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이 지속적으로 주최하고 있는 기업가연구회는 자유주의 학자 및 저술가 20여 명이 모여 발족한 모임이다. 한국 경제의 근간이 되는 기업가들의 업적을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업가정신과 시장경제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허영인 SPC 그룹 회장에 대한 연구는 송헌재 서울시립대 경제학과 교수가 맡았다. 송 교수는 발제문을 통해 “국경과 언어, 문화를 초월한 진취적인 도전으로 행복한 맛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하며 가장 사랑 받는 글로벌 기업이 되고자 하는 허영인 회장의 기업가 정신에 주목해야 한다. 파리바게뜨의 성공은 허 회장 기업가 정신의 자그마한 예이다”라고 소개했다. |
SPC그룹의 모태는 동네 빵집이었다
SPC그룹의 모태는 허영인 회장의 아버지 허창성씨가 1945년에 황해도 옹진에서 시작한 작은 동네 빵집이다. 허창성씨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보통학교 졸업 후 진학을 포기하고 제과점에 점원으로 취직하였는데 이 시절에 배운 제과기술을 바탕으로 24세 때 '상미당(賞美堂)'이라는 제과점을 차리고 운영을 시작하였다. 당시 옹진에 미군이 주둔하여 설탕, 버터 등의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재료에 엿을 혼합해 빵과 과자를 만들어 인근 각처의 시장에 팔았다.
옹진에서 장사가 잘 되자 아무래도 빵과 과자의 수요가 많은 서울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한 허창성씨는 상미당을 1948년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 을지로 방산시장으로 옮겼다. 황해도 옹진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수요를 찾아 과감하게 이주를 결심한 것이다. 기업은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발전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위기가 찾아와 문을 닫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이때의 허창성씨의 결심이 오늘날의 SPC라는 프랜차이즈 그룹의 탄생을 가져온 시발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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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인 SPC 그룹 회장은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에 관한 동반성장위원회의 권고를 세계로 나가는 발판으로 삼았다. 사진은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지난 2013년 11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싱가포르 정상 공식 만찬에 참석한 모습. /뉴시스 |
이 당시에 서울에는 제과업체가 이미 10개도 넘게 있었다. 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허창성씨는 중국인들이 호떡을 굽는 가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가루연탄을 이용한 '무연탄가마'를 고안해냈다. 이 가마는 기존에 연탄을 사용하는 가마와는 달리 비용이 싼 가루연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빵의 생산원가를 대폭적으로 절감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경쟁업체보다 빵과 과자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게 되자 상미당의 빵은 소매상들에게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소비자들도 이전보다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빵을 사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만일 허창성씨가 지역 시장만을 바라보고 옹진에 안주하여 서울로 이전하는 결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무연탄가마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무연탄가마의 탄생은 시장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위한 기업가의 혁신적 마인드가 일구어낸 결과이다. 이렇듯 기업이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경쟁이 발생하고 경쟁은 기업의 혁신을 일구어내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의 후생을 증가시킨다. 상미당의 무연탄가마는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크림빵과 호빵의 탄생
1950년 한국전쟁이후 인천과 용산 등으로 회사를 옮겨 가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상미당은 1963년 서울 신대방동에 공장을 세워 공장 빵 생산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시절 탄생한 것이 바로 '크림빵'이다. 크림빵은 이전에는 한국에 없었던 새로운 빵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964년부터 생산된 크림빵은 2012년까지 16억 개나 팔렸다고 하니 그 인기가 실로 대단해 보인다. 기업의 성장은 절대로 저절로 이루어지 않는다. 소비자들의 잠재된 욕구를 파악하여 새로운 시장수요를 발굴하고 이를 제품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장이라는 과실을 맛볼 수 있다. 크림빵의 탄생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크림빵과 견줄만한 히트 상품으로 “호빵”을 들 수 있다. 호빵은 겨울용 빵으로 개발되어 1971년 10월에 처음 출시되었는데 그 당시 겨울은 제빵업계에서 비수기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기존 시장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제품을 내놓아 공전의 히트를 친 호빵은 시장을 아예 새롭게 창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호빵의 명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서 아직까지 그 이름 그대로 판매가 이루어지는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SPC 그룹의 전신 “샤니”
상미당은 공장 빵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회사 이름을 삼립산업제과(1959년)에서 삼립산업제과공사(1961년)로 바꿨다. 이어 삼립산업제빵공사(1966년)를 거쳐 삼립식품공업(1968)에 이르게 된다. 삼립식품공업은 주한미군에 빵을 납품하는 군납업체로 이름을 올리며 빠르게 성장했다.
