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증권가도 참 시끄러웠다.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에 힘입어 ‘박스피’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은 불과 몇 달 만에 실망으로 바뀌었다. ‘관치’는 금융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임기를 남겨두고 대형증권사 사장이 쫓기듯 자리에서 물러나는가 하면, 그 자리를 매우는 데도 잡음이 계속됐다. 또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사장을 비롯해 그 어느 해보다 증권사 사장의 움직임에 눈길이 가는 한해였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우리증시의 투톱답게 증시를 흔들었다. 삼성그룹이 상장에 잇달아 성공하면서 침체된 증시에 어느 정도 활력을 주기도 했다. 올 증시에서 꼭 기억에 남을만한 인물은 누가 있을까. <편집자 주>
◇증권가 ‘관치논란’ 부른 김기범 전 대우증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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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범 전 KDB대우증권 사장/사진=대우증권 |
지난 7월, 증권가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기범 전 KDB대우증권 사장이 임기를 8개월이나 남기고 돌연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 지난 2012년 6월말 취임한 김 전 사장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였다. 대우증권 측은 김 전 사장이 ‘일신상의 사유’로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고만 밝혔다. 하지만 구체적인 일신상의 사유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갑작스러운 사임에 더욱 의혹만 커졌다.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은 ‘실적 부진설’이다. 실제로 대우증권은 지난해 영업손실이 359억원을 기록하면서 적자전환했다. 이는 2012년 대비 영업이익이 1993억원 감소한 수치다. 중국고섬 관련 과징금 153억원을 비롯해 STX, 경남기업 부실에 따른 일회성 요인이 800억원 가량 발생한 탓이었다.
특히 코스피 상장 3개월 만에 거래정지를 맞았다가 상장폐지 당한 중국고섬과 관련한 상처가 컸다.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로는 지난해 대우증권에 중국고섬과 관련해 최고 수준의 과징금인 20억원을 부과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올 2월 금융감독원은 중국고섬의 상장 대표 주관사였던 대우증권에 ‘기관경고’라는 조치를 내렸다. 담당 임직원 14명에게는 정직·감봉 등의 중징계를 부과했다. 기관경고를 받은 증권사는 3년간 최대주주 자격 요건에 제한을 받는다.
대우증권은 헤지펀드 운용을 위한 자회사 설립이 제한되는 등 신규 사업에 제약을 받게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픈 것은 ‘도적적으로 해이한 증권회사’라는 오점이었다. 이때부터 김 전 사장이 자리를 보전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예측이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고섬 사태는 취임 전에 벌어진 일인데다 대우증권이 올 상반기 1255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릴 정도로 중국고섬 사태를 잘 매듭짓고 있었기 때문에 김 전 사장의 퇴임 사유로 ‘실적부진’은 부적절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래서 ‘산은지주와의 갈등설’에 무게가 실렸다.
김 전 사장은 취임이후 구조조정과 해외진출 등을 놓고 최대주주인 KDB산은지주와 갈등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사장은 증권업계의 불황에도 ‘고객과의 접점을 확대해야 한다’면서 점포를 확대하겠는 입장을 고수했다. 해외진출을 놓고도 이머징마켓(신흥국)에는 종합증권사를 육성하고, 선진국에선 자기자본투자(PI) 전문회사를 키운다는 김 전 사장의 전략에 산은지추 측이 리스크가 크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면서 갈등이 더욱 깊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사장 퇴임의 후폭풍은 거셌다. 후임 사장 선임을 위한 임시주총은 두 차례나 연기됐고 대우증권 노조는 산은지주와 청와대를 향해 ‘대우증권 경영에 간섭하지 말라’며 장외투쟁에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4개월 만에 홍성국 부사장(리서치센터장)이 신임 사장으로 선임돼 이달 12일 취임했다. 홍 사장이 어렵게 취임한 만큼 모든 논란을 잠재우고 대우증권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편 한국금융투자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김 전 사장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증시 달군 이재용 삼남매
올 하반기 주식시장은 지지부진한 흐름을 이어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양적완화 종료로 달러가 강세를 나타내 외국인 자금이 유출됐다. 여기에 저물가로 인한 디플레이션 공포에 일본의 공격적인 엔저 정책으로 국내 수출주가 압박을 받은 탓이다. 최근에는 국제유가 하락까지 겹치면서 코스피지수가 연중 최저점을 경신하기도 했다. 투자자 뿐 아니라 증권가는 우울함의 연속이었고 4000명의 증권맨이 여의도를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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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 삼남매/사진=뉴시스 |
우는 자가 있으면 웃는 자도 있는 법이다. 물론 이들은 평소에도 그다지 슬퍼하며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올해 주식시장에서 삼성SDS와 제일모직의 상장을 통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리면서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삼성의 힘’을 확인시켜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삼남매 얘기다. 야당에서는 특별법을 제정해 환수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날 정도로 이들 삼남매의 상장차익은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삼성은 지난 5월8일 삼성SDS의 연내 상장 계획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인 5월10일 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이재용 삼남매로의 승계 작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제일모직은 애초 내년 1분기에 상장 계획이 잡혀있는 상태였지만 이 회장의 사망설까지 나오는 마당에 상장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제일모직도 이달 18일 증시에 입성했다.
