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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오늘(15일자) 조선일보에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 의원 인터뷰가 실렸다. 인터뷰어는 최보식 기자.
후배기자로서가 아니라 ‘글 쓰는 사람’으로서 최보식 기자를 늘 주목하고 있다. 잘 쓰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캐릭터는 비단 글 솜씨에서만 획득된 것은 아니다. 그는 아주 묘한 반골(反骨) 정서를 갖고 있다. 소위 ‘패션좌파’와는 좀 다르다.
‘내가 비록 조선일보 기자이긴 하지만…’으로 시작될 듯한,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으려는 반항기가 있다. 세상이 좌로 가면 그는 우로 간다. 세상이 우로 가면 그는 좌로 간다. 용감해 보일 때도 있으나 (송구스런 얘기지만) 밉살맞게 느껴질 때도 있다. 오늘은 후자다.
그는 왜 지금 임수경을 인터뷰했을까. 잠시 ‘궁예’로 변신해서 최보식 기자에 대한 관심법(觀心法)을 해보고 싶어진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최보식이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코너를 주1회 진행한다. 지난 주 게스트는 스토리케이 이종철 대표였다.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한 ‘지극히 정상적인’ 내용이 담긴 인터뷰라 감탄하며 읽었다. 페이스북에 링크를 올렸더니 ‘공유하기’가 14개나 붙었다.
오늘의 임수경 인터뷰는 아마도 지난주 이종철을 인터뷰한 것에 대한 ‘최보식표 균형감각’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찬반양론을 다 들어보겠다는 그런 의도 말이다. 자, 관심법은 여기까지다. 사실 뭐 기자가 인터뷰를 하겠다는 데 누굴 만나 뭘 하든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니겠나. 물론 정도(程度)라는 건 있겠지만 말이다. 통진당에 대한 ‘색다른’ 얘길 들려줄 사람이 정말 임수경 밖에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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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 임수경 의원 |
오늘자 인터뷰에는 임수경의 가족사부터 개인사까지 내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토론이 아니라 1인의 인터뷰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임수경에 우호적인 감각을 가질 만한 내용들도 있다. 그녀가 아들을 잃은 적이 있다는 점을 알고 마음이 아팠지만, 기타 내용은 송구하옵게도 하나도 궁금하지도 필요하지도 가치 있지도 않았다.
임수경이 여전히 386세대의 불치병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찌꺼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역시 그다지 새로울 건 없는 정보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으면 어쩌겠나. 내가 아니라고 한들 믿어주겠나. 하지만 나는 ‘종북’이 아니다. 내 삶과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
자기 삶과 행동으로 종북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줬으면서 자기는 종북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보이는가?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사실’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내가 어떻게 믿는지’ 만이 중요할 뿐이다. 역사(history)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 승자의 기록일 뿐이니까. 자신들도 스스로 믿는 대로 기록하면 된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기록의 과정, 투쟁의 과정, 승리에 근접하는 과정이다….
한국 사회에서 세를 확보하고 있는 이 사고를 극복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 오늘의 인터뷰에서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임수경이 여전히 이 세기말적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 정도였을까. 현재의 대한민국은 바로 그런 사람도 금배지를 달 수 있단 걸 알려준 점 정도였을까.
한 200년쯤 뒤, 대한민국의 체제가 성공적으로 수호됐다고 가정해 보자(요즘 돌아가는 꼴로 봐서는 못 그럴 것 같을 때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2214년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기이하게 다가갈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임수경의 금배지 아닐까. 아무리 민주주의가 자유롭다지만 ‘저런 사람’이 국민의 대표로서 활약했다는 점은 후세에게 얼마나 희한하게 다가갈까.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2014년의 우리는 정말 ‘관용적인’ 사람들이니까.
임수경의 15일자 조선일보 인터뷰는 임수경과 일련의 종북 세력을 둘러싼 바로 그런 희극성과 비극성을 극대화시켰다. 최보식 선배님, 만족하십니까.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