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격차는 주로 자본의 보유량에 달려있다는 것이 피케티를 비롯한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하지만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면 자본 뿐 아니라 창의성, 아이디어, 기업가정신 등 부의 요인이 다양해서 빈부격차를 줄이는 효과가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사람들은 빈부격차의 원인을 자본주의에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경제원은 자유주의연구회, <역사 속의 격차> 발제를 통해 빈부격차가 커지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찰했다. 아래 글은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가 발표한 ‘빈부격차의 역사’ 발제문이다. 발제문은 (상), (하)로 나누어 소개한다. |
역사 속의 격차 : 빈부격차의 역사 (하), 근대와 산업혁명 시기에는 어땠을까
근대시대의 노예제도
근대에 와서는 서구인들에게 설탕과 목화를 공급해 주었다. 근대시대의 노예라고 하면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만을 생각하는데, 사실 백인들의 계약노예가 먼저 있었다.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정기적으로 항해하는 교통수단은 이런 백인 계약노예들을 수송하는 과정에서 발달했다. 1654~1685년까지 잉글랜드 남서부의 항구도시 브리스틀에서만 10,00명이 대개는 서인디아와 버지니아로 항해하는 배를 탔다. 1683년에는 백인노예들이 버지니아 인구의 1/6을 차지했다. 18세기에 북아메리카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한 인구의 2/3가 백인노예들이었다.
또한 같은 세기의 4년 동안 필라델피아에만 25,00명이 유입되었다. 식민시대 북아메리카의 백인노예 인구가 25만 명을 넘었다고 집계되었는데 , 아마도 잉글랜드를 떠난 이주인구의 절반에 달했고, 그들 중 과반수는 북아메리카 동부지역의 중부식민지들로 이주했다. 상업투기세력이 끼어들면서 대규모 인신유괴도 조장되었고, 급기야 런던이나 브리스틀 같은 대도시에서는 인신유괴가 정식사업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백인계약 노예들 이외에 죄수들도 역시 백인노동력의 또 다른 공급원이었다. “잉글랜드의 가혹한 봉건법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는 무려 300종이나 되었다. 예컨대, 1실링을 넘는 현금이나 5실링을 넘는 가치를 지닌 물건을 훔친 자, 말이나 양을 훔친 자, 귀족의 사유지에서 토끼를 밀렵한 자는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또한 옷을 훔친 자, 낟가리나 곡식창고에 방화한 자. 가축을 불구로 만들거나 도살한 자, 공직자들의 공무집행을 방해한 자, 법률을 오용하거나 남용한 자는 유배형이나 추방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1664년에는 부랑자, 불량배, 게으름뱅이, 좀도둑, 집시, 무허가 매음굴을 뻔질나게 들락대는 놈팡이 같은 자들을 모조리 식민지로 추방하자는 법안이 잉글랜드 국회에 제출되기도 했다.
1667년에는 3실링4펜스짜리 물건을 훔친 죄를 범한 아내를 사형 대신 추방형에 처해달라고 애원하는 탄원서가 법원에 제출되기도 했다. 1745년에는 은숟가락과 금회중시계를 훔친 절도범에게 추방형이 선고되었다. 1833년 흑인노예들이 해방된 지 1년 후부터 노동조합운동에 참가한 자는 추방형을 선고 받았다. 19세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진행된 초기 식민지개척도 죄수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죄수들을 각별히 경계한 경우는 드물었다. 죄수의 노동력은 식민정부가 공짜로 수입하여 정착민들에게 베풀 수 있는 사은품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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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6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한 영화 <노예12년>의 포스터 |
1640~1740년 잉글랜드에서 연발한 정치혼란과 미생불안은 계약백인노예의 공급을 증가시켰다. 잉글랜드의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1599~1658)의 군대에게 정복당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이전에 정복죈 아일랜드인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고 1661년에는 퀘이커교도들이 추방당했고 100파운드를 낼 수 있는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를 제외한 해외 각 지의 식민농장들로 추방당했다. 반란에 동참한 자들은 10년간 계약노예로서 복역하라는 판결을 받고 바베이도스 섬으로 보내졌다.
