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의 좌편향은 철저하다. 2:8, 1:9도 아닌 0:10의 상황. 균형은커녕 우파적 시각이 '존재'할 수는 있을 것이냐는 의문 속에서 자유경제원은 '자유주의예술포럼'을 시작했다. 예술 분야를 자유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그 시도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래는 지난 15일 포럼 '경쟁과 문화예술'에서 발표된 미디어워치 이문원 편집장의 발제문 '스크린 독과점 논란의 실체' 전문이다. |
한국영화산업 관련 언론보도에서 매년 여름만 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가 있다. 이른바 ‘스크린 독과점’ 문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 중심으로 대형 상업영화들이 한 시기에 스크린을 싹쓸이 하다 보니 영화 선택 다양성 확보 차원에서 큰 문제가 생긴단 비판이다.
그러면서 영화계 수직계열화 대기업들에 대한 ‘도의적 차원’ 비판이 함께 제기된다. 올해도 이미 초여름부터 스크린 독과점 이슈가 제기됐다. 아주경제 4월30일자 기사 ‘’거미맨’의 어메이징한 흥행비법은 스크린 독과점’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의 흥행비법은 스크린 독과점에 있다”면서 “스크린 독점으로 인해 다른 좋은 영화들이 영화관람 피크 시간대에 편성되지 못함에 따라 다양성이 훼손되고, ‘결국 볼 영화가 없어서 ‘거미맨’을 봤다’는 얘기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매년 같은 문제제기에 매년 같은 진단, 같은 충고다.
스크린 수 변동 격렬한 한국시장의 역동성
이제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해당문제는 2006년 ‘괴물’ 때부터 꾸준히 제기되다 가장 크게 도마에 오른 게 2011년 ‘트랜스포머 3’ 상황 때다. ‘트랜스포머 3’는 개봉 당시 1420개 스크린에서 상영돼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스크린 확보 1위’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국내 전체 스크린이 2229개였으니, 무려 63.7%의 스크린 독과점이 이뤄졌던 셈이다. 이에 당시 문제를 제기한 엔터미디어 2001년 7월4일자 기사 ‘트랜스포머 흥행의 단순한 이유’는 “심지어 미국에서도 이 영화의 극장 점유율은 1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점점 우리는 글로벌 호구가 되어가는 건가”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개봉 첫 주 1420개 스크린을 장악했던 ‘트랜스포머 3’는 2주차에 벌써 113개 스크린이 빠져나가 1307개로 줄었고, 3주차엔 877개 스크린으로 뚝 떨어졌다. 보름 만에 543개 스크린이 빠져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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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 (2014) |
반면 같은 영화의 개봉 첫 주 스크린 점유율이 11%밖에 안 됐다던 미국에선 3주차에도 불과 4.2%의 스크린밖에 빠져 나가질 않았다. 같은 기간 한국은 38.3%가 떨어져나갔다.
올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는 이보다 더 상황이 극단적이다. 개봉 4일차에 1312개 스크린으로 최다를 기록한 뒤, 그로부터 불과 4일 뒤 752개 스크린으로 급하락 했다. 거의 절반 가까운 스크린이 떨어져나간 것이다. 반면 미국에선 같은 영화가 4324개 스크린에서 시작해 개봉 14일차까지 같은 스크린 수를 유지하다 15일차가 돼서야 3991개 스크린으로 내려왔다. 7.7%만 떨어져나갔다.
이 같은 구도는 한국영화시장에서 비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여름 시즌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만 해당되는 얘기조차 아니다. 대부분 될성부른 블록버스터들이 개봉 첫 주 어마어마한 스크린을 확보해 공략한 뒤, 일주일도 채 못 돼 확보한 스크린의 30~40%씩 줄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구도다. 될성부른 영화가 등장하면 일단 개봉 첫 주 전체의 40%가 넘는 스크린을 독차지하며 일거에 관객을 끌어 모은다. 그러다 바로 다음 주에 스크린 수를 크게 줄이고 그 주말 등장할 새 ‘될성부른 영화’에 스크린을 내주는 식이다. 결국 한국영화시장은 될성부른 영화 한 편의 스크린 독과점에서 곧바로 다른 한 편의 독과점으로 신속하게 이동되는 초단기적 독과점 연쇄구도란 얘기다.
왜 이런 식의 구도가 성립된 걸까. 단순히 말해, 시장 성향 자체가 그런 식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시장 분위기와 상관없이 무작정 자기들 멋대로 배급구도를 짜는 산업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트랜스포머 3’ 논란 당시 이를 배급한 CJ E&M 영화부문 관계자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배급사 입장에선 최적화된 배급을 한 것”이라고 짚은 바 있다.
