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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인파가 몰린 건 당연했다. 15일 오후 2시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포럼 ‘오늘’(공동대표 권오을‧조장옥)의 신년좌담회 ‘경제가 문제다’의 가장 큰 볼거리는 패널들의 화려한 면면이었기 때문이다.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 안국신 전 중앙대 총장, 이필상 전 고려대 총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진념 전 경제부총리를 한 프레임에 넣는 게 흔한 기회는 아니다. 대강당은 이내 입추의 여지도 없어졌다. 2009년 출발해 창립 7년차를 맞은 ‘오늘’ 포럼의 신년 경제토론회는 그렇게 흥행에 성공했다.
문제는 내용이다. 청중의 숫자가 토론의 질을 담보해 주진 않는다. 다수의 청중들이 모인 토론회에서 부적절한 내용이 융통될 경우 없느니만 못한 상황이 도출될 수도 있다. 15일 행사는 어느 쪽이었을까.
심상치 않은 첫 번째 장면은 행사 초반 정의화 국회의장의 축사에서 나왔다. 준비된 원고 대신 즉흥연설에 나선 정 의장은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수상가옥은 면했지만 고층건물까지 가지는 못한 건물’에 비유했다. 여기까지야 그럴듯한 얘기지만 문제는 대안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를 (국민소득) 5만 불, 7만 불 사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마 고민하셨을 겁니다. 제 결론은 ‘국민정신의 부활’입니다. 충효와 인의예지, 홍익정신 이런 것들이 다 스러져 가고 있습니다. 많은 교수님들, 석학님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하고 오신 분들이다 보니 인식이 미국화(Americanize)된 것이지요.”
정의화 국회의장은 1996년 신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국회에 입성한 5선 의원이다. 신한국당의 당명이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계속 금배지를 달았다. 국회의장 당선과 함께 당적을 내려놓았지만 세간은 여전히 그를 ‘보수’로 본다.
다선의, 그것도 보수로 이름난 국회의장의 위와 같은 역사 인식은 실망스럽다. 조선인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일말의 미풍양속을 재현할 필요가 있다는 걸 가볍게 언급하는 정도라면 모르겠으나 ‘인식의 미국화’는 너무 나간 것 아닌가. 그리고 조선인들이 어떻게 ‘국민정신 부활’의 대상이 될 수 있나. 조선/대한제국과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은 정체성 자체가 아예 뿌리부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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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15일 포럼 '오늘'이 개최한 신년좌담회 '경제가 문제다'에 참석한 패널들의 모습. 왼쪽부터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 안국신 전 중앙대 총장, 이필상 전 고려대 총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진념 전 경제부총리. |
거대한 노예사회라고 밖엔 말할 수 없었던 조선의 비극을 끝낸 건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화였다는 게 있는 그대로의 ‘역사’다. 수많은 질곡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그가 서구화를 이끌었다는 사실(史實)의 언저리에 있다. 살만해 지니까 다시 주자학적 ‘정신승리’로 돌아가자는 얘기인가.
정의화 의원은 1999년 한나라당 의원 시절 이승만 흉상 건립에 반대표를 던진 적이 있다. 이승만은 다 옳으니 무조건 무릎을 꿇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이런 현대사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도 당적이 새누리였기만 하면 ‘보수’로 분류되는 현실은 기이하다. 대한민국에서 보수란 누구이며 무엇인가. 누구로부터 무엇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인가.
축사 이후 시작된 토론회에서도 뿌리 깊은 주자학의 잔상은 끝내 걷어지지 않았다. 맹자의 항산(恒産)/항심(恒心)이 나온 것은 이제 정해진 수순이 됐지만 ‘분배 정의’ ‘경제민주화’ 등의 구호 또한 대다수 패널들 사이에서 이미 상식이었다. 경제를 경세제민(經世濟民), 그러니까 왕이 백성들을 구한다는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선비적 사고방식이다.
정운찬 前 국무총리는 발언권이 있을 때마다 또 다른 선비정신이라 할 수 있는 ‘동반성장’을 홍보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맡은 바 책무에 성실히 임하는 자세야 나무랄 게 없겠지만 역시 문제는 내용이었다.
“동반성장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더라도 한국경제의 극복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경제학자보단 정치가 같았다. “경제 전체의 파이를 크게 하되 분배구조는 고치자”는 이 한 문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요구될 것인가.
정운찬은 노동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는 ‘잘 모르는 분야’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비정규직의 비율과 급여수준을 법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시장 원칙에는 어긋날지도 모르지만…”이라 말하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시장 원칙을 버릴 수 있는 경제학자, 건국 대통령의 업적과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5선 의원. 이들이 함께 모여 한국경제의 미래를 말한 토론회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해서 슬프게’ 다가왔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