“계약백인노예들은 수송선의 콩나물시루처럼 비좁은 선창에 짐짝처럼 적재되었다. 미텔벨르거는 계약노예들에게 하나씩 배정된 개인침대의 폭은 60센티미터였고 길이는 180센티미터에 불과했다고 기록했다. 그들을 수송하는 선박은 작아서 비좁았고, 장기간 항해했으며, 냉장고도 없는 선박에서 배급되는 음식은 형편없고 비위생적이어서 그것을 먹은 자들은 병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1659년에는 계약노예 72명이 “말들과 뒤섞인 그들의 영혼마저 질식시키는 열기와 습기를 가득 머금어 찜통 같은” 선창에 갇혀 무려 5주일 반 동안이나 항해를 계속해야 했던 “이 살아있는 무덤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참상” 이었으며 “그토록 하찮은 이익을 쥐어짜내려고 똑같은 인간들을 그토록 참혹하게 다룰 정도로 인간성이 저열해질 수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고 썼다.
계약백인노예제도가 쇠퇴하면서 흑인노예제도가 시작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백인노동자의 노동력보다 흑인노예의 노동력이 월등하게 우수했다(79). 계약기간이 끝나 자유로워진 계약노예들은 소규모 자영농민들이 되어 미개간지에 정착함으로써 대부분 귀족주의자들로 구성된 식민농장주들의 사회에서 민주주위 세력을 형성했고 서부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개척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계약을 마친 계약노예들을 대체할 다른 계약노예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기 때문에 흑인노예에 관심을 가졌다. 흑인노예를 부리는 비용이 더 적었는데, 백인 한명을 10년간 계약노예로 부릴 수 있는 비용으로 흑인노예 한 명을 평생 부릴 수 있었다. 카리브해의 섬들은 대체로 열대지역에 속하지만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해풍에 노출된 그 섬들의 기후는 다른 열대지역의 기후보다 더 시원한 편이고, 연중온도도 거의 변하지 않되 섭씨 27도를 초과하는 경우가 드물다.
백인농민의 자영농장에서 백인농민을 쫓아낸 적은 기후가 아니라 노예농법이었다. 그 제도의 기원은 세 가지 농작물로 표현될 수 있다. 카리브 해의 ‘사탕수수’, 아메리카 대륙의 ‘담배’와 ‘목화’였다. 사탕수수, 담배, 목화는 대규모 식민농장과 저렴한 대규모 노동력을 요구했는데, 백인농민의 소규모 자영농장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1645년 바베이도스섬에는 소규모 자영백인농민 11,200명과 흑인노예 5,680명이 있었다. 1667년에는 그곳에 대규모 식민농장주 745명과 흑인노예 82,023명이 있었다. 1645년에는 그곳에서 무기 휴대 자격을 보유한 백인은 18,300명이었지만 1667년에는 8,300명에 불과했다. 자영백인농민들은 그런 대세에 떠밀려 파산해갔다. 백인남성인구가 2/5 넘게 감소할 동안 흑인인구는 무려 11배 넘게 증가했다.
1666년의 버베이도스섬은 그곳에서 사탕수수식민농업이 시작되기 전보다 7배나 더 부유해졌다고 추산되었다.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런 사회에는 오직 두 계급만, 즉 부유한 식민농장주계급과 억압받는 노예계급만 존재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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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영화 '노예12년' 스틸 컷 |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의 담배수출량은 1663~1699년에 6배 넘게 증가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생산비용을 절감시킨 흑인노예제도에 있었다. 1670년 흑인노예인구는 총인구의 1/12에 불과했지만 1730년에는 1/4로 증가했다. 노예제도는 식민지 경제생활을 든든히 떠받치는 토대로 변해갔다.
사탕수수가 없었다면 흑인노예들도 없었다. 흑인노예들이 해방되고 백인노동자 인구가 부족해지자 인디아는 아프리카를 대체했다. 동인디아인 145,00명을 수입했고 흑인노예들이 부족해진 쿠바 섬에서는 중국인 계약노동자들과 흑인노예들을 함께 활용하는 흥미로운 실험이 시도 되었다.
