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박규빈 기자]"전통 문화의 우수성만 되뇐다고 해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정말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문화적인 경쟁력이 생긴다." - 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 중
20일 이른 아침부터 날씨가 푹푹 찌고 습한 날씨가 시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신을 포함해 국내외 110여개 매체 취재진이 서울 용산구 이촌동 소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 전시관에 모여들었다. 고미술품 수집 애호가였던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남긴 컬렉션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의 철학과 전통 문화유산 컬렉션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작을 소개하는 이번 전시회는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여주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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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234호 묘법연화경./사진=미디어펜 박규빈 기자 |
박물관 2층 특별 전시관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흔히 '법화경'으로 불리는 국보 제234호 묘법연화경이 반겼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글자가 깨알같이 쓰여있었다. 아교를 섞어 염색한 검은 종이에 금과 은으로 불교 경전을 정성껏 쓰는 행위는 공덕을 쌓는 일로 여겨져 고려 시대에 대유행했다고 한다. 접는 형태였고, 표지는 꽃문양으로 장식돼 있다.
이와 같은 사경들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는데, 수행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다룬 것이라는 게 큐레이터의 설명이었다.
그 옆에는 '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 13'이 전시돼 있었다. 이는 고려국왕이 후원해 격조 높은 사경으로 길이가 9m에 달했고, 사경 첫머리에는 금선으로 수를 놓은 신장상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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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 6점./사진=미디어펜 박민규·박규빈 기자 |
대각선 방향에는 불상 6점이 전시돼 있었다.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때까지인 즉, 6~9세기 사이의 불교 조각의 흐름을 엿볼 수 있었다. 뾰족한 광배가 특징인 이 불상들은 중국에서 비롯한 고대 불교 조각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반가사유상'도 취재진에게 얼굴을 비췄다. 왕궁을 벗어나 인생의 번뇌를 깨닫고 깊은 사색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형상화 한 이 불상은 어딘가 모르게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과 닮은 구석을 보이기도 했다.
다음 전시품은 고려 시대의 것들이었다. 청동과 금속이 들어간 의식 장구들은 공력이 들어가 각종 의례와 의식에서 활용했다고 한다. 특히나 현장에서 본 향로는 규모가 상당해 이를 수용했던 '봉업사'는 규모가 컸을 것으로 짐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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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사진=미디어펜 박민규 기자 |
조금 더 둘러보니 '인왕제색도'가 위용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진경산수화'라는 금자탑을 세운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걸작으로, 삼성 리움 미술관에서도 수차례 전시된 바 있다.
한국을 가장 한국답게 그렸다는 찬사를 받는 작품으로 붓에 먹을 듬뿍 묻혀 쓸어낸듯 한 필법이 도드라졌다. 특히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종로 삼청동·청운동·궁정동 쪽에서 바라본, 비에 젖은 인왕산 바위의 인상을 그린 이 작품은 일기 변화에 대한 감각 표출, 실경의 인상적인 순간포착에 작가의 천재성이 충분히 발휘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겸재는 한평생 인왕산자락에 살았던 만큼 본인에게도 인왕제색도는 수작으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게 큐레이터의 전언이다. 친구들과 계절마다 시를 쓰던 터전인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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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사진=미디어펜 박민규 기자 |
바로 옆에는 1806년에 그려진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 '추성부도'가 자리했다. '추성부'는 구양수가 52세에 집필한 문부(文賦)형식의 작품이다. 이는 처량한 가을 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감정 동화를 동자(童子)와의 대화체로 나타낸 구양수의 대표작이고, 소동파의 적벽부와 더불어 대표 문부작이다. 단원은 구양수의 추성부를 그림으로 그렸다.
