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드라마로 재탄생 골든글로브 수상…창조계보가 TV산업의 희망

   
▲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영화 '파고'가 TV 미니시리즈 드라마 '파고'로 변신해 골든글로브 상을 거머쥐었다. 지난 11일 할리우드베버리힐즈에서 있었던 제7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미드 '파고'는 TV 미니시리즈 부문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주연 배우 빌리 밥 손튼은 연기상을 받았다. FX네트웍스가 만든 이 드라마는 1996년 코엔 형제의 동명 영화를 드라마로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이날 상을 받은 크레이터 노아 홀리는 코엔 형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1996년 제작된 영화 '파고'가 각본상(에단 코엔, 조엘 코엔), 여우주연상(프란시스 맥도맨드) 등 2개 오스카상을 탔으니 동일한 제목으로 스크린과 TV에서 각각 잭팟을 터뜨린 진기록이기도 하다.

18년 간극을 가로지른 콘텐츠 '파고'를 접하면서 현재 오아시스도 없는 무자비한 사막에 고립되어 허덕이는 TV산업을 살릴 한 줄기 빛을 감지할 수 있다.

첫째 서광은 제작사 FX네트웍스 도전이다. 이 프리미엄 유료 TV 채널 사업자는 1994년 모기업 FOX의 확장(extended), 효과(effects)라는 중의적 의미로 만들어진 미디어 브랜드다. FOX는 영화 메이저인 21세기 FOX에서 나온 파생 브랜드로서 지금은 미국 빅 4 지상파 방송사이자 CNN을 압도하는 뉴스 부문 1위 채널 FOX 뉴스로도 저명하다. 이 FX네트웍스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른바 오리지널 프로그래밍을 선보인 2002년부터였다.

   
▲ 영화 '파고'.
당시 자체 제작으로 모든 저작권을 행사하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TV 채널이라고 하면 단연 타임워너 그룹의 HBO 독주체제였다.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꼽히는 미니 시리즈 '섹스 앤드 시티, 1998~2004', '소프라노, 1999~2007', '식스 핏 언더, 2001~2005', '로마, 2005~2007'  등이 죄다 HBO 콘텐츠들이었다. 바벨탑과 같았던 독무대에 아성을 내민 도전자가 FX네트웍스다. 넘버 2의 챔피언 도전기는 줄기차게 이어져 마침내 2014년 드라마 '파고'로 챔피언 벨트를 획득하게 되었다.

FOX 그룹의 드라마 '파고'나 애니메이션 명품 '심슨가족' 위력은 단연 자체 고유제작물을 뜻하는 오리지널 프로그래밍 또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에서 나온다. 짧게 보면 독자 제작이지만 크고 넓게 보면 독창성을 인정받는 문화콘텐츠 창조다. 여기서 TV라는 미디어 기업이 가야 할 ‘자기다움’ 은 결국 콘텐츠 창조에 있다는 철칙을 확인할 수 있다.

미드 '파고'가 보여주는 둘째 서광은 킬러콘텐츠 제작시스템에 관한 창조계보다. 한낱 도시 이름에서 따온 '파고(Fargo)'가 먼저 영화로 시작했다가 약 20년 후에 TV 미니시리즈물로 재창조된 계보(genealogy)에 주목해야 한다는 얘기다. 맨 처음 영화발명자 뤼미에르 형제를 연상할 만큼 천재적인 영화작가와 감독 코엔 형제가 '파고'를 내놓았을 때 뭔가 마성적인 힘에 사로잡힌 동료나 후배들이 사뭇 많았을 터이다.

코엔 형제들을 기준으로 볼 때 영향을 받은 선배와 스승들이 있고 영화 '파고' 이후에 영향을 끼친 숱한 후속 창작자들이 존재하는데 이런 영향력(influence) 흐름을 특별히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콘텐츠산업에서는 창조계보(creativity genealogy)라고 부른다. 이 창조계보 번식과 확장이 곧 한 나라, 한 지역, 한 미디어 기업 성패를 갈라놓는다.

예를 들어 디즈니가 픽사를 길렀고 픽사는 막강 경쟁사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곁에 두고 또 다른 갈래로 마블 엔터테인먼트와 결합해 초대형 블록버스터 '어벤저스'를 탄생시킨 흐름이 대표적 창조계보다. 아주 큰 스케일로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하는 창조계보도 이따금 큼직하게 나타난다.

조지 루카스 영화 '스타워즈'다. 루카스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저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등에 심취해 영웅 캐릭터와 서사구조를 확립했고 개인적 추앙 대상이었던 일본 애니메이션과 구로자와 아끼라 영화로부터 검술과 ‘제다이’ 같은 표현을 차용했다.

