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간을 법률로 통제하겠다는 '비정규직법’, 경영계에 부담을 전가시키는 '통상임금’ 등의 의제로 논란을 일으켜왔던 노사정위원회의 합의 기한이 3월 말로 다가왔다. 노동계는 보란 듯이 투쟁 강도를 높이고 있다. 현실에 부합되지 않은 정치적 요구에 의해 강요된 합의는 대의민주주의에 반할 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의 왜곡을 심화해 곤두박질 중인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할 젓이 자명한 일이다. 이에 자유경제원은 토론회 <노사정위원회 합의 가능한가?>를 개최해 노사정위원회의 합의 실효성 및 역할과 실태를 점검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아래는 토론회 패널로 참석한 박동운 단국대학교 명예교수의 토론문 전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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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운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
3월 말 시한을 앞두고 노동개혁을 위한 노사정위원회의 논의가 바쁘게 이어져왔다. 노사정위원회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이슈를 들추면서 노사정위원회의 합의 가능성을 진단한다.
노사정위원회의 등장배경
한국경제가 1997년 12월 3일에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자마자 정권을 미리 인수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IMF의 요구에 따라 구조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노동개혁, 기업개혁, 공기업 민영화, 금융개혁’으로 일컬은 ‘4대개혁’ 가운데 하나인 ‘노동개혁’을 이야기한다.
출범 당시 김대중 정부가 내세운 노동개혁의 주요 내용은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사회적 합의체 도출, 사회안전망 구축’ 세 가지였다. 이 가운데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는 목표이고, ‘사회적 합의체 도출’은 목표를 추구하는 절차이며, ‘사회안전망 구축’은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격의 보완장치였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사회적 합의체’로서 1998년 1월 10일에 ‘노사정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당시 전문가들은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시장에 대한 새로운 규제 요인이 되리라 보고 거의 모두 입을 모아 반대했지만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끝내 이를 발족시켰다.
노사정위원회란 노·사·정 및 공익이 참여하여 경제·사회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한 후 1998년 2월 6일에 60개항의 사회적 합의사항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노동관계법 개정을 통해 ‘경영상의 이유’로 인한 정리해고 또는 집단해고를 허용하는 법과, 28개 업종에 한정된 근로자파견법을 도입했다.
그런데 근로기준법 제23조∼26조와 관련 시행령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가 도입한 정리해고법은 노동시장 유연성을 제고하기는커녕 오히려 고용보호만 강화시키고 말았다.
OECD가 1998년 회원국들의 고용보호를 분석·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정규직 고용보호가 심하기로 포르투갈에 이어 2위였다. 근로자파견법 도입은 노동시장 유연화에 기여했지만 28개 업종에 한정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노사정위원회의 성격
그런데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노사정위원회는 그 실체가 조합주의(corporatism)임이 드러났다. 조합주의는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이들 이익집단들의 협력을 통해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내용과 방향이 결정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같은 성격을 지닌 한국의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시장을 경직시키고 구조개혁을 어렵게 만들었다. 사회적 합의 도출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시킨 노사정위원회에 관해 남성일 교수의 비판을 소개한다.
