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민련 민족사회주의 지향 '역사 앞에 교만'…열등국가로 내몰아

자유경제원에서는 2014년 산적한 교육쟁점들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교육쟁점 연속토론회를 개최했다. 총 열 두 차례에 걸친 토론의 장을 통해 자사고 폐지와 혁신학교 추진의 문제점, 교육내용의 좌편향, 학생인권 조례의 문제 등 구체적인 교육현장의 문제들을 짚고자 했다. 자유경제원은 연속토론회를 마무리하면서, 관련 전문가와 시민운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하는 <2014 자유경제원 교육대토론회- 흔들리는 교육,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를 9일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개최했다. 아래 글은 패널로 참석한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기조강연 전문이다.

   
▲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역사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 그리고 사회적 갈등

오늘날 한국인이 봉착하는 사회적 갈등, 경제적 정체와 격차, 정치적 반목은 다양한, 깊은, 역사적 요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들은 한국 정신문화의 특질로서 오랫동안 한국인을 오도해 온 교육이념과 교육정책의 소산이기도 하다.

국가가 공교육 과정을 통해 양성하는 젊은 세대의 정신세계는 그 세대가 주역이 되는 정치, 사회, 경제의 질을 결정한다. 오늘날 한국인이 봉착하는 제반 갈등, 격차, 반목은 지난 세대에 걸친 잘못된 교육이념과 교육정책의 책임이다.

사회가 심하게 갈등하는 모습은 다양한 지표로 관측된다. 사법부가 처리한 각종 본안, 비본안, 비송 사건은 1993년의 1161만 건에서 2013년 1842만 건으로 증가하였다. 민사 본안사건 1심 처리는 1993년의 38만 건에서 2013년의 112만으로, 형사 본안사건 1심 처리는 1993년의 16만 건에서 2013년의 26만 건으로 증가하였다. 사법부의 처리 대상이 되지 않은 사기, 폭력은 일층 광범하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3년 사기 범죄가 29만 1128건, 위증이 3420건, 무고가 6244건이었다. 위증과 무고의 빈도는 일본의 100배를 넘고 있다. 보험 사기로 적발된 건수와 금액은 2009년 5.2만 건에서 2013년 26만 건으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2010년 보험사기의 암수는 3조 4000억 원으로 추정되었다.

경제가 저성장에 늪에 빠진 가운데 소득의 양극화가 진행되는 근본 원인은 종사자 9인 이하의 소상공인과 50인 이하의 소기업이 너무 과밀하고 적체하기 때문이다. 1993∼2012년 소상공인 사업체가 214만 개에서 333만으로, 소기업 사업체가 13만 개에서 23만 개로 증가하였다.

반면 300명 이상 또는 1000명 이상 대규모 사업체는 감소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국가경쟁력의 중심을 이루는 제조업에서 더욱 심하였다. 제조업에서 300명 이상 대규모 기업은 1993년 1,223개에서 2012년 687개로 감소하였다. 대기업이 크게 줄고 영세기업은 크게 느는 것은 경제적 현상만이 아니다. 사회적, 문화적 현상이기도 하다.

노동시장의 질을 나타나는 여러 지표에서 한국은 OECD 내에서 열등생이다. 2009년 정규직의 근속연수는 평균 6.2년인데, 이는 OECD에서 가장 짧은 편이다. 비정규직이나 기간제의 근속연수는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나아가 전체 피용자 가운데 1만 미만 근속자의 비율은 무려 36%로서 OECD 내에서 단연 최고이다.

저임금 노동자의 비율은 26%로서 역시 최고이다. 고용의 질이 이렇게 열악한 것은 위와 같이 좁은 국내시장을 무대로 영세사업체들이 과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앓고 있는 병폐의 근원은 국제경쟁력을 결여한 영세사업체의 과밀과 적체에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의 정강 정책 /=새정치민주연합 홈페이지

정치로 눈을 돌리면 더 깊고 오랜 연원의 대립과 반목을 보게 된다. 야당 새민련의 정강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정신과 헌법적 법통, 4월 혁명·부마민주항쟁·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을 계승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국민의 헌신과 노력,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 향상을 위한 노력을 존중한다.”

여기서 새민련은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 그것을 주도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세력, 국제 공산주의세력의 무력 침공에 맞서 한국인이 그의 자유를 지켰던 6·25전쟁, 한국을 방어한 미국과의 동맹, 고도경제성장을 기획하고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세력을 부정한다. 새민련의 정강은 그 정당의 중심 이념이 민족사회주의임을 토로한다. 그들은 북한의 김씨 왕조와 ‘우리민족끼리’의 공조를 통한 민족통일을 지향한다.