가을 바람은 '죽음의 바람'으로 해석된다. 순리처럼 죽음을 향해 가는 정설을 담아냈고, 단원은 스스로 화가지만 문학적 소양이 있다고도 믿었다. 단원 본인에게 이 작품은 자화상과도 같다는 해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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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의 일생을 한글로 집필한 책./사진=미디어펜 박민규 기자 |
전시관 중앙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한글로 집필한 책도 있었다. 세종대왕은 장인 어른이 역모에 연루돼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부인 소헌왕후가 자신보다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녀의 명복을 빌어주고자 석가모니의 이야기를 펴내도록 했다. 현대 한글과는 모양새가 달랐지만 분명 우리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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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청화 백자./사진=미디어펜 박민규 기자 |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 받은 이 회장의 유산 중에는 조선 시대 문인들의 문화를 간직한 것들도 있었다. 붓질을 하다가 내버려 둔 듯한 청화 백자는 여백의 미를 넘어 대범하고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여지 없이 드러내보였다. 이는 당대 최고의 기술과 디자인을 보여주는 명품 그 자체였다. 동시에 이는 기술 혁신과 디자인을 중시했던 기증자 이건희 회장의 경영 철학과도 궤를 같이 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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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불화와 엑스레이로 찍은 사진./사진=미디어펜 박민규 기자 |
이 회장은 해외에 있는 국보급 우리 문화유산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 덕에 해외에 반출된 상당수의 고려 불화가 국내로 돌아오게 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려 불화 특유의 섬세미를 과시하는 '천수관음보살도'와 '수월관음도'도 구경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육안으로 보기 힘든 불화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적외선과 엑스레이 사진으로도 보여줬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서는 먹으로 그린 밑그림을 볼 수 있었고, 엑스레이 사진으로는 채색 방식과 안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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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 안방 가구./사진=미디어펜 박민규 기자 |
조선 시대의 생활 문화는 안방 가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가구에는 장식이 거의 달려있지 않았다. 단지 꽃무늬로 장식이 돼 있었을 뿐, 나머지는 원목과 동으로 구성돼 있어 소박하고 단정함을 강조한 조선 가구 문화를 짐작케 했다.
조선 남성의 가구는 책장으로 대표된다. 현대에는 책을 옆으로 보관하지만 당시에는 눕혀서 쌓아뒀다. 위에 두는 첨판은 더 넓고, 크게 만들어 물건 적재를 용이하게 하는 듯 싶었다. 전면부 금속 장식도 쇠로 만들어 남성의 강건함을 표현하고자 했던 듯 했다.
문인들이 조선 사회를 지배했던 만큼 두루마리가 떨어지지 않게 양단이 약간 올라가게 설계된 경상도 전시돼 있었다. 선비들이 먹과 벼루, 종이를 놓고 글을 쓰는 장면이 연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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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비산동에서 출토된 청동기 일괄./사진=미디어펜 박민규 기자 |
고 이건희 회장은 "금속활자는 세계 최초의 하드웨어이고, 한글은 기막히게 과학적인 소프트웨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국내 최고 기업을 이끌었던 그는 우리나라 전적의 가치를 잘 이해하는 문화인이기도 했다. 또 그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우리 문화 발전에 대한 사명감으로 문화 유산을 모아 보존하는데에 큰 공적을 세웠다.
이번 기증 명품전으로 기술력과 디자인이 탁월한 명품을 보존해온 이 회장의 철학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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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치와 호랑이./사진=미디어펜 박규빈 기자 |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오는 21일부터 9월 26일까지 상설전시관 2층 서화Ⅱ실에서 무료로 진행된다. 국보 12건과 보물 16건 등 45건 총 77점이 전시되며, 예약은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오는 21일부터 종로구 소격동 소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이 개최되며, 내년 3월 13일 막을 내린다. 이곳에서는 근현대 미술사를 아우르는 1488점의 기증작이 전시되며, △이상범 '무릉도원' △백남순 '낙원'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 '황소' △천경자 '노오란 산책길' △이성자 '천년의 고가' 등의 명작들이 관람객과 마주할 예정이다.
[미디어펜=박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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