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56)- 정신적 쾌락이 진정한 행복
에피쿠로스(BC 341~BC 270)의 <쾌락>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즐겁게 사는 것, 행복한 삶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다. 인간이 생존하는 한 행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체득하게 되는 본능적 욕망이다. 하지만 무엇을 통해 어떤 행복감을 느끼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

고대 그리스인들은 유달리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 사색과 고민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아테네 철학자들은 시민적 삶의 외형적 조건을 만들어주는 민주주의의 적실성은 물론, 그에 상응하는 인간 내면의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까지 궁구했다. ​

자유를 존중했던 인간들이 행복의 원리를 찾으려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행복의 조건과 원리는 시대적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테네가 융성기를 지나 쇠퇴기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의 자유정신 역시 퇴조했다. 공동체의 덕성과 탁월성, 즉 아레테(arete)에 대한 관심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27년 동안 계속되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굴욕적으로 패해 항복하게 되자(기원전 404), 아테네인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진다. ​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BC 270)가 ‘쾌락주의’를 주창하게 된 것도 이런 우울한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정치가 마케도니아에 예속되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주의가 대두하게 되었다.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인들의 신체적, 정신적 무력감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쾌락’의 중요성을 설파하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쾌락 그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쾌락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무조건 고통스런 상황을 제거한다고 해서 쾌락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

즐겁고 행복한 삶은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한 삶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즐겁게 살지 않으면서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기 위한 척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즐겁게 살 수 없다.” 그런 척도란 어떤 것일까?​

순수한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의 조건과 한계에 대해 명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으며, 다만 헛된 생각에 의해 생겨난” 욕망은 스스로 몰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자연적 정의에 부합한 쾌락을 얻는 지름길이다.​

“자연의 정의는,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해침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려는, 상호 이득의 협정이다.” 이런 정의의 관점은 대인관계에서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한계 속에서 개인의 쾌락을 마음껏 추구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여긴 것 같다. 그의 주장은 ‘자유’를 ‘쾌락’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존 스튜어트 밀이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의 자유를 무한히 확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맥락과 닿는 것 같다. ​

   
▲ 에피쿠로스 두상, 로마 남쪽 아피아 가도 인근에서 발굴된 것으로 알려진다. 대영 박물관 소장 ⓒ박경귀

에피쿠로스는 “맛의 즐거움, 사랑의 쾌락, 듣는 즐거움,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서 생기는 즐거운 감정들을 모두 제외한다면, 선(agaton)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주장한다. 육체적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점이 스토아학파의 공격을 받는 관점이기도 하다.

물론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이 오로지 육체적 쾌락에만 초점이 맞춰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를 통해 진정한 정신적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아타락시아는 개인의 덕성과 탁월함(arete)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아름다움과 탁월함 등은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할 때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쾌락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경고한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진정한 쾌락은 일체의 미혹된 감정, 무지에 의한 공포심 등으로부터 벗어나야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자연학을 통해 우주의 본성에 대해 명확히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 사회가 당연하게 여긴 미신들을 배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한 바가 있는 원자론을 확대하여 우주의 생성 원리와 번개, 태양과 달의 순환 등의 원리를 설명했다. 천둥과 번개가 제우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원자적 활동에 기인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는 자연 현상을 신들의 행위로 인식하던 당대의 보편적 관념에 비추어 보면 매우 도발적인 주장이다. 이런 관점은 로마의 자연철학자 루크레티우스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에피쿠로스를 찬양하며 그의 원자론적 인식을 계승하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자연 현상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통해 미신의 현혹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퓌론(Pyrrhon)과 같은 회의론자들이 현상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무관심해 질 때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국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에서 해방될 때 얻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

물론 에피쿠로스의 주장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근심과 두려움이 생기는 원인을 올바르게 추적”하고, “천체 현상과 때때로 발생하는 다른 현상들의 진정한 원인을 앎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개인과 개인, 나아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문제와 갈등 속에서 어떻게 쾌락을 얻어내고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 역시 아테네가 쇠락하면서 개인주의로 흐르게 되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

어찌되었든 그가 행복을 얻는 데 필요한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온 자연학에 대한 논구는 매우 흥미롭다. 그는 천체의 현상이 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과 신의 본성을 명확히 발견하는 것을 자연학의 역할로 생각했다. ​

“행복은 천체 현상의 본성에 대해 관찰하고 이런 목적을 위해 필요한 지식들을 획득하는 데 있”고 이를 통해 절대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의 본성과 진리의 이해를 통해 마음의 평정과 쾌락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

현대 사회는 말초적 자극이 넘친다. 대중문화는 육체적 쾌락을 충동한다. 현대인들은 일신을 즐겁게 하는 일이 행복을 얻는 지름길로 여기기 십상인 유혹적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환경에 추동되어 육체적 쾌락을 탐닉할 경우 욕망의 충족은커녕 더 큰 자극과 더 큰 쾌락을 갈구하는 고통이 수반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의 이런 한계를 분명히 간파했었다. 그가 마음의 평정을 통한 정신적 쾌락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설파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현대인이야말로 이런 아타락시아가 절실히 요구되지 않을까. 물론 무턱대고 육체적 즐거움을 배척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오감의 만족을 추구하기보다, 세상의 유행과 편견에서 벗어나 이성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는 균형이 잡힌 삶을 추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주의자가 아닐까.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신비주의적 맹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기원전 4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아테네인들에게 개인이 어떻게 육체적, 정신적 안정과 쾌락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부분적 해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사회의 제반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의 행복론’을 정치철학과 윤리학적 관점으로까지 치밀하게 확장하여 궁구해 내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숱한 오해와 공격을 받게 된 빌미와 한계가 여기에 있었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 추천도서: <쾌락>, 에피쿠로스 지음, 오유석 옮김, 두레(2011, 7쇄), 3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