스크린 독과점 전략 덕에 배 이상 늘어난 ‘중박 이상’ 영화들
이제 한국영화시장 성향을 살펴보자. 먼저 한국시장이 기본적으로 몇몇 될성부른 영화들에 관객이 몰리는 쏠림 구조란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단적인 예로, 한국에선 전체인구의 4분의 1이 관람하는 ‘1000만 영화’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같은 인구비례를 미국시장 기준으로 산출해봤을 때 미국서 이에 부합되는 사례는 지난 10년 간 2009년 작 ‘아바타’ 단 한 편뿐이다. 반면 한국에선 같은 기간 총 10편이 나왔다. 거기다 한국은 연간 1인당 영화 관람 횟수가 지난 5년 평균 3.5회로, 3.9회인 미국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 더 적은 1인당 관람횟수에도 더 많은 ‘인구의 4분의 1 관람영화’가 쏟아진다는 것. 그만큼 다양성이 엿보인다기보다 몇몇 영화들로 관객이 대거 쏠리는, 트렌드성이 두드러지는 시장이란 얘기다.
물론 이처럼 강한 트렌드성 자체가 배급 측 스크린 독과점 전략 탓에 유도된 결과란 의견도 존재한다. 전체 스크린 중 63.7%가 ‘트랜스포머 3’를 트는 식으로 전략을 세웠으니 당연히 시장구도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지금 같은 스크린 독과점 현상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도 한국영화시장은 될성부른 영화 한두 편에 관객이 몰리는 현상을 충분히 겪어왔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초로 여겨지는 1999년 작 ‘쉬리’부터가 그랬다. ‘쉬리’는 개봉 당시 전국 23개 극장에서 걸리는 데 그쳤다. 당시 전국극장연합회 소속 극장수가 총 507개관이었으니, 점유율로 따지면 4.5%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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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리(1998) |
이후 흥행가도를 달리며 상영관이 늘긴 했지만, 그래봤자 여전히 70여개 관 수준이었다. 전체의 14% 정도다. 그럼에도 ‘쉬리’는 최종적으로 전국 582만 명의 관객을 동원, 1999년 연간 총 영화 관람객 수의 10.6%(서울관객 기준)를 차지했다. 이 10.6%를 지금 시장규모로 환산해보면 약 1400만 관객이 된다. 그 정도 관객동원은 아직 한국에서 이뤄진 바가 없다.
결국 몇몇 될성부른 영화들에 시장 전체가 쏠리는 분위기는 스크린 독과점 상황이건 아니건 유사했단 얘기고, 이 같은 패턴은 이듬해인 2000년 600만 관객을 동원한 ‘공동경비구역 JSA’, 2001년 800만 관객을 동원한 ‘친구’에서도 꾸준히 재연됐다. 이를 꾸준히 지켜보다, 아예 개봉 시 스크린을 대폭 늘려 초반에 치고 빠지는 전략을 실험하기 시작한 게 2003년 ‘살인의 추억’ 무렵부터다.
특정시기 특정영화에 쏠림이 크게 일어나는 시장분위기에서, 그 쏠림을 스크린 대량 확보를 통해 단기간으로 압축, ‘회전율’을 높여보자는 전략이었다.
그 결과 2004년 1억3517만 명대였던 한국영화시장 총 관람객수는 2013년 2억1332만 명으로 무려 57.8% 성장했고, 한국영화 관람객 수도 8019만 명에서 1억2727만 명으로 대폭 성장했다. 한국영화 개봉 편수 역시 2004년 74편에서 2013년 183편으로 배 이상 늘었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초단기 독과점 연쇄배급으로 인해 오히려 흥행분포의 쏠림이 줄고 각 영화들의 전반적 흥행 상승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전국 관객 수 집계를 시작한 2005년, 흔히 ‘대박’ 라인으로 불리는 전국 300만 관객 이상 동원 영화는 모두 8편이었고, 그중 6편이 한국영화였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이르러선 총 19편의 영화가 이 라인으로 들어섰고, 그중 14편이 한국영화였다.
150만 명 이상 중박 라인까지 범위를 넓혀 봐도 2005년 21편에서 2013년 42편으로 딱 배의 영화들이 안정적 수익을 확보하게 됐다. 될성부른 몇몇 영화들만 먹고 살게 해준다던 스크린 독과점 전략이 오히려 불과 8년여 전보다 배 이상의 영화들을 손익분기 안정권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국영화 투자 수익률도 2004년 3.1%에서 2013년 15.2%로 5배가량 성장했다. 동 시기에 다양성을 제공하는 방식보다 트렌드성을 살려 재빨리 치고 빠지는 전략이 오히려 다양한 영화들에 기회를 줌으로써 시장을 고르게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
“어떻게든 다양성 확보해야 한다”는 위험한 주장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한두 편의 영화에 시장 전체가 쏠리는 시장 환경이란 뭘 의미할까. 쉽게, 소비자들 스스로 딱히 ‘다양성’을 요구하진 않는 환경이란 얘기가 된다. 될성부른 콘텐츠에 일순간 너도나도 몰려들며, 다시 다음 번 될성부른 콘텐츠로 순식간에 몰려간다.