노예무역은 1783년까지 브리튼 외교정책의 기본목표였다. 스튜어트 왕조의 경제정책을 따라 노예무역은 왕립탐험회사라는 독점무역회사에 위임되었다. “흑인들을 꽉꽉 채우기” 90톤짜리 노예무역선 한 척에 390명을 싣거나 100톤짜리 한 척에 414명을 싣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25톤짜리 범선 한 척에는 인원 70명이, 11톤에 불과한 다른 범선 한 척에는 노예 30명이 실릴 예정이었다.
노예 1명당 고작해야 길이 168센티미터 너비 40센티미터로 노예각자에 허용된 공간은 1인용 관보다도 좁았다. 흑인 노예는 신대륙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들은 많은 노예들을 소유하고서 온갖 잡다한 일들을 시켰다. 그들은 양산 받쳐주는 노예들을 동반하고 다녔고, 여성들은 비단옷을 입은 흑인 노예 네 명을 가마꾼으로 썼다. 많은 흑인 노예들을 부리는 것이 권위를 과시하는 일이 됐다. 고관들은 흔히 10명 가까운 노예를 두었으며, 심지어 30명 이상의 노예들을 거느린 귀부인도 있었다.”
과거에는 어떻게 살다가 죽었나
앵거스 디턴(Angus Deaton)은 『위대한 탈출』에서 ‘과거에는 어떻게 살다가 죽었나’(82-96)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존재한 시간의 95페센트에 해당하는 수십만 년이라는 세월동안 사람들은 수렵 및 채집생활을 했는데, 음식 먹잇감을 쫓아 빠른 속도로 하루에 16~24밀로미터쯤 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를 줄이기 위해서 영아 살해 풍습도 있었으며, 신생아 중 약 20퍼센트가 첫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무리 대부분이 식량을 저장하지 않았으며 수렵채집 사회는 지배자 없이 유지되는 평등주의 사회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상 낙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른 무리와 맞닥뜨리는 경우 대부분 폭력이 발생했다. 물리적인 충돌이 벌어졌을 때 말리거나 중재하는 사람이 없었다. 충돌은 성인의 사망률을 높이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말라리아 같은 다른 전염병은 인간의 역사에 항상 등장했는데, 출생 시 기대 수명은 20~30년에 불과했다.
수많은 거대한 동물이 사냥으로 멸종됐을 때 에덴동산이 모습을 감추면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식물과 씨앗과 설치류 같은 더 작고 더 잡기 어려운 동물을 먹는 생활로 되돌아갔다.
불평등은 문명이 준 선물 중 하나였다. 농경 사회가 정말 더 나은 사회라고 한다면 더 나은 사회란 더 불평등한 사회다. 농경문화가 충적세가 시작돼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서 이전 시대 생활방식을 포기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부와 건강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발전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거대한 동물에서 작은 동물과 식물, 씨앗으로 먹을거리를 바꾼 이 농경 사회로의 전환은 더 정확하게 말해 수십년전 경제학자 에스더 보서럽(Esther Boserup)이 펼친 주장대로 갈수록 식량을 찾아 돌아다니기가 어려워지는 상황에 적응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갈수록 작아지는 씨앗에 기대는 삶보다는 농사가 더 나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찾아 돌아다니기를 단념하고 농부로 살면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생활로 돌아섰다. 일은 조금 하면서 신나게 놀고 철저하게 사냥을 즐긴 수렵채집인들이 자신의 삶을 농사라는 힘들고 단조로운 일과 자진해서 맞바꿨을 리가 만무하다. 농경문화가 확실하게 자리 잡은 뒤 수천 년 동안 기대 수명이 꾸준하게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영국의 역사 인구 통계학자 앤서니 리글리(Anthony Wrigley) 교구기록부를 가지고 연구했는데, 이 교구기록부는 약 1750년 이전에 대해 우리가 확보한 자료 중 단연코 뛰어난 기록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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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년간의 영국 귀족층의 기대 수명 /자료출처=그림 5 디턴 위대한 탈출, <도표 3> 92쪽 |
도표 내 점은 30년이라는 동일한 기간 동안 10년마다 한 번씩 영국 귀족층의 기대 수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1550년부터 1750년 무렵까지 공작 가문의 기대 수명은 일반 서민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낮았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한 사람은 흔히 사회적 지위가 낮고 가난한 사람보다 더 건강하기 마련이다.
