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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글쓰기에 대해 얘기하는 건 늘 부담스럽다. ‘블랙스완’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다음 한 마디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가 남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그는 실패한 작가다.”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中
그렇다 해도 글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일은 상당히 재미있다. 더구나 자유주의의 입문 서적이라 할 수 있는 미제스의 ‘자유주의’와 글쓰기에 대한 얘기라면 더욱 그렇다.
이 책에는 거장 미제스 사상의 정수가 들어있을뿐더러 개인(個人)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관점, 정치에 대한 중요성 환기, 물질과 정신에 관한 고민 등 수많은 통찰이 담겨 있다. 이 글에서는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일련의 포인트들을 ‘자유주의적 글쓰기’와 연관 지어 논의한다.
‘나’와 ‘필자’와 ‘우리’ 사이
글을 쓰는 사람은 몇 가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시점’이다. 누구의 눈으로 글을 전개할 것인가. 소설의 경우 1인칭 주인공/관찰자 시점, 3인칭/전지적 시점 등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칼럼이나 논문의 경우 1인칭으로 전개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별다른 선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계에도 나름 중차대한 선택지가 존재한다. 주어를 1인칭 단수(나/필자)로 가져가느냐, 1인칭 복수(우리)로 가져가느냐의 선택이다.
우리가 은연중에 자주 쓰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우리’다. 글 안에서 주어로 등장하는 이 ‘우리’라는 단어에는 상당한 힘이 있다. 필자가 순식간에 독자를 자신의 영역으로 포섭시켜버리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유주의자(Libertarians)가 이와 같은 ‘우리’의 사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다. 미제스는 ‘자유주의’에서 일관되게 개인(individuals)의 가치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17~18세기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개인주의 도덕 철학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철학적 토대를 밝히지 않더라도 자유주의자들은 늘 자기만의 외로운 길을 추구해야 하는 운명을 떠안고 있다. 심지어 미제스는 이런 말도 했다.
“저술은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의견의 불일치가 그 원칙이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고 듣기 원하는 것만을 되풀이할 뿐인 저술가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못 된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혁신자, 반대자, 미개척 분야의 선구자, 즉 전통적인 기준들을 거부하고 낡은 가치와 관념을 새로운 것으로 대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반드시 반독재/반정부적이며, 대중들이 책을 사주지 않는 저술가이다.”
- 루드비히 폰 미제스 ‘자본주의 정신과 반자본주의 심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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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1일 개최된 '자유주의 12시간 완전정복 프로그램 1기' 프로그램 |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은 배척당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 필자는 과연 ‘우리’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잡을지를 결국 선택해야만 한다.
이는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감각하면서 집필에 임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선택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선택 속에서 분명한 의사 판단을 해둔다는 의미 또한 담겨 있다.
자유주의 필자는 그 자체로 특별하고 독특한 존재지만 결코 스스로를 ‘나’만의 원 안에 가둬두어서도 안 된다. ‘나’와 ‘우리’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야말로 자유주의적 글쓰기가 통과해야할 첫 질문인지도 모른다.
‘공동체’는 필요악인가?
철학적 질문은 이어진다. 2인 이상이 구성하게 되는 ‘우리’는 공동체의 영역이다. 자유주의자는 공동체의 영역을 어디까지 허락할 것인가?
미제스, 나아가 자유주의 사상은 그 자체로 모든 개인들의 “내 멋대로 해라!”를 지지한다. 그것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 과정에서 미제스를 비롯한 자유주의 거장들은 공동체를 끊임없이 미분해 ‘1인의 영역’을 강조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1인’의 힘으로 가능할까? 자유주의자는 어디까지의 ‘공동체’를 지지할 수 있을까.
이 논제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Conservatives)들의 오랜 논쟁 지점이기도 하다. 보수주의자들 역시 개인의 가치를 강조하지만 그들은 가정(home)에서 국가로까지 뻗어있는 공동체의 가치 또한 중시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 또한 공동체를 구성해서 활동하지 않느냐’고 짓궂게 묻는다. 자유주의자들은 ‘기준이 뭐냐’고 되묻는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지역 공동체는? 국가는? 나아가 세계정부는? 복잡다단한 공동체들의 형태와 가치는 자유주의 필자들에게 어디까지의 공동체를 용인하고 연합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의 글에 명료하고 일관된 맛을 내고 싶다면 반드시 결착이 나야할 물음이기도 하다.
올바른 ‘말’을 찾아서
이외에도 자유주의 필자가 해야 할 고민들은 많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어인 경제와 economy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democracy는 과연 ‘민주주의’로 번역돼도 좋은가? 비하적 의미로 명명된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과연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언제나 비주류의 처지를 감내해야 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하는 단어들에 대해서도 조용한 고민을 이어가야만 한다. 주로 물질(物質)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보편적 분위기지만, 필자들 각자의 ‘정신’을 글 안에 담으려는 노력 또한 치열하게 진행돼야만 한다.
‘자유주의’를 비롯한 미제스의 저작들에는 그의 조용하고 뜨거운 고민들의 궤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자유주의자의 길을 선택한 당신은 어떤 글쓰기를 해 나갈 것인가?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