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유행어 열전③] 통일은 자유민주적 의미에서만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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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정치인이 유행어를 만들었다고 하면 보통은 실언에서 기인한 ‘조롱형’인 경우가 많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이다”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는 데에서 일단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유행시키고 싶었던 말을 의도대로 유행시킨 ‘특별 케이스’다.
시작 날짜가 정확하다는 것도 이 유행어의 특이한 점이다. 1월6일이었다. 이날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예의 건조하지만 차분한 말투로 “통일은 대박”이라 말했다. 이 표현은 생중계 즉시 포털사이트 검색창을 접수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박근혜가 숨만 내쉬어도 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대박이 뭐냐’며 비판했다. 하지만 그런 강짜야말로 ‘통일’을 한국 사회의 진정한 유행으로 만드는 움직임의 일부였다. 그렇게 박근혜 취임 1년 만에 통일은 한국 사회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했다. 격세지감이었다.
사랑은 향기를 남긴다지만 통일은 현실의 책임을 요구한다. 말은 좋지만 ‘어떤 통일’인지가 문제였다. 평화통일인가? 흡수통일인가? 독일식 통일인가? 연방제 통일인가? 수식은 하나인데 미지수가 여러 개인 방정식처럼 통일에 대한 한국사회의 고민은 일단 그 접점을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이미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통일과 관련된 어휘들의 의미가 서로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2월25일 취임 1주년에 맞춰 출범한 통일준비위원회는 존재 자체로 통일에 대한 복잡한 고민을 표상하고 있었다. 정식 위원만 50명에 달하며 전문위원과 자문단까지 포함하면 150여명 규모가 되는 이 조직의 위원장은 다름 아닌 박근혜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에 기초해 꾸려진 이 기관에는 소위 보수-진보, 우파-좌파가 두루 섞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섞임 그 자체가 좋은 결과까지 담보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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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신년 구상 발표 및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민간부문 부위원장 정종욱 前 주중대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엄밀히 말하면 중도”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기도 했다. 중도(中道). 말은 좋다. 하지만 우리가 쟁취해야 할 통일이 과연 이 두 글자와 어울릴 수 있을 정도로 느슨한 것일까? 좌파 50명과 우파 50명이 같은 곳에 있기만 하면 균형은 자연스레 달성되는 것일까? 원칙 없는 중도 지향은 그저 시간만 낭비하는 갈지자[之] 행보를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3월28일,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통일대박’의 취지를 일면 무색케 만든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은 통일의 길이 생각보다 평탄치 않음을 시사했다. 현실은 결코 ‘선언’만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위해 우리는 얼마의 시간을 더 써야 할까.
다행히도 2014년 한 해 동안 국제사회의 움직임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엔총회의 북한 인권결의안 통과는 분명 역사에 남을 기점이었다. 더욱이 12월22일에는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북한의 상황’을 정식 논의안건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이날 회의에서 14번째 발언자로 나선 오준 UN 주재 한국대표부 대사의 발언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은 그저 ‘아무나(anybodies)’가 아닙니다.” 영어로 표현된 이 말의 한국적 의미는 어쩌면 남한 사람들에게 가장 생소한지도 모르겠다.
2014년의 끝자락에서도 정부는 알 수 없는 태도를 이어갔다. 통일준비위원회는 결국 아무 명분도 없는 ‘2015년 1월 남북대화’를 제의했다. 슬픈 건 이마저도 무시당했다는 사실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30일 통일준비위원회의를 ‘불순하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했을 뿐 대화 제의에 대해서는 반응이 없었다. 악수 하려다 뺨 맞은 꼴이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걸까?
분명 2015년은 류길재 통일부장관의 표현처럼 ‘광복 70년, 분단 70년’의 해다. 박 대통령 임기의 중간지점인 3년차에 가시적 성과가 나온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반가운 일이다. 허나 그것이 대한민국의 대박일지, 아니면 단순히 위정자들 자신의 대박일지를 따져봐야 한다.
급한 건 안팎으로 위기에 내몰린 북한이지 남한이 아니다. 원칙까지 포기해가면서 덩달아 급하게 움직이는 악수(惡手)를 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분명 통일은 대박이지만 자유민주적·헌법적 의미에서만 그렇다. 이 현실을 얼마나 굳게 새기느냐가 2015년 대한민국의 명운을 결정지을 것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