1998∼2007년의 집권기에 새민련이 뿜어낸 민족사회주의 지향에 대해 다수 국민은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2007년과 2012년의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한 것은 그 거부감에 의해서였다. 다시 말해 다수 국민의 자유민주주의적 지향에 의해서였다. 그럼에도 지난 7년간 새누리당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국가정체성의 확립과 제반 혁신의 추진에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새누리당의 강령은 새누리당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의 보수적 가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건국,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동적 발전을 주도했다고 선언한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역사적 서술은 없다. 새누리당의 공식 역사는 1997년의 한나라당에서 시작한다.

새누리당은 그 이전의 역사, 곧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으로 이어온 동당의 파란만장한 전사를 설명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그 역사에 대한 해석은 야당에 위임되어 왔다. 집권세력의 불분명한 이념적 지향과 덜된 역사의식은 현 박근혜정부가 출범 2년에도 전혀 국정의 일머리를 찾지 못하는 혼란과 무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앞서 소개한 사회, 경제, 정치의 모순은 깊어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 현실이 어떤 ‘역사의 굴레’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올바로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2∼3세기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은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변화, 진보는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일깨워 준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건국 이후 우리가 이루어 낸 물질문명의 성취에 교만해서는 안 된다. 정신문화의 발전에는 비약이 없으며, 아주 느린 걸음의 누적적 진화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정신문화가, 누구의 책임이랄 것도 없이, 현실의 모순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올바른 처방을 내릴만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근대문명’은 일정기, 미군정기, 건국초기에 걸쳐 바깥 세계로부터 이식되었다. 제도의 이식은 쉽지만, 그것을 운용할 이념의 이식과 착근은 매우 어렵다. 근대적 이념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어울려 유사한, 사이비이기도 한, 형태와 기능으로 작용하였다.

거기서 발생한 제도와 이념의 괴리가 오늘날 우리가 봉착하는 모든 어려움의 근원이다. 제도와 이념의 괴리는 교육의 분야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으며, 가장 강하게 다른 모든 수준의 괴리를 규정해 왔다.

민족주의라는 집단적 이념으로 남아있는 ‘홍익인간’의 애매함과 불투명함

1949년에 제정된 교육법은 ‘홍익인간’을 신생 대한민국이 지향할 최고의 교육이념으로 받들었다. 이 점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온갖 화려한 문식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해, 나는 ‘홍익인간’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홍익인간’의 애매함과 불투명함은 오랫동안 민족주의라는 집단적 이념으로 메워져 왔다. 신생국이 그의 국민을 하나의 정치적 질서로 통합함에 민족주의만큼 강렬하고 효과적인 수단은 없었다. 박정희가 추구한 ‘조국근대화’에서 개인은 ‘민족적 개인’이었고, 민주주의는 ‘민족적 민주주의’였다.

그가 한껏 고양시킨 민족주의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죽음 이후 한국의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국가의 정통적 역사를 부정하는 무기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반민족 친일세력이 세운 미국의 종속국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진 역사는 반민족세력의 기득권과 민족의 대미 종속을 강화하는 역사로 단죄되었다.

이 같은 역사 해석이 공교육의 현장을 장악해 갈 때 자유민주주의세력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동안 이념적으로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였다. 민족사회주의세력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세력의 반격이 개시되는 것은 2004년부터이다.

지난 10년간의 논쟁 끝에 민족사회주의자들의 헤게모니는 현저히 약화되었다. 전술한대로 다수 국민의 자유민주주의적 지향이 그 근본 동력이었다. 그렇지만 공교육의 역사 교실이 민족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현실은, 자유민주주의세력의 집권 7년에도 불구하고,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 사이, 공교육의 현장에서는 어떠한 유형의 인간상이 추구되어 왔던가. 1998년에 개정된 교육과정은 홍익인간의 교육이념 하에서 “전인적 성장의 기반 위에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 기초능력을 토대로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 폭넓은 교양을 바탕으로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토대 위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 민주시민의식을 기초로 공동체의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을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추구한다고 천명하였다.