도표가 말하는 첫 번째 가르침은 이 기울기가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며 최소 2세기 동안 영국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16세기 햄프턴 코트 궁에 살았던 헨리 8세의 신하들은 하루에 4,500~5,000 킬로칼로리를 섭취했는데, 페스트와 천연두를 유발하는 세균과 바이러스를 막거나 귀족 자녀의 목숨을 빼앗는 형편없는 위생수준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1550년부터 1750년까지 귀족 계층과 서민의 기대 수명을 비교한 도표는 기대 수명을 낮춘 요인이 영양실조가 아니라 질병임을 암시한다.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꾸준히 먹은 덕분에 귀족 자신이나 자녀들이 당시 유행한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1750년이 지나면서 귀족 계층의 기대 수명이 서민 계급과 같은 수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다가 1850년에 이르면 격차가 거의 20년까지 벌어진다. 대략 1770년 이후부터는 일반 서민의 기대 수명에서도 약간 증가하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기대 수명이 상당히 증가했으며 증가 추세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출생 시 기대 수명이 1850년에는 40세까지 상승했고 1900년에는 45세에 이르렀으며 1950년 무렵에는 70세 가까이 됐다.
종두라고도 부르는 천연두 예방 접종은 가장 중요한 의학적 혁신중 하나다. 천연두는 18세기 유럽에서 주요 사망 원인으로 꼽히는 질병이었다. 1750년 스웨덴에서 전체 사망자의 15퍼센트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1740년 런던에서는 세례 받은 사망자 천명당 140명이 천연두로 죽었으며 대부분은 어린아이였다. 종두법은 1799년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개발한 천연두 예방 접종(우두접종법)이다. 1800년 무렵 런던에서 세례 받은 사람 중 천연두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자연 재앙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
19세기 후반은 기상 악화로 인해 세계 각지에 극심한 재앙들이 들이닥쳤던 시기다. 1876년부터 1879년까지 무려 4년 동안 계절풍이 불지 않아 아시아 여러 지역에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가뭄이 들었다. 거의 1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가 가장 큰 피해를 보았지만 자바, 필리핀, 한국, 브라질, 남아프리카, 마그레브에서도 가뭄과 기근이 보고됐다.
1889년부터 1891년 사이에 다시 인도, 한국, 브라질, 러시아, 아프리카에 기근이 닥쳤다. 이때 수단과 에티오피아에서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고 한다. 다시 1896년부터 1902년에 열대 지방 전역과 중국 북부에 계절풍이 불지 않아 극심한 가뭄과 기근이 발생했다. 세 번에 걸친 이 재앙으로 전 지구적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적게는 3천만 명, 많게는 5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이런 현상이 지역 단위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난 일이며, 엘니뇨라 불리는 기상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확인됐다.
기근의 현장은 한 편의 지옥도를 연출했다. 1877년 인도 마이소르에서는 굶주린 여성들과 아이들이 들판에서 이삭을 주워 모으려다가 낙인이 찍히고 고문당했으며 코가 잘리거나 심지어 살해당했다. 폭도들은 지주들과 촌장들을 공격했고 곡물 창고를 약탈했으며, 심지어 가족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기까지 했다. 굶다 못해 정신이 이상해지면서 식인형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대 기록에 의하면 “미친 사람 하나가 무덤을 파헤쳐 콜레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을 먹었고, 또 다른 사람은 아들을 죽여 그 시체를 먹었다”고 한다.
1877년 중국 산시성의 참상 또한 말로 하기 힘들 정도다. 성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 해골이 길에 놓여 있었다. 평균적으로 봐서 크기가 큰 현은 10만 명에서 20만 명이 사망했고, 작은 현에서도 5만~6만 명이 죽었다. 시체를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커다란 구덩이를 파는 것이었다. 그 구덩이들은 오늘날에도 ‘만인묘’라 불린다. 죽은 아이들은 우물에 던져 넣었다.