삼립식품은 1960년대 후반부터 고려당과 태극당, 뉴욕제과 등 새로운 경쟁자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경쟁회사들은 경제개발로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소비자들이 공장 빵보다 맛있고 질 좋은 고급 빵을 찾는 것을 주목하고 시장을 파고들었다.
이에 따라 허창성 사장은 1972년 케이크 등 고급 빵을 생산하는 한국인터내셔날식품(현 샤니)을 세웠다. 직영 판매점인 '샤니의 집'을 세우는 등 샤니를 통해 고급 베이커리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후 회장으로 취임한 허창성씨는 장남에게 삼립식품을, 차남에게 샤니를 물려주었다. 이 가운데 샤니를 물려받은 차남이 바로 현 SPC그룹의 허영인 회장이다.
1983년에 샤니를 물려받은 허영인 사장은 이를 기반으로 제빵왕국을 세우기 시작했다. 허영인 사장은 당시 소비자 취향이 고급화되는 것을 감지하여 기존의 공장 빵만으로는 시장을 넓히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1984년 '후레쉬나'라는 베이커리 점포를 열었다. '후레쉬나'는 '샤니의 집'과 달리 처음으로 매장에서 직접 빵을 구워 팔며 신선한 이미지로 소비자들을 공략했다. 소비자들의 소비욕구의 변화에 발맞추어 기업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나가는 허영인 사장의 방식이 선대의 허창성 회장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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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바게뜨, 2014년 크리스마스 시즌제품 출시. /사진=파리바게뜨 제공 |
'파리바게트’의 탄생
허영인 사장이 사업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1986년 서울 반포동에 처음 문을 연 '파리크라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파리크라상은 '후레쉬나'를 뛰어넘어 프랑스풍의 정통 고급 빵을 즉석에서 구워내 판매한다는 고급화 전략을 내세웠다. 이후 '파리크라상'을 독립 기업으로 발족시킨 뒤 1988년에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 때 탄생한 브랜드가 바로 '파리바게트'이다.
파리크라상이 가맹점 사업에 뛰어들 무렵 업계 1위는 '크라운베이커리'였다. 파리바게트는 크라운베이커리의 생크림 케이크를 벤치마킹한 뒤 아예 매장에서 빵을 직접 굽는 베이크 오프 방식을 홍보수단으로 삼았다. 즉, 프랜차이즈 본부가 굽기만 하면 되는 생지를 가맹점에 제공함으로써 가맹점주에게는 재고의 부담을 없애고, 최종 소비자에게는 바로 구워낸 신선한 제품을 판매한다는 전략을 취하였다. 이 시스템은 제과 시장의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사업가들은 특별한 제빵 기술 없이도 신선하고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제과 시장에 쉽게 진출 할 수 있었다. 갓 개점하는 점포의 자본 비용과 노동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경쟁자의 장점을 충분히 분석하고 이를 뛰어 넘는 새로운 전략을 새우는 것이야말로 성공하는 기업의 전형이다. 허영인 사장은 이러한 시장원리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파리크라상은 사업 9년만인 1997년 업계 1위에 올랐다. 당시 파리바게트의 가맹점 수는 600여개로 프랜차이즈 업계 최다였다. 허영인 사장은 고려당과 신라명과, 크라운베이커리 등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제과점 브랜드인 파리바게트를 독보적인 1위로 올려놓았다.
SPC 그룹의 탄생
허영인 사장은 샤니로 독립하기 이전에 삼립식품 사장 시절 1981년에 미국의 제빵학교인 AIB (American Institute of Baking)로 유학을 떠난 적이 있다. 사장으로 취임한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당시부터 허영인 사장은 세계 시장 진출을 꿈꾸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인의 입맛을 뛰어넘어 전 세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빵맛을 만들어내고 이를 체계화된 방식으로 판매하기 위해서는 선진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떠났다고 한다.
사장에 갓 취임한 상태에서 해외로 연수를 떠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기업가는 언제나 시장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구상해야 하는데 이를 실천하기 가장 좋은 때가 아마도 기업의 경쟁력이 높은 시점일 것이다.
어느 정도 시장점유율이 확보되어 안전장치가 마련된 상태에서 미래를 위한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기업가들이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성공한 기업은 성장을 위한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허영인 사장은 시장경제의 경쟁의 압박과 이를 이겨내기 위한 끊임없는 혁신의 필요성을 몸소 체득한 기업인으로 여겨진다.
