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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 |
금년 들어 세계경제학계에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세계경제의 장기정체론(secular stagnation thesis)이다. 세계경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한지도 6년이 경과했으나 아직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도 않지만 회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위기 이전의 성장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고 저성장기조가 장기화된다는 주장이다.
미국 재무장관, 하바드대 총장, 국가경제자문회의 의장을 역임한 하바드대의 래리 서머스(Larry Simmers) 교수가 지난 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 포럼과 금년 2월 미국경영경제학회(NABE) 기조연설을 통해 주장하면서 대두된 주장이다.
그 후 폴 크루그만 프린스턴대 교수, 스탠리 피셔 미연준 부의장, 올리버 블랭셔 국제통화기금 수석이코노미스트, 배리 아이첸그린 버클리대 교수 등이 동조하거나 우호적인 견해를 발표하면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며 주목을 받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통계를 보면 전세계 연평균 성장률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2003~07년에는 3.7%였으나 위기 이후 2009~14년에는 2.9%에 머물고 있다. 주요국 동향을 보면 독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가들의 성장률이 낮아지고 있다.
장기정체론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잠재성장률이 하락하거나 경기순환상의 경기부진 때문이 아니라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보다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이에 대한 대책도 통상적인 대책과는 다른 보다 전향적인 대책을 사용해야 이러한 장기정체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원인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성장률이 아니라 잠재성장 수준 자체가 한 단계 추락하는 현상 때문이다. 수준 자체가 하락하므로 그 수준에서 단기적으로 변화하는 성장률은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장 수준 자체가 추락했으므로 고용수준이 개선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잠재성장 수준에 구조적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는 경우 발생하는 현상 중 하나로 경기불황이 장기화하면 실업도 장기화되어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근로자가 많아지는 데 이들 중 상당부분은 경기가 회복되어도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근로자에게 체화되어 있는 기술이나 지적재산 등 인적자본이 훼손되거나 상실되어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없게 되는 경우다. 이를 노동시장의 이력현상(hystersis)이라고 한다.
한국처럼 신규 대졸자만 뽑는 경우가 많은 경우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면 아예 노동시장 접근 자체가 어려워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2008년 위기 때의 대졸자가 2014년에 경기가 회복되었다고 해도 신규취업도 어렵고 그렇다고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경력직으로 취업도 안되는 경우다.
1990년대 중반 독일은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경기가 불황일 때 일단 근로자들이 비정규직으로라도 노동시장에 남아 있어야 경기가 회복될 때 정규직 상용직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고용촉진법’이라는 법을 만들어 비정규직을 활성화한 적이 있다. 경기가 불황인데도 무조건 비정규직은 안된다고 해서 실업자만 늘리는 한국과는 다른 접근이다.
둘째는 잠재성장률 하락 때문이다.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면 성장률은 하락할 수 밖에 없다. 잠재성장 수준을 넘어서는 성장을 하게 되면 버블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잠재성장률 하락은 생산요소 투입의 감소와 생산성 증가율 하락이 원인이다.
저출산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거나 장기적으로 자본투자가 일어나지 않아서 생산요소 투입이 감소하게 된다. 국가부채가 늘어나서 공공서비스가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도 잠재성장률 하락의 원인이 된다. 기술혁신수준이나 교육의 질이 하락해서 생산성 증가율이 하락하게 된다.
셋째는 실제 성장이 잠재 성장 수준을 하회하는 마이너스 GDP갭이 장기적으로 지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성장률은 잠재성장률을 장기적으로 하회하면서 저성장을 초래한다. 이처럼 마이너스 GDP갭이 장기화하는 데는 저축이 투자보다 많은 과잉저축, 즉 과소투자현상이 지속되고 있는데 따른 것인데, 과잉저축, 즉 과소투자현상 의 원인으로는 두 가지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하나는 제로금리와 저인플레이션 하에서 실질금리가 저축과 투자를 균형시키는 자연이자율 수준 까지 하락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크루그만은 미국에서 경기정점과 정점간의 실질금리가 1980년대는 5%, 1990년대는 2%, 2000년대는 1%,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1%로 하락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는 실질금리가 –1% 정도가 되지 않으면 완전고용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명목금리는 제로이하로 내려 갈 수 없으므로 저인플레이션 상태에서는 마이너스 실질금리가 되지 못해 과소투자, 즉 과잉저축현상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고령화로 저축은 늘어나는 반면 정보기술(IT)의 발달로 실물투자수요가 감소하고 있는 점도 과잉저축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과잉저축, 즉 과소투자현상의 또 다른 원인은 거품기간 중에 쌓인 부채를 갚기 위해 가계나 기업이 소비나 투자를 할 수 없게 되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불황을 흔히 대차대조표 불황이라고 한다. 언제나 거품이 발생하고 난후 거품이 붕괴되면서 초래되는 대차대조표 불황에서 회복되려면 가계나 기업이 지고 있는 부채가 어느 정도 줄어들어야 된다는 점이 불황을 장기화시키는 큰 요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는 데는 미국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중앙은행인 연준이 주택저당채권을 직접 매입하는 양적 완화정책을 통해 자산가격 회복과 그에 따른 가계부채 부담 완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때문이다. 그 결과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에는 135%였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5%로 낮아지면서 민간소비가 회복되고 있다.