왜 그럴까. 한국은 대중의 문화적 취향이 다양하지 않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주 소비층인 20대 계층에서 이 같은 경향이 뚜렷이 발견된다. 주 소비층 각자 취향이 다양하지 않은 문화 환경에서 문화상품 소비는 자연스레 트렌드성 소비로 넘어가게 된다. 일종의 유행상품 격 소비다.
물론 스크린 독과점 관련 기사나 의견이 인터넷에 등장하면 모두들 입을 모아 독과점의 폐해를 논하며 다양성의 필요성을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건 대중이 지지하는 ‘가치’일 뿐 실제 대중의 ‘요구’와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가치’라는 건 본래 자신의 ‘요구’ 이상의 것, 자신이 지닌 속성과 한계를 뛰어넘는 것으로 설정되기 십상이다.
한국은 액면 그대로만 봤을 때 배급되는 영화의 편수가 결코 적은 시장이 아니다. 지난 2013년 한 해 동안 한국영화시장에선 영화제 상영작을 제외하고 한국영화 183편, 해외영화 722편 등 총 905편의 영화가 개봉됐다. 물론 허수성 개봉작들도 일부 존재하겠지만, 그를 제외하고도 많은 숫자다. 북미에서 2013년 한 해 동안 극장 개봉된 영화 수가 총 687편이었다. 시장규모는 우리의 몇 배 이상인데 콘텐츠 수적으론 큰 차이가 나질 않는다.
심지어 문화다양성의 천국이라는 일본도 지난 한 해 동안 극장 개봉된 영화 수는 1117편이었다. 그런데 한국시장은 그 많은 개봉작들 중 상당수가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는 데 그 특성이 있다. 2013년의 한국영화 개봉작 183편 중 전국 관객 100만도 아니라 10만 명이라도 끌어들인 영화는 겨우 50편이었다. 3분의 1도 채 안 된다. 대중 스스로가 ‘다양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단관개봉에 홍보도 제대로 안 돼 못 봤다고 한다면, 역시 단관개봉에 홍보도 제대로 안 되지만 관객이 끊이지 않는 뉴욕의 아트하우스, 도쿄의 소규모개봉관들이 웃는다. 개봉작 수만 많지 볼 영화가 없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볼 만하지 못해 관객 10만도 못 모은 영화들 중엔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최고상 수상작도, 세계적 격찬을 받은 일본 아니메 ‘언어의 정원’도, 인디영화로서 전 세계 시장에서 돌아가며 흥행에 성공한 ‘문라이즈 킹덤’도 있었다. ‘요구’와 ‘가치’ 간 거리는 한국영화시장에서 이토록 크게 벌어져있다.
소비자 취향은 단순한데 배급만 다양하게?
끝으로, 영화 주 소비층인 20대 계층에서 유난히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적다는 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근거를 제시한 사례는 많다. 2년 전 동아일보의 G세대 관련 조사결과도 그 한 예다.
해당조사에서 G세대, 즉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전후해 태어난 현 20대에 대해 JYP 엔터테인먼트의 실질적 수장인 박진영은 “G세대는 겉보기엔 개성이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학생이 학원·학교·과외와 같은 획일적이고 꽉 짜인 틀 안에서 자랐다”며 “무기력한 로봇 같은 측면이 있고 심지가 약하다”고 평가했고, 소설가 김영하는 “부모 세대와 달라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똑같아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결국 문화 다양성이란 대중 본인 자아의 주체성과 독립성, 개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청년의식의 획일화가 이뤄지고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그저 ‘트랜스포머 3’가 전체 스크린의 63.7%를 차지하는 세상에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이에 대해 해결책은 있을까?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게 맞는 답이다. 정책적 대안을 거론하는 이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자유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시장의 판단에 우선하는 정책이란 있을 수가 없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국민들이 ‘봐야할’ 영화들을 골라 스크린에 집어넣는다는 건 상식을 초월한 반시장적 발상이다.
이제 상황을 달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스크린 독과점을 막을 수 있는 건 정책이 아니라 대중 본인들이다. 소비자가 다른 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시장구조도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게 상례다.
