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뻥'으로 안 20대도 감동…"이 시대 금순이들을 위하여"

   
▲ 정소담 아나운서
지난 주말 대학생들을 위한 ‘멘토와의 만남’에 초대받았다. ‘멘토’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화제는 단연 영화 ‘국제시장’. 갓 스물을 넘긴 아이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해 일일이 감상을 물었다. 재밌었다고 했다. ‘너무’ 슬펐다고도 했다. 도리어 나보고 이 영화를 보고 울었냐고 묻는다.

말하자면, 운 정도가 아니다. 이북에 남기고 온 가족 생각에 들썩이던 외조부의 노구(老軀). 가슴에 거칠게 새겨진 그 장면이 눈물의 유일한 이유였던 것도 아니다.

폐허가 됐던 나라. 삼천리강산 곳곳의 숨결을 질식시켜버린 아픔. 가난과 전란의 세월을 지나온 역사. 민낯을 드러낸 조국의 ‘과거’ 앞에 나는 우두망찰했다. 이제는 ‘꼬부랑어’를 쓰는 내 딸과 다시는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없게 된 어머니의 지독한 운명 앞에 목을 놓았다.

그런데 ‘엉엉 울어버린 이십대’인 나도 이 영화를 보고 울 이십대가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너무’ 슬펐다는 후배들의 반응은 그래서 조금 의외였다. 물었다. 어떤 장면이 그렇게 슬펐냐고. 너희는 그 영화의 어느 지점에서 울게 되었느냐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피난민을 싣고 흥남부두를 떠나는 장면. ‘뻥’인줄 알지만 감동했단다. 이산가족을 찾는 방송 장면. ‘일부러’ 설정한 티가 나긴 했지만 마치 ‘진짜처럼’ 보여서 슬펐단다. 파독광부들이 타국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장면. 솔직히 애초에 어느 누가 그런 선택을 하겠느냐마는 사지를 오가는 주인공의 모습에 울컥했단다. 또 한 번의 우두망찰. 이 아이들, 이것이 우리의 실제 역사인줄 몰랐던 거다.

자, 이제 울지 않는 어른들에 대해 얘기해보자. 아니 이 영화가 불편해서 울고 싶은 지경인 어른들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기자는 ‘국제시장’이 순진해서 더 무서운 한 편의 ‘정치 영화’란다. 대체 어떤 병에 걸리면 이 영화를 정치 영화로 볼 수 있는 걸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던 영화 속 촌티 나는 청년이 故 정주영 회장임을 몰랐던 이들에게도 이 영화는 충분히 ‘오락적’이라는데 말이다.

눈물과 감동과 웃음이 모두 있는 괜찮은 ‘오락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왔다는 아이들. 역사의식도 없는 주제에 관객을 울리는 못마땅한 ‘정치영화’에 토가 나올 지경이라는 어른들.

이 대비(對比)는 어쩐지 영화의 한 장면과 묘하게 닮아 있다. 주인공 덕수가 혼자 방에서 울던 씬이다. 서서히 멀어지는 카메라는 거실에서 즐겁게 웃고 있는 덕수의 아들, 손주, 며느리를 동시에 비춘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다. 누군가는 ‘모르는 채’ 즐기고, 누군가는 ‘모르는 체’ 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폐부를 찌르는 대비다.

   
▲ 영화 '국제시장'

‘그들’의 말에 한 가지 동의하는 게 있다. 책임지지 않는 ‘시니어들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그로부터 고작 60여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아이들에게 이 모든 이야기가 그저 ‘뻥’인줄 알게 한 것. 폐허 위에 쌓은 피와 눈물의 역사를 픽션이라 믿게 한 것. 그 모진 세월을 겪고도 난 괜찮다며 당신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지 않은 것. 죄송하지만 정말 잘못하셨다. 이런 절대 ‘안 괜찮은’ 역사 앞에 오매불망 자식걱정으로 ‘난 괜찮아’를 입에 달고 사신 것도 마찬가지다.

소설가 복거일은 저서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에서 “우리의 모습을 다듬어낸 힘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6·25전쟁을 깊이 살펴야 한다”고 썼다. 누리는 풍요에 대한 감사는커녕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지경으로 젊은 세대의 역사관이 흩어진 건 바로 그 ‘난 괜찮아’ 탓인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잔소리를 할 때마다 우스개로 “보따리를 잘못 풀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참 듣기 싫어하시던 그 소리. 어쨌거나 삼천리 방방곳곳 새롭게 풀어진 보따리 덕에 오늘의 나도 당신도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전란의 폐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렇게 보따리를 풀었다. 한반도의 허리를 끊어 놓은 창상(創傷)들 위로 굽이굽이 새 희망을 풀었다. 그러나 생리사별의 찰나, 가슴에 들어 맺힌 그 한(恨) 덩어리야 하루라도 풀릴 날이 있었으랴.

파고를 넘어 ‘국제시장’은 1000만 관객돌파 초읽기에 들어갔다. 서울 하늘에는 그날의 흥남처럼 눈보라가 나린다. 흥행에 성공한 한 편의 수작, 그리고 굳세져야만 했던 이 시대의 서글픈 ‘금순이’들을 위해 오늘은 축배의 잔을 들어야겠다.

건배사는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 근사한 나라는 결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님을 이제 우리가 알고 있다고. 굳세야만 했던 그 짐은 그러니 이제 부디 내려놓으시라고. 모진 설움 받고서도 굳세야만 했기에 서러웠던, 이 시대의 모든 ‘금순이’들을 위하여! /정소담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