2007년에 개정된 교육과정도 마찬가지로 “사회과에서 육성하고자 하는 민주 시민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권 존중, 관용과 타협의 정신, 사회 정의의 실현, 공동체 의식, 참여와 책임 의식 등의 민주적 가치와 태도를 함양하고, 나아가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개인의 발전은 물론, 사회, 국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럴듯하게 피력된 교육이념이 교육현장을 올바로 인도하고 있으리라 믿는 것은 큰 착각이다. 전술한 제도와 이념 간의 간격, 지체, 괴리를 고려해야 한다. 교육현장의 실태는 교육학자와 교사들이 제작한 교과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나는 현행 8차 초등학교 1〜6학년의 『바른생활』, 『생활의 길잡이』, 『도덕』 교과서를 검토한 적이 있다. 교과서가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바람직한 인간상은 가정, 학교, 사회에서 예절을 지키고, 자기 책임을 다하고, 이웃에 봉사하고,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나라를 사랑하고, 자신의 꿈과 소질을 성취하기 위해 성실, 근면, 도전, 책임, 용기의 미덕으로 인격과 실력을 도야하는 존재이다.

근대문명 인간의 본질적 가치인 자유와 개인이 빠져 있는 공교육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무언가,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는 사실이다. 다름 아니라 인간, 곧 자아의 본질에 대한 학생들의 주체적 인식과 성찰이다. 근대문명이 상정하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근대문명은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 ‘개인’을 기본 요소로 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에게도 신체와 정신이 구속되지 않은 가운데,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처결하는 능력과 권리를 지닌 존재이다. 이를 가리켜 근대의 정치철학은 ‘자유’라 하였다.

이 ‘자유’의 인간 본성에 대한 서술이 현행 교과과정과 교과서에 완벽하게 빠져있다. 교과서 어디에도 ‘자유’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교과서 표지 다음의 ‘국가에 대한 맹세’에 묻혀 있을 뿐이다. 자유 가치는 역설적이게도 억압적인 분위기로 전달되고 있다. 어쨌든 자유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독자의 장과 절이 교과서에 설정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인간을 근대적 존재이게 하는 핵심적 가치로부터 떨어진 가운데 초등학교 교실의 학생들은 꿈, 끼, 성실, 근면, 도전, 책임, 용기, 배려, 봉사, 평화와 같은 가치로 점철된 진부한 교육을 받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현행 교과서는 학생들을 교육의 피동적인 객체로서 설정한 위에 기성세대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근면, 성실, 자아실현의 가치를 민주, 인권, 시민, 공동체, 시민 등의 근대적 형식을 빌려 주입하는 통로로 역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막상 학생들의 정신세계에 주입되는 것은, 쉽게 표현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한 몸만 살필 것이 아니라 공공의 예절을 지키고, 이웃을 배려하고, 약자를 도우고, 국가를 사랑하고, 나아가 인류사회의 공영에 이바지하라는 것이다. 이른바 전인교육이다. 그렇지만 전인교육의 가치들은 파생적이다. 본질적인 가치는 열심히 실력을 닦아서 남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 공교육에 대한민국 헌법 정신인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현재의 공교육은 교육감들의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 실정이다. 11월 10일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바른사회시민회의 회원들이 지난 15일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친환경 무상급식 확대 계획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국이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 그리고 교육

훌륭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이에 관해 한국인들은 그의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 풍부하다. 1985년 이래 5년 간격으로 반복되어 온 미시간대학의 ‘세계가치관조사’는 한국인이 장기의 관점에서 인생을 설계하고, 그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고 인내하고 저축하는 능력에서 세계의 최고 수준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인이 장기의 관점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높고 안정된 지위와 풍족한 재산이다.

직업노동의 보람, 타인에 대한 배려, 소수 인종에 대한 박애, 창조적 상상, 사회적 권위의 존중과 같은 정신주의적 가치에 대한 한국인의 지향은 빈약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한국의 정신문화가 드러내는 물질주의적 편향은 국제적으로 거의 이상치에 가깝다. 사회적 신뢰는 원래 낮았지만, 조사가 반복될 때마다 점점 낮아져 왔다. 근래에 이루어진 몇 편의 훌륭한 논문은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국제적으로 저신뢰와 고갈등의 군집에 속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물질주의의 사회에서 인간들이 개인과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고 훌륭한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한 가장 중요한 통로는 교육이다. 일류대학을 졸업하여 공무원, 교수, 의사, 변호사, 대기업의 사원이 되는 것은 19세기까지의 전통시대에 문과나 진사시에 합격하는 정도의 사회적 성취에 해당한다. 그 다음의 서열이 공기업과 금융기관의 사원, 교사,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이다.