이 정도 부채부담을 줄이는데 양적 완화 정책을 쓰는 등 갖은 노력을 하면서도 6년이 소요되었다는 점은 한국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이 비율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143%였으나 현재 163%로 높아진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 비율이 100~110% 내로 들어와야 민간소비가 회복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
장기정체론자들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경제성장이 장기적으로 정체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서머스 교수는 미국의 경우 2014년 미국의 실제 GDP 수준이 2007년에 전망했던 2014년 잠재GDP 수준보다 10% 정도 낮은데 이 중 5%는 잠재GDP수준의 하락에 따른 것이고 나머지 5%는 마이너스 GDP갭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유로존의 경우는 2014년 실제 GDP 수준이 2008년에 전망했던 2014년 잠재GDP 수준보다 15% 정도 낮은데 이 중 10%는 잠재GDP수준의 하락에 따른 것이고 나머지 5%는 마이너스 GDP갭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장기정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마이너스 GDP갭을 최소화하기 위한 안정화정책과 중장기적으로 잠재 GDP 성장률과 잠재 GDP 수준을 제고하는 성장정책들에 대한 처방이 종래와는 달라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먼저 단기 안정화 정책으로서 통화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중요하다. 장기정체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통화정책은 효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장기정체기에는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는 실질이자율인 ‘완전고용실질이자율’이 마이너스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명목금리는 제로가 하한선이고 저인플레이션율이 지속되는 경우에는 마이너스인 완전고용실질이자율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실질이자율을 마이너스인 완전고용실질이자율로 가져 가려면 인플레이션율을 올리는 방법이 최선이다. 인플레인션 목표치를 높게 책정하는 방법이 권고되고 있다. 동 목표를 공개적으로 달성할 것을 천명해 경제주체들의 침체된 인플레이션 심리를 회복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만약 저인플레인션을 반영해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낮추게 되면 저성장을 고착화시키는 결과가 된다.
이처럼 경제가 장기정체기에 진입한 경우에는 재정정책도 확장적으로 운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재정건전성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재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성장잠재력이 제고되고 다른 한편 마이너스 GDP갭을 축소시켜주는 정부투자지출이 바람직하다. 정부투자지출은 정부소비지출이나 이전지출에 비해서는 재정승수도 높아 성장률 제고효과도 크다.
다음으로 대차대조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가계나 기업의 부채부담을 줄여주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의 주택담보대출과 같이 자산구입으로 인해 늘어난 가계부채의 부담을 완화해 주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자산가격을 적정한 정상수준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합리적 거품’을 만드는 일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업의 경우에는 채무재조정과 기업구조조정을 통해 부채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가능한 조속한 시일내에 가계와 기업이 소비와 투자를 정상적인 수준으로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책이 긴요하다는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잠재 GDP 성장률과 잠재 GDP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앞서 살펴 보았던 원인들을 제거하거나 해소하는 정책들을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근로자의 인적자본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불황기에는 비정규직이나 시간선택제를 활성화해 상용직으로 취업 못하는 근로자들은 일단 2차 노동시장에 잔류하게 해서 노동시장의 이력현상을 막는 정책을 추진할 것을 권고하고 한다.
실효성 있는 저출산 고령화대책으로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를 막고 규제혁파 등 기업투자환경 개선으로 기업투자를 촉진하고 기술혁신과 우수한 교육으로 생산성 증가를 도모해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정책도 추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오정근 건국대학교 특임교수,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이 글은 한국경제연구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