허영인 사장의 미국연수는 결과적으로 현재의 SPC 그룹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결정인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유학시절에 미국의 디저트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외식사업도 국민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앞으로 다변화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허영인 사장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인 1985년에 미국의 던킨그룹과 손잡고 '비알코리아(BR Korea)'를 세웠고, 1988년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배스킨라빈스'를 프랜차이즈사업으로 도입해 성공시켰다. 그 당시에는 아이스크림 전문점이라는 개념이 전무할 때였는데 베스킨라빈스는 아이스크림 콘, 아이스크림 케이크 등의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여 판매하였다. 베스킨라빈스는 공전의 히트를 거두었으며 이제는 대표적인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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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바게뜨 창립28주년 기념 '고객감사 이벤트' 소개. /사진=파리바게뜨 |
던킨그룹은 허영인 사장이 배스킨라빈스를 성공적으로 경영한 것을 보고 1993년 '던킨도너츠'의 국내 사업까지 위탁하였다. 당시 던킨도너츠는 우리나라에서 던킨그룹이 직접 직영방식으로 운영하다가 실적이 나빠서 한국시장을 떠난 상태였는데 배스킨라빈스의 성공사례를 보고 던킨도너츠의 운영까지 맡긴 것이다.
허영인 사장은 본업과 새로운 사업에서 승승장구했지만 그의 형인 허영선 삼립식품 회장은 제과점업계에 밀려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허영선 회장은 본업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콘도와 음료사업, 패스트푸드사업, 유선방송사업 등으로 다각화를 추진하였지만 1997년 5월 어음 3억 원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를 낸 뒤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허영인 사장은 2002년 삼립식품을 901억원에 인수하였고 늘어난 계열사를 관리하기 위해 마침내 2004년 SPC그룹을 만들고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SPC는 삼립(Samlip)과 샤니(Shany)의 'S'와 파리크라상과 파리바게트의 'P', 그리고 비알코리아와 새로운 가족의 Companies의 'C'를 모아서 만든 명칭이다.
파리바게트는 현재 약 5,000여개의 점포를 소유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과-제빵 프랜차이즈 업체다. SPC그룹 또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매출의 연평균 성장률은 14%이며 2009년부터 2012년까지의 총 수익은 각각 $18억 8천만, $24억 7천만, $33억 1천만, 그리고 $34억 2천만에 달한다. SPC그룹은 식품과 음료 제조업에 종사하는 26개의 자회사들이 있으며, 2012년에 한국에서만 3215개의 점포를 비롯해 미국에서는 LA, Santa Clara, Manhattan, Fort Lee 등에 총 24개의 점포들을 열었고 아시아에서는 북경, 상해, 난징, 호치민, 싱가포르 등에 총 112개의 파리바게트 가맹점을 열었다.
SPC 그룹의 위기: 동반성장위원회의 중소기업 적합업종 확장규제
국내외적으로 성장을 거듭하던 SPC는 2012년 시장외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2012년에 동반성장위원회는 제빵산업을 중소규모의 기업에 적합한 업종(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분류하였다. 한국 공정거래위원회 또한 같은 이유를 들어 SPC를 압박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협조와 공동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몇몇 중소기업 사업가에게 적합한 업종, 사업 분야를 선정하였고 이 분야를 보호하기 위해 정책방안을 제시해왔다. 대규모의 시장참가자들을 견제하고 강력한 시장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제빵산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분류되었다.
