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원우 기자 |
오바마가 이상하다. 요 며칠의 모습은 별로 미합중국의 대통령 같지 않다. 심하게 말하면 어느 종편 채널의 정치논객 같다. 좋게 말하면 격의가 없고 나쁘게 말하면 품격이 없어졌다. 무엇이 오바마를 ‘미치게’ 만들었나? 정답은 북한이다.
발단은 김정은의 암살을 다룬 코미디 영화 ‘더 인터뷰’를 제작한 소니가 해킹을 당한 사건이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배후로 북한을 지목했다. 오바마는 한술 더 떠 아예 ‘주범’으로 북한을 지목했다.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검토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미국 대통령이 해킹의 가해자로 특정 주체를 콕 집어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바마는 ‘피해자’인 소니까지 탓했다. 지난 21일(현지시간) CNN과의 독점 인터뷰에서 그는 상당히 격앙된 표현을 썼다. 이번 사건을 ‘사이버 반달리즘’으로 규정한 그는 일개 민간기업인 소니를 비판하는 뉘앙스의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더 인터뷰’ 개봉을 취소한 소니의 결정을 “실수”라고 표현한 건 빙산의 일각이다. “부적절한 선례를 남겼다” “개봉 취소 결정 전에 상의했으면 좋았을 것” “만약 CNN이 해킹을 당하면 북한 관련 보도를 안 해야 하나?”등의 발언을 이어갔다. 직격탄이다.
|
|
|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CNN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당황한 소니 측은 “개봉하고 싶어도 극장주들이 꺼리고 있다”는 논리로 다급한 변명에 나서야만 했다. 결국 영화를 무료로 배포하는 대안까지 검토하는 등 진땀을 제대로 빼고 있는 형국이다. ‘역시 소니는 어쩔 수 없는 일본 기업’이라는 고정관념과도 싸워야 할 판이니 결코 대처하기가 만만찮을 것이다.
오바마가 마음 놓고(?) 발언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정치 9단 오바마가 단순히 감정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본다면 순진한 해석이다. 오바마의 자신감 넘치는 분노의 근본에는 북한 사이버 공격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일치단결된 혐오’가 깔려있다. 이 공분을 기초로 해서 오바마는 지금 미국인들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작품처럼 돼버렸지만 ‘더 인터뷰’는 사실 B급 코미디 영화일 뿐이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이 영화의 개봉 여부가 미국인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그렇다. 영화의 퀄리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미국의 가치’를 건드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를 보자. 이 조항은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방해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막거나,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를 방해하거나, 정부에 대한 탄원의 권리를 막는 어떠한 법 제정도 금지”하고 있다. 이른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조항으로 수정헌법은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북한이라는 이름의, 전 세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형적 집단이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린 것이다.
|
|
|
▲ 영화 '더 인터뷰' /사진=뉴시스 |
오바마는 여론의 과열을 의식한 듯 “전쟁은 아니”라고 표현했지만 미국 일각은 이 사건을 ‘사이버 진주만 폭격’으로까지 받아들이며 격분하고 있다.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은 “새로운 형태의 전쟁행위”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비례성(proportionality)을 고려하지 말고 반격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이 담론에 좌우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언론만 해도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이 일제히 북한에 비판적인 논조로 보도하고 있다. 영국 언론이자 속보 경쟁에 무심하기로 유명한 파이낸셜타임즈까지 북한 비판에 가담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 세계 누구도 북한을 편들지 않는다.
자, 이제 한국으로 건너오자. 미국의 분노는 우리의 영감을 자극한다. 우리에겐 좌우 구분 없이 일치단결된 분노를 이끌어낼 수 있는 대한민국의 공유된 가치가 있는가?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선고에 대해 ‘논쟁’이 발생하는 대한민국의 풍경은 우리에게 중차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헌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보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 세계가 북한에 분노하고 있는 지금, 한국 언론은 북한에 ‘박지원 특사’를 보내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언쟁을 벌이는 중이다. 명백한 북한의 사이버 공격에도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정작 북한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한국인들만 초점 잃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