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종로 한복판을 오근태가 슬렁슬렁 걷고 있다. 짝사랑하던 민자영이 우산 사이로 불쑥 들어온다. “미도파 백화점 까지만 데려다줘”라는 말에 그는 심장이 터질것만 같다. 자신도 모르게 백화점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늘이 감동했는지 진짜로 미도파 백화점이 저만치로 멀어져버렸다.
‘쎄시봉’은 1960년대와 70년대 전성기를 누리던 어른들의 동화같은 영화다. 당시 추억을 떠올리는 중장년 관객에게 몇 시간이나 수다를 떨어도 끊이지 않을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러나 젊은이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노래는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사랑까지는 쉽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영화는 활력이 넘친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의 주요 히트곡과 당시 인기있던 팝송들이 넘쳐흐른다. ‘딜라일라’를 부르는 조영남(김인권)의 몸짓은 지금과 다를 바 없이 흐물거리면서도 유쾌하다. 정우와 강하늘 등 핫한 브라운관 스타들의 잘생긴 외모에 감탄하다 능글거림에 피식 웃는다.
쎄시봉의 뮤즈 민자영(한효주)과 오근태(정우)의 사랑이야기도 구렁이 담 넘듯 매끈하다. 민자영이 갑작스럽게 오근태의 우산 속으로 들어오던 순간부터 충무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까지. 딱 거기까지만 매끈하다.
인물간 대립이 발생하는 시점부터 ‘쎄시봉’은 전혀 다른 장르로 전환된다. 초반의 흥겨운 분위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신파 멜로가 자리를 메운다. 마치 경부고속도로 신갈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탄 느낌이다.
오근태와 민자영의 갑작스런 이별, 그리고 20년 뒤 등장하는 ‘쎄시봉 대마초 사건’의 진실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아! 하는 탄식보다 어? 하는 당혹감만 남는다. 모든 갈등의 시발점인 ‘민자영의 심경변화’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땐 그랬지 하고 넘기기에는 시대가 흘러도 너무 많이 흘렀다.
이런 점 때문에 영화는 1막과 2막을 나눠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2부작 특집드라마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밝고 경쾌했던 그때 그시절 쎄시봉 이야기, 신파의 극치를 달렸던 70년대 첫사랑 이야기, 시간이 흐른 뒤 쎄시봉 공연 한번으로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이야기로 흐름을 뚝뚝 끊어버린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쎄시봉’은 기어코 뭔가를 남긴다. 영화는 마지막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오근태와 민자영의 미소짓는 얼굴을 비춘다. 옛 사랑의 기억도, 그리고 시련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추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이런 점으로 인해 ‘쎄시봉’은 중년 관객에게 안성맞춤이다. 노래에 대한 향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관객에게는 이야기의 허술함도 감싸안을 수 있는 추억이 남는다.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에 3040세대가 열광했던 것과도 같다. 한 30년이 흐른 뒤 지금의 10대와 20대가 대형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을 소재로 한 첫사랑 영화를 보면 이런 느낌일까…. [미디어펜=최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