되어 갔다. 17∼19세기 전통사회의 짜임새는 양반-상민-천민 신분 간의 차별을 기본 원리로 하였다.

볼만한 공동체는 양반신분의 친족집단에 한하였다. 신분적 멸시와 예속을 면하기 위한, 거꾸로 신분적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인간들의 사회적 전략과 지향은 친족집단의 결성을 통한 양반화였다.

20세기에 들어 ‘식민지적 근대’(colonial modernity)의 이식과 더불어 사회의 공식 영역에서 신분 차별은 폐지되었다. 그렇지만 사회·문화의 비공식 영역에서 이어진 신분 차별과 그에 규정된 인간들의 행동전략은 식민지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50∼1960년대의 한국사회를 관찰한 국내·외의 연구자들은 이 사회가 일반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공동체를 결여한, 인간들의 상호 관계는 주로 국가권력과의 관계로 규정되는, 고독한 개인들의 대중사회라는 결론을 내렸다.

   
▲ 27일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제도·경제학회의 2014년 한국제도·경제학회 추계학술대회 <한국경제에 대한 신제도경제학적 이해>의 참석자 일동. 

한국인은 재산과 지위를 바라는 물질주의적 편향이 커

이 같은 장기의 사회사가 초래한 현대 한국인들의 정신문화와 심성에 관해서는 미국 미시간대학에 의한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1985년부터 5년 간격으로 반복되어 온, 세계 각국 인간들의 가치관에 관한 이 조사는 한국인이 장기의 관점에서 인생을 설계하고 그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고 저축하는 능력에서 세계의 최고 수준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그 장기적 행동전략의 목표는 재산과 지위이다. 직업노동의 보람, 타인에 대한 배련, 인류를 향한 박애, 창조적 상상 등 정신주의적 가치에 대한 한국인의 지향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한국의 정신문화가 드러내는 물질주의적 편향은 국제적으로 거의 이상치에 가깝다. ‘사회적 신뢰’(social trust)의 수준은 원래 낮았지만, 조사가 반복될 때마다 점점 낮아져 왔다.

한국은 저신뢰 사회, 교육은 사회적 지위를 개선키 위한 통로

이 저신뢰의 사회에서 인간들이 개인과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통로는 교육이었다. 조선왕조의 성균관과 과거가 수행한 관료의 선발과 훈련의 기능은 오늘날 약간의 현대적 옷을 입은 채 국립 서울대학교에서 재현되고 있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각종 국가고시에 합격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과거에 급제하는 것과 진배없는 개인과 가문의 영광이다.

그 다음의 위계는 재벌이다. 재벌에 대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버릇과도 같은 매도에 불구하고, 재벌 대기업에의 취직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사회적 위신과 경제적 안정을 위해 필사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또 하나의 국가고시를 이루었다. 현대 한국사회는 이렇게 위에서 아래까지 옅어져 가는 국가적 위신으로 통합된, 관료제적 위계로 편성된 구조이다.

   
▲ 이승만이 건국하고 박정희가 부의 기반을 만들어낸 대한민국. 특히 박정희가 주도한 고도성장기의 한국사회는 격렬한 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상호 호혜적인 동기로 높은 수준의 신뢰와 통합을 이루어냈다. 

경제활동 중산층은 확장되었지만 시민적 중산층은 미성립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과 더불어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인, 대기업을 필두로 한, ‘사회’(society)가 성숙하였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남성 경제활동인구를 대상으로 한 직업분류에서 ‘중간계급’에 속하는 인구의 비중은 1960년 20.5%에서 2000년 53.0%로 증가하였다. 2002년 서울 시민 가운데 ‘중산층’에 속한다는 의식을 보유한 인구는 80%를 넘었다.

그럼에도 진정한 의미의 ‘시민적’ 중산층은 여전히 미성립이었다. 도시 ‘중산층’ 인구의 대다수는 당대에 고향 농촌을 떠나거나 여전히 농촌과 혈연적 유대를 놓지 않는, 그 사회적 행동의 원리와 의식에서 전통 소농사회의 멤버들이었다.

고도성장의 원인, 박정희가 산업보국 이념과 대중의 계층 상승욕구를 결합했기 때문

고도성장기에 걸쳐 이 사회를 역사적으로 통합해 온 국가적 위신과 관료제적 위계는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의 그 같은 역사적 특질은 고도성장의 동력으로 동원되고 사회의 저변으로까지 분배되었다.

이 저신뢰의 사회가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은 고도성장의 정치·경제체제를 기획하고 추진한, 다수 국민에게 권위주의로 군림한, 특정의 정치인이 ‘산업보국’의 개발이념과 대중의 계층 상승 욕구를 결합함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정부, 기업가, 노동자의 상호관계는 이념을 공유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호혜와 협동의 미덕으로 통합되었다. 한국 중화학공업화의 세 주체인 국가, 기능공, 기업은 상호 배태되고 완성적인 동기로 일반화된 호혜성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고도성장기의 한국사회는, 격렬한 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의 신뢰와 통합을 구현하였다.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