삼성SDS와 제일모직 공모주에 대한 투자자의 열기는 뜨거웠다. 저금리로 갈곳을 잃은 자금이 대거 몰렸다. 삼성SDS의 공모청약 규모는 약 1조1589억원이었다. 일반 공모 청약은 134 대 1의 최종 경쟁률을 기록했다. 15조5520억원의 증거금이 몰렸다. 상장 이후 순식간에 시가총액 상위 4위로 뛰어올랐고 주가는 공모가 19만원의 2배를 훌쩍 넘는 42만9000원까지 치솟았다.
제일모직 공모주 청약은 삼성SDS의 학습효과로 더 많은 뭉칫돈이 몰렸다. 삼성SDS보다 삼성그룹 지배구조 상단에 위치한데다 이 부회장의 지분율이 더 높다는 점이 투심을 자극했다. 제일모직의 일반 공모 최종 청약경쟁률은 194.9대 1, 청약증거금은 30조649억원에 달했다. 결국 일반 투자자에 배정된 1조5237억원을 제외한 28조원이상의 금액이 투자자에 다시 환불됐다.
삼성SDS에 이은 제일모직의 상장으로 이 부회장은 세계부자 순위 200위 명단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국내 주식 부자 순위는 아버지 이 회장에 이어 2위로 뛰어올랐다. 이 부회장의 여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도 주식 부호 순위 7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이 부회장 삼남매에 고운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제일모직(당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와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통한 편법 증여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일모직 CB 헐값 발행은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삼성SDS BW 발행을 통한 편법증여는 법원에서 그 불법성이 확인된만큼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 삼남매가 어떻게 자신들을 향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고 경영권 승계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초이노믹스’ 배당확대 압박 최경환 경제부총리
올해 증시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가 역적으로 몰린 사람이 있다. 그는 주식시장에 기업을 상장한 기업 오너는 아니다. 증권가에서 근무하거나 거액을 투자를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바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최 장관을 두고 증권가에서는 공식 취임이전부터 높은 기대감을 보였다. ‘초이노믹스’로 불리는 강력한 경기부양책에 힘입어 증시에도 훈풍이 불어올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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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사진=뉴시스 |
특히 초이노믹스의 핵심의 기업의 사내유보금 과세 방침에 증시는 상승으로 화답했다. 최 장관이 취임한 지난 7월 이후 주가지수는 가파른 상승세를 나타냈다. 7월30일 코스피지수는 2093.08까지 오르면서 조만간 장기간 지속됐던 박스권 장세를 벗어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줄을 이었다. 한 증권사는 초이노믹스가 성공하면 내년 코스지가 2500까지 오른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무엇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돼온 상장 기업의 낮은 배당이 해소될 가능성이 엿보여서다. 세계 주요국 가운데 한국 상장기업의 배당성향은 최저 수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코스피는 8~9월 등락을 거듭하면서 2000선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10월 들어서는 1900선 밑으로 주저앉기도 했다. 정부의 배당압박에도 국내 대장주인 삼성전자가 지난해와 같은 500원의 중간배당을 결정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현대차그룹이 10조5500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인수를 결정하면서 한국 기업의 불투명한 의사결정과 후진적 지배구조가 그대로 들어났다.
기업의 실적도 좋지 않았다.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은 4조600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60.5%나 줄었다. 현대차 역시 3분기 영업이익이 1조6487억원으로 전년동기 대비 18.0% 감소했다. 국내 증시 투톱인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실적부진 우려에 주가가 연일 약세를 나타내면서 코스피가 힘을 받기 어려웠다. 초이노믹스를 믿었던 투자자들은 갑작스런 주가하락에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외부 환경도 최 장관을 도와주지 않았다. 미국이 양적완화를 종료하면서 달러가 강세를 나타내 외국인 자금이 떠났고 일본 아베노믹스에 따른 엔저 여파로 국내기업이 수출에 타격을 입었다. 주가가 떨어지자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배당확대, 자사주매입 등 주주친화 정책을 잇달아 내놓았지만 코스피는 아직 크게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이달 18일에는 연중 최저점을 경신하기도 했다.
다만 초이노믹스가 실패했는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증시부양이 단기간에 그쳤다는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지만 국내기업의 주주친화 정책 강화에는 일정부분 기여한 것도 있어서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상무는 “초이노믹스로 증시에 배당정책이 화두로 등장하면서 삼성전자 등이 실제로 배당을 확대키로 했다”며 “초이노믹스가 주주친화 정책을 가속화시킨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미디어펜=김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