사람들은 이웃들의 시신으로 연명했고, 사람고기가 노상에서 공개적으로 팔리고 있었다. 부모들이 친자식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아이들을 교환하여 잡아먹었다. 남편이 아내를 먹고, 자식이 부모를 먹었다.
그러나 이처럼 엄청난 재앙의 원인을 전적으로 자연재해에만 돌릴 수는 없다. 극히 일부지역만 제외하면 잉여 곡물이 정말로 한 톨도 없는 곳은 없다. 제국주의의 잔혹한 침탈에다가 최소한의 구호 역할을 하던 전통 마을 체제의 붕괴가 사태를 극단으로 몰고 간 것이다. 대흉년의 해인 1877~78년에 인도에서 유럽으로 선적한 밀은 32만 톤이라는 기록적인 양이었다. 소위 기아수출hunger export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유럽에서 일기불순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해로는 1692~94년을 꼽는다. 1692년 가을에 비가 많이 오고 추운 날씨가 지속되어 프랑스 전국에 대흉년이 들었다. 콩밭에는 굵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밀은 이삭에 적갈색 무늬가 생기며 말라죽는 병이 퍼졌다. 다음 해 봄에도 이런 날씨가 계속되어 비가 너무 많이 오고 기온이 크게 떨어졌다.
파리에서는 5월 한 달 중 19일동안 비가 왔고 기온은 평균보다 2도 이상 내려갔다. 8월이 되자 밀에 싹이 텄는데 그때 일시적으로 엄청난 더위가 몰려왔다. 9월에 다시 장대비가 계속 내려 결국 이해 농사는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2년 연속 흉작이 이어지자 파국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기근이 심하니 굶주린 사람들의 몸이 약해져 있었는데 티푸스나 괴혈병 같은 질병이 맹위를 떨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두 해 동안 프랑스에서 굶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의 수에 대해, 과거 자크 뒤파키에는 최소 160만 명, 르 루아 라뒤리는 200만 명 정도로 추산했으나, 최근 더 정밀한 자료 분석을 한 마르셀 라쉬베르 같은 학자는 283만 7천 명이라는 수치를 제시했다. 이 수치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사망자와 같은 수준이다.
그렇지만 17세기 프랑스의 인구는 20세기 초반에 비해 절반 수준이었고, 또 제1차 세계대전처럼 4년이 아니라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났다는 것을 감안하면 같은 수치라 해도 훨씬 더 심각한 의미를 띤다. 나폴레옹 전쟁,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심지어는 제2차 세계대전도 이처럼 단기간에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내지는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흉년의 상황이 얼마나 끔직한 일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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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7일 자유경제원에서 열린 자유주의연구회, <역사 속의 격차>의 전경.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
산업혁명의 노동문제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는 착취와 무질서로 얼룩져있었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사고파는 것이 용인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혹한 노동으로 착취를 당했으며, 잔인한 형법이 가난한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피의 법전’이라고 부를 정도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의 종류가 200여종이 있었다.
노상강도가 마차여행객들을 위협했으며, 광산과 공장의 근로조건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유아와 부녀자들이 공장에서 주로 일했는데, 유아의 경우 심지어 만 4세부터 일을 시켰다. 노동시간은 정해진 것이 없어서, 새벽부터 황혼까지(dawn to dust) 일을 했는데, 노동자는 비인간적인 기계장치의 톱니바퀴와 같이 공장에 편입되어 하루에 자그마치 14시간에서 때로는 16시간까지도 노동해야 했다.