지금 당장 1~2주에 한 번씩 초토화되는 스크린에 불만이 있다면, 인터넷으로 검색해 ‘무드 인디고’ ‘버진 스노우’ ‘갈증’ ‘테레즈 데케루’가 상영되는 극장을 찾으면 된다. 자기 집 앞 멀티플렉스까지 배달해줘야 그나마 볼 마음이 생긴다는 이들이라면, 그저 집 앞 중국집에서 자장면 배달시켜 먹으면 되지 메뉴의 다양성을 거론할 입장은 아니다.
‘그 시절’이 그리도 부러운가?
지난해 7월25일 대학 영화영상 관련학과 교수 56명으로 구성된 ‘반스크린독과점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을 위한 대학영화영상관련학과교수성명서 모임’은 “특정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해서 흥행하고 다수 영화가 피해를 보는 상황을 더는 방관할 수 없다. 그것은 갑과 을이 상생하는 자율적 시장질서가 아니”라며, “국회는 스크린 독과점을 제한하는 내용의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여야 공동으로 입안하고 통과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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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 |
그러나 그 수혜를 본 ‘특정영화’라는 게 불과 8년여 만에 배 이상 늘어난 현 상황에 대해 이들은 입을 연 바 없다. 어차피 스크린을 독과점 수준까지 확보할 수 있는 영화들은 제작과 배급, 상영을 모두 거머쥔 수직계열화 대기업 영화들뿐이란 주장은, 극장체인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지난해 배급순위 1위를 차지한 넥스트월드엔터테인먼트 앞에서 말문이 막힌다.
물론 애초 스크린 독과점 문제의 중심 화두였던 ‘영화 선택의 다양성’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어느 분야건 다양한 선택지의 확보만큼 건강하고 안정적인 시장을 구축해내는 방안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설정된 시장 구성에 인위를 가해서라도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만큼 어리석고 위험한 것도 또 없다.
주간동아 2014년 5월12일자 칼럼 ‘‘스크린 싹쓸이’ 네 죄를 알렸다?’는 “영화가 상품이고 대체로 오락인 것은 사실이지만(국내 시장 매출의 98% 이상을 상업영화가 차지하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영화는 한 나라의 정신과 언어와 문화가 담긴, 즉 문화상품이라는 특수한 상품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국내 시장질서와 국제 통상 마찰에서 자주 도마에 오르는 ‘문화적 예외’ 논쟁을 떠나 우리가 식물, 문화, 영화 등의 종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약한 종의 보호와 육성을 외면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라고 자문한다.
그러나 그 ‘약한 종’이란 게 그저 독립자본으로 제작된 저예산 영화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불과 6개 스크린에서 개봉된 뒤 뜨거운 관객반응에 힘입어 308개까지 스크린이 늘어나 최종적으로 3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2009년 작 ‘워낭소리’, 그리고 역시 10여개 스크린에서 시작해 최대 100여개까지 확대됐던 2010년 작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등의 예외들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규모로 상영을 시작했더라도 관객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배급이 확대될 수 있는 게 영화산업의 속성이다. 이로 만족하지 못하겠다면, 관객들이 원치 않아도 무조건 스크린을 확보해 텅텅 빈 상영관들을 전시해놔야 한단 얘긴가.
흔히 스크린 독과점 같은 문제들이 이대로 방치된다면 한국에선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세대나 1970년대 미국 아메리칸 뉴시네마 세대가 일궈낸 예술적 성취들이 나오지 못하고 오직 ‘돈 되는’ 상업영화들만 즐비하게 될 것이라고들 우려한다. 그러나 모두들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1960~70년대엔 바로 그런 영화들이 ‘흥행영화’들이었단 사실이다.
페데리코 펠리니나 루이 말은 당시 당당히 흥행감독 반열에 올라있던 이들이고,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상영 시엔 관객행렬이 이어져 경찰이 극장 앞에 출동해 교통 정리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은 난해한 예술영화 취급받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의 마지막 탱고’ 등도 당시엔 모두 ‘돈 되는’ 영화들로 흥행 대성공작들이었다.
시대에 따라 ‘돈 되는’ 영화의 성격이 달라졌을 뿐, 영화산업은 그 어디서건 단 한 번도 상업성이란 틀 밖으로 벗어나 ‘당위’를 추구한 일이 없단 얘기다. 물론 상업성에 의해 예술작품의 생존이 판가름 나지 않던 시대도 있었다. 영화로도 제작된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엔 18세기 독일 오페라계 상황을 묘사한 재밌는 대사가 등장한다.
“‘피가로의 결혼’을 보다 황제가 한 번밖에 하품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황제가 3번 하품 하면 그 오페라는 그날 바로 문을 닫아. 두 번 하품하면 일주일 정도 상연되는데, 한 번 하품하면 그래도 9번은 상연할 수 있거든.”
자, 그 시절이 그렇게도 부러운가? /이문원 미디어워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