동반성장위원회가 제과산업을 중소기업을 위한 산업으로 분류함에 따라, 제과산업 분야는 중소기업을 위해 보존되어야 한다. 따라서 SPC그룹과 같은 대기업은 새로운 점포를 내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동반성장위원회의 조치는 SPC그룹에게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제과분야가 SPC그룹의 가장 주된 분야이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제한을 받게 된다면, 이것은 1945년 상미당 설립시절부터 축적해온 핵심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반성장위원회는 SPC그룹에 대한 별도의 자세한 규정을 만들었다. SPC그룹은 이미 다른 베이커리 점포가 있는 지역으로부터 500미터 반경 이내에 가맹점을 오픈 할 수 없으며, 이에 더하여 SPC그룹은 연간 2% 이상의 추가적인 점포 개장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동반성장위원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2007년부터 2011년 사이에 발생한 대기업 프랜차이즈 가맹점 수와 동네 빵집 수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었다. 2007년에는 동네 빵집과 프랜차이즈 가맹점의 점포수가 각각 8034개와 3489개로 동네 빵집이 약 2.3배 많았다. 2009년에는 동네 빵집의 점유율이 약 30% 감소한 반면에 프랜차이즈의
매장수는 14% 증가해, 매장수의 차이가 1600개로 줄어들었다. 프랜차이즈 매장이 증가하는 추세는 2011년까지 유지되었고 결국 동네 빵집의 점유율을 넘으면서 제과 산업의 1위를 달성하였다. 이후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계속해서 느는 반면, 영세한 동네 빵집들은 문을 닫게 되는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5년 만에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두 종류의 점포 간의 월평균 매출, 매장 크기, 직원 수, 주요 기능의 차이 측면에서 기인한 면이 크다. 즉, 운영방식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Richmond, 성심당, 김영모 같은 대표적인 동네 빵집 브랜드의 월평균수입은 1554만원에 그친 반면 프랜차이즈의 월평균수입은 4803만원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장의 크기와 직원의 숫자도 차이를 보였는데, 프랜차이즈의 매장크기가 평균 25% 컸고 더 많은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뿐 아니라 제조 기술 및 브랜드파워 역시 경쟁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은 이러한 기술이나 전문성이 필요 없어 더욱 쉽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반면 동네 빵집의 입장에서는 고객유치를 위해 차별화 요소를 만들고 핵심적인 경쟁력을 개별적으로 키우는 것이 매우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반성장위원회는 동네 빵집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프랜차이즈 가맹점 규제를 들고 나왔다.
SPC그룹은 할 수 없이 동반성장위원회가 제시한 방침과 규제를 따랐다. 이에 따라 SPC그룹은 제과제빵 산업이 중소기업에 적합한 업종이라는 주장도 인정하였으며, 새로 개장하는 매장의 수와 점포간의 거리를 제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규제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동반성장위원회가 제과·제빵업계를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분류한 결정은 가맹점주와 지역 영세 제과점 모두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먼저 기존의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입장에서 보면 프랜차이즈의 확장 규제가 프랜차이즈 모기업의 수익을 떨어트리게 되고, 그것이 가맹점들에 대한 투자 감소로 이어져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갖고 있는 경쟁력이 줄어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가맹점들이 확장을 지속할 수 없다면 가맹점 스스로 투자할 유인도 사라진다.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이용하면 비교적 적은 기술과 재정적인 자원을 가지고서도 더 빠르고 쉽게 핵심적인 지식을 배우고 사업을 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업가들은 사업을 시작할 때 이 시스템을 이용해 시장 진출을 쉽게 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이들 가운데 시장에서 성공을 이룬 가맹점주들은 몸소 체득한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서 이런 시스템을 사용하여 더욱 더 많은 가맹점을 개장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을 제한하게 되면, 사업적 인센티브가 사라져 결과적으로 시장의 역동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편 동네 빵집의 수도 규제 이후 늘지 않고 오히려 줄었다는 주장도 있다. 홍지만 새누리당 의원이 중소기업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6월 7219개였던 개인 제과점 수가 한 달 뒤 483개 줄어 6736개가 되었으며 이 기간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 수는 15개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 사이 규제를 받지 않는 외국 빵집이 잇따라 국내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2년 12월 프랑스계인 '브리오슈 도레'가 여의도에 1호점을 열었고 싱가포르계인 '브레드 토크'도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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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바게뜨, '옛날 콩고물빵' 출시. /사진=파리바게뜨 제공 |
더군다나 대형 프랜차이즈의 신규 출점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기존 빵집의 권리금이 평균 39.9% 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예비 창업자의 창업 환경이 악화했다는 비난도 일고 있다. 제과점업의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이 그동안 잘해온 기업의 성과를 왜곡하고 골목상권의 권리금만 올려놔 정작 영세 상인은 보호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하였다.
규제의 여파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대형 프랜차이즈의 출점이 발목 잡히면서 제빵 산업의 고용 인원도 감소했다. 파리바게트의 경우 적합업종으로 지정되기 전인 2012년에는 직접 고용 인원이 1414명이었으나 지정 후인 2014년에는 1220명으로 줄었다.
제빵 산업은 다른 산업에 비하여 시장진입을 위한 기술적 장벽이 높지 않은 편이다. 철강산업이나 자동차산업처럼 초기에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고 이에 따라 규모의 경제에 따른 자연독점이 나타나는 시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시장진입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경쟁이 심한 산업에 속한다.
