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신(神)인가’라고 조롱했던 이는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다. 그는 민주주의를 의심하고 부정한 대표적 학자다. 호페는 군주정에서 민주정으로의 전환을 문명적 퇴행 현상으로 읽는다.
민주주의를 성우(聖牛)로 떠받는 현대, 특히 한국에선 요설(妖說)이요 불경(不敬)이다. 민주주의를 신으로 빗대는 그의 어법이 고약하다. 그렇다고 그를 괴물로 볼 이유는 없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고 깜짝 놀랐던 토크빌과 다를 뿐 돈키호테는 아니다. 칼 멩거와 미제스를 잇는 오스트리아 학파 즉 자유주의 계보에 속하는 석학이다.
민주주의는 신인가
호페가 쓴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Democracy: The God That Failed)’은 다른 자유주의 저작물들이 그렇듯, 마치 한국을 두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책 내용을 여기에 상세히 소개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시각을 짧게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천민 민주주의 시리즈의 목적에 부합하리라 생각한다.
호페는 민주주의가 가질 수밖에 없는 약점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에 뿌리를 둔다.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비극은, 경험이 증명하듯, 착취와 낭비를 정당화한다.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없다는 말과 같지 않으냐는 것이다. 주권자들은 일정 기간마다 투표권을 행사해 민주적 대표자, 즉 임시 관리인을 뽑는다.
호페는 여기에서 요즘 개그 대사처럼 질문을 던진다고 상상된다. “이 한심한 놈아, 그래서 뭐?” 그가 우려한대로, 민주정에서 대리인들은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에 온갖 패악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소유권을 갖지 않은 자의 특징은 귀중한 재화를 보존하기보다 착취하고, 알뜰하게 운영하기보다 낭비하는데 더 열중한다.
인기 영합적 매표(買票)정책을 마구 수립하고, 예산을 무작정 늘리고, 권한을 확대하려 한다. 그 다음 선거도 중요하므로 공짜복지 공약은 남발되고, 유권자는 집단에 따라, 지역에 따라, 특혜에 따라 쏠려간다. 작금 한국 상황 그대로다. 훌륭한 대리인도 있을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운(運)에 맡겨야 한다.
입법과잉은 필연적이다
호페는 민주정의 입법 과잉도 우려했다. “어떤 정치제보다 민주제 하에서 엄청난 입법행위가 이뤄지는데 대해 비관적이다.” 1년에 1만 건의 법을 발의하는 한국 국회를 예견한 듯하다. 국회의원 중 법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아는 의원은 몇 명쯤 될까?
단언컨대, “국회가 만들면 모두 법이 된다”고 생각하는 의원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들은 '국가작용이 의회가 정한 법률에 근거하고 그 법률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게 확실하다. 입법부가 정하면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두 법이라고 믿는 법의 문외한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경제 민주화 악법이 쏟아질 리 없다. 위헌인 것을 알면서도 '김영란법’을 통과시켰다는 국회는 호페가 그토록 싫어했던 입법과잉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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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페는 민주정의 입법 과잉도 우려했다. “어떤 정치제보다 민주제 하에서 엄청난 입법행위가 이뤄지는데 대해 비관적이다.” 1년에 1만 건의 법을 발의하는 한국 국회를 예견한 듯하다. 국회의원 중 법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아는 의원은 몇 명쯤 될까? /사진=연합뉴스 |
악법을 쏟아내고 특권에 마비된 국회가 혁명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 복거일 선생님의 우려는 옳다. 전과자가 수두룩하고, 권한을 꿀단지처럼 끌어안고 있는 국회가 고도의 정신적 산물인 법을 제대로 만들기란 애당초 불가일 지 모른다. 법과 입법이 왜 다른지, 법치주의가 무엇인지를 배우려 하지 않는 집단처럼 여겨진다. 국회 도서관엔 하이에크의 저서가 하나도 없는 것인지.
천민 민주주의의 본산을 자임하는 국회가 진화의 궤도에 오르려면 법치, 즉 법이 지녀야 할 일반 속성에 관한 원리를 깨우치길 바란다. 그것은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칸트로 이어지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에서 도출된 법의 일반성, 법의 탈목적성, 법의 추상성이다.
법안을 스스로 발의하거나, 다른 의원의 발의를 도울 때 의원들은 반드시 법의 3가지 일반속성에 견주어 보아야 한다. 자신이 만드는 법이 흄과 애덤 스미스의 정의의 규칙(타인의 인격, 신체, 재산의 존중과 계약 엄수)에 부합하는지, 칸트의 정언명령(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취급해야 한다) 위에 있을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되려면, 아니 국회의원이 된 뒤, 최소한 공부를 해야 호페가 조롱한 민주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누구나 정치할 수 있는 게 좋은가
호페는 누구나 정치에 입문할 수 있는 민주정을 싫어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므로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이다. 이 질문 자체가 민주주의라는 신에게 불경스럽긴 하지만, 오늘날 한국 정치에 던져볼 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하루에도 서 너 번 “저런 사람이 의원이라니”라며 혀를 찬다. 그 밥에 그 나물이 선거에 오르고, 유권자들은 지역 색에 따라, 정당 색에 따라 무조건 찍어준다. 이런 식이라면 호페가 우려한 천민 민주주의의 종말은 요원하다.
법의 처벌을 받고도 특권을 가진 '금배지’로 보상을 받는 현실에서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일인가’라는 호페의 질문은 유효하다. 하이에크가 입법만능주의를 없애기 위해 제시한 것처럼 입법의원과 집행의원을 구분해야 할지도 모른다.
호페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중앙집권형 국가를 없애는 대신 보험회사가 안전과 정의 업무를 관장할 수 있다는 과격한 주장을 내놨다. 보험회사가 능히 국가가 수행해온 경찰 기능을 자유의지에 의한 사회계약으로 할 수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현실주의와 실현가능성을 배제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호페를 읽을 때마다 대한민국의 지금이 떠오른다.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 유권자의 수준에 비춰보면, 호페의 주장이 섬뜩 하다기 보다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호페의 보험 회사론은 돈키호테적이지만 민주주의의 천민화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악마의 대변자’가 호페는 아닐까. 권력의 소유권이 분명하고 책임도 확실히 지는 군주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조심히 다뤄야 우리는 호페에게 지지 않는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이 글은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