첫째, 노사관계의 성격이 정치적 노사관계 및 노정관계로 변질되었다. 김대중 출범 당시 노동조합은 정부의 정책 가운데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해서는 투쟁으로 대응하고, ‘사회적 합의 도출’에 대해서는 협상과 투쟁을 병행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노사정위원회를 협의기구가 아닌 정치적 의사결정기구로 만들어 버렸다. 노사정위원회의 이 같은 성격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둘째, 법과 원칙이 무력화되었다. 사회적 합의주의는 원칙이나 법과는 관계없이 이슈에 대해서만 노사정의 논의를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2001년 말에 주택은행과 국민은행과의 합병에서 은행장이 노조에게 고용보장을 약속함으로써 합병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셋째, 구조조정이 지연되거나 불투명해졌다. 구조조정에 대한 노조의 강력한 반발이 있을 경우 정리해고 규모를 축소함으로써 구조조정 효과를 상실하여 다시 부실에 빠져 재구조조정이 필요한 경우가 생겼고, 구조조정 시기를 놓침으로써 부실이 심화되는 경우도 생겼다. 또 노사정위원회의 합의 도출이라는 명목하에 구조조정이 지연되거나 전망 자체가 불투명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남성일 교수는 노사정위원회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뒤이어 한국경제연구원도 보고서를 통해 똑같은 주장을 폈다. 필자는 노사정위원회 폐지 주장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펴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노사정위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노동법에도 있다. 남성일 교수는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노동법은 집단주의와 보호주의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는데, 이러한 경향은 김대중 정부에서 사회적 합의라는 포장으로 더욱 심해졌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결과 개별 경제주체의 자율권은 심각하게 제약받고, 경제적으로는 고비용구조가 심화되며, 취업기회가 줄어들어 노동시장의 신규진입자의 실업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집단주의와 보호주의가 이러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이미 선진국은 경험하고 노동법의 유연화를 지향하고 있는 추세에서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련된 예를 들면, 주5일근무제 실시 법제화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제도 마련 등은 당시 시장의 자율기능을 훼손하여 피해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규제 완화와 자율화 추세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법정근로시간은 최저기준만 정했어야 했다. 주5일근무제는 당사자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비정규직 보호는 비정규직 일자리만 없애게 될 것이므로 오히려 정규직 과보호 철폐에 초점을 맞췄어야 한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노동개혁의 핵심내용인 정리해고법과 노사정위원회의 성격을 중심으로 평가하면, 김대중 정부의 노동개혁은 개별주의적 의사결정 대신 집단주의적 의사결정을 선택함으로써 경쟁원리를 작동할 수 없게 하고 노동시장을 경직시킨 결과를 가져와 시장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노사정위원회의 노동개혁 논의는 합의에 이를 수 있을까?
노사정위원회는 2014년 12월 23일에 ‘노동시장 구조개선 기본 합의문’을 채택하여 ‘5대 의제 14개 세부 과제’를 다루기로 했다. 이 가운데 우선 과제로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임금·근로시간·정년 문제, 사회안전망 정비’ 세 가지 의제를 2015년 3월 말까지 도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들 의제는 현재 논의 중이어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이슈를 평가할 수는 없다.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 중인 주요 이슈만 간략히 정리한다.
∙정년 연장을 위한 임금피크제
∙근로시간 단축
∙임금체계 개편(직능, 직무, 성과, 고용안정, 지속 가능한 임금체계 등)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비정규직 차별 시정, 상생협력, 노동시장 활성화 등)
∙사회안전망 정비(사회보장 사각지대 배려, 취약근로 소득 향상, 직능개발 등)
노사정위원회가 논의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어떤 이슈는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노동개혁의 최대 이슈는 ‘정규직 과보호’ 개선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 같다. 노조 측은 고용안정, 사회안전망 확충 등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과연 합의가 이뤄질지 우려가 앞선다.
문제는 노조다
논의 중인 이슈는 노동계, 경영계, 정부 측으로 나누어 각 그룹의 입장이 밝혀져 있다. 이슈에 따라 경영계와 정부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노동계의 입장은 크게 다르다. 어떤 이슈는 합의가 이뤄질 수 있을까 우려될 정도로 입장 차이가 크다.
김대중 정부에서 출발한 노사정위원회는 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동안 노사정위원회는 노정(勞政)위원회 또는 사정(使政)위원회로 전락하여 정치 싸움만 일삼아 왔다.
우리의 노사정위원회는 아일랜드의 ‘사회연대협약(Social Partnership Agreement)’을 본받아 생산적 노사정위원회로 발전되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이 성공하지 못하게 되면 한국경제의 미래는 밝지 못할 것으로 우려된다. 그래서 2015년 3월 말까지 노동개혁에 대한 노사정위원회의 합의가 과연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노사정위원회는 아일랜드의 ‘사회연대협약’을 벤치마킹해야
1980년대에 들어와 아일랜드는 경제 회생을 위해 구조개혁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1987년 정권을 잡은 호이(C. Haughey) 총리는, 1979년 이웃나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1984년 뉴질랜드의 롱이 수상이 했던 것처럼 구조개혁에 착수했다.
구조개혁 추진 과정에서 개혁은 정부 밖에서도 이루어졌다. 정부가 추진하는 구조개혁을 지켜보던 제1야당인 민족당의 앨런 덕스(Allen Ducks) 당수와 최대 노조인 전국노조연합(ICTU)이 공동으로 정부에 제안하여 ‘국가재건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사회연대협약’이 1987년 10월에 체결되었다.