구로자와 아끼라의 경우 대표작 '7인의 사무라이, 1954'가 이후로는 '황야의 7인, 1962' , '석양의 무법자, 1967' 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에서 재창조된 건 영화사의 유명 사례다. 심지어는 만주 웨스턴을 지향한 한국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물론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 스스로가 전통 사무라이 활극 종류를 온전히 창조한 게 아니라 그 자신 역시 개인적 감화를 받았던 19세기 이탈리아 근대 판타지 소설로부터 관통하는 거대한 창조계보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 영화 '파고'.
이 같은 창조계보가 '파고'에서 보듯이 비교적 신속하고도 성공적으로 꽃피울 수 있었던 요인은 그만한 제작시스템을 작동시켜주는 텃밭인 클러스터에 있다. 산업 집적지를 의미하는 클러스터는 IT, 바이오, 의료 등 여러 종목에서 기능하고 있는데 '파고' 사례는 다름 아닌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산업 클러스터 산물에 해당한다. 이번 미드 '파고'의 파괴력이 2009년 금융위기 이후로 내내 기진맥진하던 할리우드를 되살려놓았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로 히트작 한 편과 할리우드와 관계는 밀접하고도 건재하다.

문제는 우리에게 왜 '파고' 같은 스타콘텐츠 명맥이 그야말로 온전하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느냐다. 우선 FX네트웍스 도전에 필적하는 시도가 없었다. 지상파 특공대로서 계열 채널이 선전한 경우가 한국에 없다는 사실이 현재 암흑기로 접어든 TV 미디어산업 패퇴 원인이 되어버렸다.

지상파 계열 채널은 지상파 3사계열의 케이블 채널로, 현재 KBS드라마, KBS 조이, KBS프라임 등 KBS계열 6개 채널, MBC드라마, MBC스포츠, MBCnet 등 MBC계열 6개 채널, SBS Plus, SBSE!, SBS ESPN등 SBS계열 7개 채널 총 19개에 달할 정도로 많다. 한데 이 가운데 오리지널 프로그래밍 또는 오리지널리티를 철학으로 추구하는 FX네트웍스나 HBO 같은 채널은 단 하나도 없다.

지상파 본사에서 만든 드라마, 예능을 가져와 재탕 삼탕 하고 프로야구 중계권 거머쥐는 행태 말고는 보여준 장기가 거의 없다. 혁신 없이 진격하는 선단식 경영 악습이 여전히 반복되는 한국형 TV 미디어산업에 쳐 박혀 있을 뿐이다.

둘째로 체크했던 창조계보에 관해서도 우리 한국형 TV 미디어산업은 어리숙한 도리질만 해왔다. 한류를 대표하거나 한국 영화, 드라마 콘텐츠 제작기지를 브랜드화한 클러스터 하나 없다는 게 좋은 증명이다. 한국판 할리우드가 없으니까. 영화의 충무로는 오래 전에 소멸되었고 드라마의 여의도는 뿔뿔이 흩어져 있다.

영화 기지도 없고 드라마 기지도 구심점이 없다보니 할리우드처럼 영화와 드라마, 실험적 콘텐츠가 꿈틀댈 여건이 못 된다. 때문에 한류 명작 '엽기적인 그녀, 2001'나 '겨울연가, 2002', '대장금, 2003'을 이어받아 영화가 드라마에게 드라마가 영화에게 서로 주고받고 친하게 지내며 뭔가 재창조해 나가는 효시가 나올 수 없었다.

이런 면에서 이번 골든글로버상에 빛나는 미국 드라마 '파고'의 성취가 몹시도 부럽다. 영화에서 따온 창조계보 역작 시라마(시네마+드라마) 성공이 전 세계 TV미디어 산업의 암초로 불거진 코드 컷팅(cord cutting : 유료방송과 TV 본방 자체를 끊고 모바일 등 디지털 서비스로 전환하는 현상)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작년만 해도 각자 수백억 원씩 적자 더미를 쌓은 한국 지상파 3사 역시 이 거대한 암초 코드 컷팅을 막느냐 못 막느냐에 명운이 걸려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 지상파 방송사들도 절실한 이 시기에 꼭 직시했으면 한다. 미드 '파고'가 보여준 지상파 TV의 전사적 도전과 노력. 그 속에서 빛난 콘텐츠 오리지널리티 중요성, 창조계보, 클러스터의 가치를. 이들 변치 않는 가치만이 한국민의 오랜 친구 지상파 미디어들이 ‘자기다움’을 회복하고 퀄리티 미디어로서 소생하는 지름길이라는 교훈을.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