한편으로는 소비자의 욕구가 매우 다양하여 특정 소비자들을 위한 제품생산이 가능한 산업이기도 하다. 즉, 개별 빵집이 고유의 빵맛을 내고 고객관리를 위해 노력하는 만큼 단골 고객을 만들 수 있는 산업이다. 이를 종합하면 제빵 시장은 일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독점적 경쟁시장의 형태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독점적 경쟁시장은 새로운 기업의 진입과 탈퇴가 자유로워 장기균형에서 기업은 독점이윤, 즉 초과이윤을 얻지 못하고 완전경쟁시장에서와 같이 정상이윤을 얻는다. 이는 독점시장이나 과점시장에 비하여 생산량이 늘어나고 제품가격이 하락하여 결국 소비자들에게 유리한 환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시장에서 매우 다양한 선호를 가진 소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독점적 경쟁시장에 속해있는 기업은 단기적으로 이들 소비자들의 선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독점이윤을 얻고자 노력할 유인을 갖는다.
어느 한 기업이 치고 나가면 다른 기업이 따라잡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가 충족되고 시장의 역동성이 유지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러한 기제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기업의 자유로운 진입과 탈퇴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반성장위원회의 500m 입점 규제로 인해 이러한 장점이 사라져 버렸다.
동네 빵집은 기존의 프랜차이즈 빵집뿐만 아니라 새롭게 이 시장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경쟁자들과 경쟁하기 위하여 새로운 빵을 만들고 원가절감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상미당의 무연탄 가마와 같은 새로운 기술이 탄생할 수 있고, 소비자들이 기존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맛의 빵이 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동네 빵집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생긴 규제로 인해 결과적으로 소비자들도, 프랜차이즈 업체도, 그리고 잠재적인 제빵업체들도 손해를 보게 되었다. 기존의 동네 빵집도 당장은 경쟁이 줄어들어 규제의 수혜자가 될 수 있겠지만 자기개발의 기회를 박탈당하였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혜택을 보았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해외시장 진출에서 답을 얻다.
SPC 그룹은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에 관한 동반성장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하였다. 500m 이내 입점규제의 부작용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향후 국내에서는 동반성장위원회의 권고를 최대한 준수하여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을 지속하지 않고 대신 해외사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펼쳐 글로벌 제과제빵 기업으로 성장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합리적인 경제주체는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한다. SPC그룹은 법적 분쟁 등의 방식으로 동반성장위원가 제안한 규제를 철회하도록 노력하는 방안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한 기대편익과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지불해야하는 비용을 고려하였을 때 이 방안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여겨진다.
허영인 회장은 그 대신 이러한 위기를 계기로 오히려 해외시장 개척을 기업의 향후 발전 방향으로 삼아 더 큰 기업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장경제는 주어진 규칙을 준수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업가의 뜻대로 사업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성공하는 기업가는 비록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를 탓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새롭게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이를 인정하고 그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결국 허영인 회장에게 동반성장위원회의 규제는 SPC그룹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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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킨도너츠 화·수 프로모션 소개. /사진=던킨도너츠 |
SPC그룹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해외시장 진출을 추진하여 2014년말 현재 해외에서 파리바게트 브랜드로 170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SPC그룹의 글로벌 시장 확장 전략의 핵심은 아시아와 북미를 넘어 중동과 유럽 등 신시장을 개척해 2020년까지 3000개의 매장을 열어 국경과 언어, 문화를 초월한 진취적인 도전으로 행복한 맛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하며 가장 사랑 받는 글로벌 기업이 되는 것에 있다.
한 때 파리바게트가 중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유가 중국 사람들이 파리바게트를 프랑스 기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아마도 파리바게트의 빵맛이 좋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지 모른다. 그런데 2014년 7월에 허영인 회장은 마침내 바게트의 본고장인 파리에 지점을 열었다. 새로 문을 연 파리 샤틀레 지점은 파리 시청, 퐁네프 다리, 시떼섬, 노트르담 성당, 루브르 박물관 등이 위치한 중심 상권으로 SPC그룹은 파리 샤틀레점을 유럽을 비롯해 캐나다 등 프랑스 문화권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허영인 회장은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한국을 넘어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려는 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선대인 고 허창성 회장이 황해도에 안주하지 않고 빵에 대한 수요가 풍부한 서울로 상미당을 이전한 것처럼 허영인 회장은 우리나라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파리바게트를 전 세계로 확장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맥도널드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파리바게트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송헌재 서울시립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