사회연대협약은 소위 아일랜드식 노사정위원회다. 사회연대협약은 정부・주요 사용자그룹・노조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구성된 모임이다. 사회연대협약은 구조개혁이 추진된 1987년부터 3년 단위로 6차례에 걸쳐 체결되어 오다가, 2006년에는 10년 단위로 체결되어 지금까지 모두 7차에 걸쳐 경제・사회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해 왔다(<표 1> 참조).
<표 1>의 내용을 요약한다.
∙1∼3차 협약: 경제안정과 위기극복
∙4∼6차 협약: 사회통합과 분배개선
∙7차 협약: 종전과는 달리 ‘2016년을 향해서(Towards 2016)’라는 이름으로 10년 (2006∼2015)간의 기간을 대상으로 체결된 협약인데, 주요 내용은 일자리 창출, 공정성 확립, 성장 지속, 복지와 분배 개선 등 이다.
아일랜드의 사회연대협약은 생산적 노사관계를 정착시켜 경제안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해왔다.
사회연대협약은 노동시장 유연화에도 기여
사회연대협약 체결 후 아일랜드 노동시장은 어떻게 변했을까? 몇 가지 주요 내용을 보자.
∙연평균 임금상승률은 사회연대협약 체결 이전에는 20%를 넘었으나 1차 협약에 따라 2.5%로 억제된 결과 그 후 3~5% 수준에서 안정되었다.
∙노사분규 발생건수는 1974년과 1984년에 각각 250건과 200건에 달했으나 1988년 이후에는 연평균 50건 미만으로 크게 감소했다.
∙기업의 80%가 노조가 조직되어 있지 않아 노사관계가 안정되었다.
∙실업률이 1992년 15%를 넘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2007년에는 4%대로 떨어졌다.
이처럼 사회연대협약은 노동시장 유연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노동시장 유연성을 측정하는 두 가지 지표가 이를 말해준다.
첫째, OECD가 발표하는 ‘고용보호’를 보자. 아일랜드는 OECD 국가 가운데 고용보호가 약하기로 1998년과 2003년에 5위다. 고용보호가 약한 순서대로 쓰면, 미국,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아일랜드다. 고용보호가 약하다는 것은 해고가 쉽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아일랜드 노동시장은 유연하다.
둘째, 프레이저 인스티튜트가 발표하는 ‘노동시장 규제 관련 경제자유’를 보자. ‘노동시장 규제 관련 경제자유’로 평가할 때 노동시장 규제가 약하기로 아일랜드는 2012년에 152개국 가운데 28위인데, 홍콩, 피지, 우간다 같은 국가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국가들을 제외하면, 7위다. 노동시장 규제가 약한 순서대로 쓰면,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스위스, 일본, 영국, 아일랜드다.
아일랜드는 1인당 국민소득이 17년 만에 1만→5만 달러로 오른 나라
아일랜드는 사회연대협약의 도움으로 노동시장이 유연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아일랜드는 구조개혁을 통해 법인세율을 12.5%로 낮추고, 투자의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완화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한 결과 해외직접투자가 밀려들었다.
아일랜드의 해외직접투자 연간 유입액은 1970년 0.3억 달러였는데 그 후 빠르게 증가하여 1991년 10억 달러, 1999년 100억 달러, 2000년 200억 달러, 2010년 400억 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2012년에는 293억 달러로 감소했다.
아일랜드는 엄청난 해외직접투자 유입에 힘입어 1970∼2012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4.2%나 된다. 특히 세계경제가 호황국면에 접어든 1992년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아일랜드의 연평균 성장률은 6.8%로,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다. 불행하게도 아일랜드는 개방도가 큰 나라여서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글로벌 금융위기의 피해가 컸다.
아일랜드는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를 재정지출로 대응하다보니 재정적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2010년 EU와 IMF로부터 850억 유로(약 122조 원)의 구제금융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해외자본 유치로 최근 경제가 다시 살아나 2013년 11월 ‘구제금융 딱지’를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뗐다.
아일랜드는 엄청난 해외직접투자 유입에 힘입어 1인당 국민소득이 1970년 1,655달러였는데, 1988년에 1만 달러, 1998년에 2만 달러, 2003년에 3만 달러, 2005년에 4만 달러, 2007년에 5만 달러를 넘어섰다. 불행하게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아일랜드는 1인당 국민소득이 2012년 말 현재 37,804달러에 머물러 있다.
어떻든 1인당 국민소득이 아일랜드처럼 15년(1988∼2005년) 만에 1만 달러에서 4만 달러로, 17년(1988∼2007) 만에 1만 달러에서 5만 달러로 오른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박동운 단국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