그 다음 서열이 중소기업 사원, 자영업, 비정규직일 터이다. 맨 아래에 일용직이 있다. 이렇게 현대 한국사회는 학력이나 학벌의 수준에 맞추어 정확하게 설계된 신분제적 위계로 통합되어 있다. 사회의 이 같은 편성 원리나 실태에서 현대 한국사회는 그의 전통사회와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이 신분제적 위계의 사닥다리에서 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기 위해 한국의 어린이들은 철들면서부터 학부모와 교사에 의해 살인적인 경쟁에 돌입한다.

인간들을 공동의 지연과 직능에 토대를 둔 공동체로 조직하는 전통은 이 사회에서 무척 취약하다. 동직자의 협회와 협동조합은 대부분 관변 조직으로서 정부 정책의 대행기구이거나 대정부 로비창구로 기능한다. 가장 강력한 신뢰단체는 여전히 친족, 동창, 동향과 같은 집단연고에 기초한 것인데, 이들 단체는 인간들로 하여금 사회의 신분제적 위계에서 그의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주의적 계기로 작용한다.

저신뢰의 사회 한국, 자유 이념의 올바른 교육을 해야

앞서 소개한 오늘날 한국 사회, 경제, 정치의 제반 병폐는 이 같은 사회의 편성 원리와 실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컨대 경제의 저성장과 양극화를 초래하는 영세사업체의 과밀과 적체는 사업주와 종업원 간에, 사업주 간에, 동업자 간에 ‘신뢰’라는 가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경제는 ‘사회적 자본’ 내지 ‘비공식적 제도’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

나는 저성장과 양극화를 저지하기 위한, 성장세를 회복하기 위한, 정부의 어떠한 정책적 노력도 향후 상당기간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힘들 것으로 짐작한다. 여기저기서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규제 혁파, 서비스산업 빅뱅, 창조경제, 생산적 복지 등등. 그렇지만 그것들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사회적, 문화적 토양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비관에 빠져 손을 놓고 세상을 관조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의 깊은 근원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다름 아닌 교육이다. 교육을 통해 한국사회의 편성 원리를 자유민주주의적으로 바꾸어 갈 필요가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듯이, 소걸음으로, 10〜20년 뒤를 내다보고 교육혁명의 바람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그 첫걸음은 뭐라 해도 자유 이념에 올바른 교육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자유는 독립이요, 협동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는 같은 얼굴의 다른 표정이다.

자유는 정신적, 물질적 독립을 말한다. 학생들에게 법적으로 성년이 되는 19세에 정신적으로는 물론, 물질적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우리보다 앞선 선진국의 학생들은 어릴 적부터 그 같은 자유·독립의 정신을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받는다.

더불어 교육 당국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인생살이의 경로를 제공한다. 그래서 실업계 고등학교, 기술계 초급대학이 발달하고, 청년취업률이 높고, 숙련공이 양성되고, 대학 진학률이 낮은 것이다. 나이 30의 미취업 자녀를 둔 가정도, 수십만의 공시족을 선진사회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독립은 다양한 범위와 수준의 협동을 촉진한다. 파트너십이, 협동조합이, 협회가 성숙한다. 사업주와 종업원이 신뢰관계로 바뀐다. 사회는 보다 자율적으로 바뀌며, 정부는 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고, 효율적인 조직으로 진보할 것이다.

비교제도경제학은 선진 사회와 경제의 유형이 한 가지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영국과 같은 개인주의 문화에 기초한 ‘자유시장경제’가 있는가 하면, 독일·일본으로 대표되는 공동체문화에 기초한 ‘조정시장경제’가 있다. 나라마다 사회·문화의 전통은 상이하며, 경제체제도 그에 따라 유형을 달리한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선진 사회와 경제인 이상, 자유·독립·협동의 기풍은 높이 진작되어 있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현행 교과서에 자유, 독립, 협동의 가치를 새롭게 편입하고, 그에 상응하는 교재, 학습의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된다. 정부의 조그만 의지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당국자들이 지적 협애와 태만으로 이 같은 역사적 과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역사의 발전은 원래 쉽지 않은 가운데 소걸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 독립, 협동은 자유민주주의적 애국심으로 승화한다. 자유의 이념으로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켜 온 역사를, 그 명과 암을 있은 그대로 가르치는 것만큼, 우리의 다음 세대를 밝은 문명사회로 이끄는, 이 사회와 국가를 깊은 정체와 위기로 몰아넣을 민족사회주의의 유혹을 차단하게 될, 큰 힘은 없을 것이다. 이 점을 마지막으로 강조해 둔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