1832년에 영국 의회가 노동실태를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바쁠 때는 새벽 세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무려 19시간을 노동에 시달렸으며, 이 장시간 노동 중에 휴식시간이라고는 아침식사 시간 15분, 저녁식사 시간 30분, 그리고 도중에 술 마시는 시간 15분이 주어졌다. 그 나마 공장청소는 아침 식사시간이나 술 마시는 시간에 하도록 되어 있어서 이 식사시간도 대부분 청소하면서 보냈다. 산업재해가 일어나면 보상은커녕 일자리에서 쫓겨났다.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슬럼의 상황은 더 열악해서, 맨체스터에서 평균수명은 17년이었는데, 이것은 유아 사망률이 50%를 넘는다는 의미이다. 1839년에 “the wynds"라고 불린 글래스고우(Glasgow)의 노동자 숙소에 관한 영국정부의 지방행정관 보고서에 의하면, 한 방에 15-20명의 남녀가 섞여있는데, 옷을 입은 자도 있고, 벌거벗은 자도 있었으며, 가구라고는 벽난로가 이곳이 사람이 사는 곳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라고 할 정도였다. 이들의 월급이 적어서 도둑질과 매춘이 이들의 주요한 수입원이라고 했다. 노예들의 비참함은 이보다 더했다.
누구보다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고발한 것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제1권)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주의 치안판사 찰턴(Broughton Charlton)은 1860년 1월 14일에 노팅엄시의 회의실에서 열린 집회의 의장으로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9세부터 10세까지의 아이들이 새벽 2, 3, 4시에 그들의 불결한 잠자리에서 끌려나와 겨우 입에 풀칠만이라도 하기 위해 밤 10, 11, 12시까지 노동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데 그들의 팔다리는 말라비틀어지고 신체는 왜소해지며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들의 인간성은 완전히 목석처럼 무감각상태로 굳어져버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그린하우스는 스토크-온-트렌트나 월스탠턴의 도자기 제조지역의 평균수명이 특히 짧다고 밝히고 있다. 스토크 지방에서는 20세 이상의 성인남자 인구의 36.6%, 월스탠턴에서는 30.4%가 도자기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이 연령에 속하는 성인남자 중 폐병으로 인한 사망자 총수의 반 수 이상[스토크 지방에서]과 약 2/5(월스탠턴 지방에서)가 도자기공이다.
위원회의 위원인 화이트(1863년)가 심문한 증인들 중 270명은 18세 미만, 50명은 10세 미만이었고, 10명은 겨우 8세, 5명은 겨우 6세였다. 노동일의 길이는 12시간으로부터 14, 15시간 사이였고, 야간노동이 진행되며, 식사는 그 시간이 불규칙할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경우인(燐)독이 가득찬 작업장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농업노동자들은 사나운 기후에서 하루 13~14시간의 노동을 그리고 또 일요일에도 4시간의 추가노동까지 해야 한다. 런던에서는 3명의 철도 노동자가 끔찍한 철도사고가 수백 명의 승객을 저세상으로 수송되었다. 사고의 원인은 철도 노동자들의 부주의다. 10~12년 전에는 그들의 노동은 하루에 8시간 밖에 계속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5~6년 동안 노동시간이 14시간, 18시간, 20시간으로까지 늘어났고, 또 행락철과 같이 특히 여행객이 몰릴 때에는 노동이 가끔 중단없이 40~50시간 계속된다.
맺으며 : 빈부격차가 자본주의 때문인가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와 다른가
극심한 빈부격차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에 대해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차이는 빈부격차의 원인이 자본주의 때문인가 하는 점과 민주주의를 위협할 정도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원인을 자본주의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완전히 이상대로 작동이 되고 있다면, 그리고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빈부격차 문제나 그 밖에 수많은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시장경제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그래서 빈부격차가 커지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사실 자본주의가 빈부격차의 원흉이라는 주장이 마르크스 이후에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사실 시장경제 때문이라기보다는 각종 특권과 이익의 보장을 만들어 내는 정치가 더 큰 문제이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선구자 브로델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별해서 사용했다. 그는 상인과 귀족과 같이 어떤 특별한 인적 네트워크에 의해서 경쟁을 제한하는 그러한 체제를 자본주의라고 불렀으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것을 자본주의의 이상적인 형태로 간주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 상인계층과 왕이나 귀족 등 권력자들이 유착한 역사가 있었지만, 오늘날 발달된 자본주의에서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브로델이 말한 시장경제를 말한다. 이로 인해 오늘날 주류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의어로 사용한다.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