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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준현 경제부 기자 |
[미디어펜=류준현 기자] "경제규모는 급속히 커졌지만 혁신의 요람은 여전히 부족하다. 성장곡선이 완만해진 탓도 있겠지만, 기득권 중심 경제체제가 공고하기 때문이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새해를 맞아 내놓은 신년사 중 일부다. 국책 금융기관장이 '기득권 중심 경제체제' 등 다소 강경한 어조의 단어를 썼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또 '혁신'이라는 단어를 10회나 언급했다. 중의적이고 정제된 표현들로 '무난함'이 묻어나는 타 기관장들의 신년사와 대비된다.
특히 교수 출신답게 조선시대 대표적 경제개혁법인 '대동법(大同法)'을 예시로 든 점도 화제다. 기득권의 반대 속에서도 김육 같은 소신있는 경제관료들이 정치생명을 걸고 신념을 지켜 약 100년 만에 개혁을 이뤄냈다는 내용 말이다.
나아가 정책금융을 산업자금 공급에서 기업의 세대교체, 시장참여자들 간 협력게임으로 이끌겠다는 발언도 내놨다. 세간의 풍파 속에서도 기업 구조조정을 원칙대로 완수하는 한편, 기업 세대교체와 '친환경·혁신' 등의 산업 패러다임 전환에 나서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혁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산업 재편뿐만 아니라, 규모의 경제로 원가경쟁력을 확보해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것도 혁신이다.
오랜 기간 세계 컨테이너선 시장을 장악한 덴마크 머스크라인이 대표적이다. 머스크는 컨테이너선 대형화와 선복량 확대 경쟁을 부추기며 대규모 적자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자국 수출신용기금의 대규모 공적자금 지원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머스크는 주요 기간항로에서 736척의 선박을 운용하는 등 세계 해운시장의 '가격'을 주도하는 '프론티어'로 활약 중이다.
해상운송의 역사가 기원전(BC) 3000년경이라고 추정하는데 그로부터 5000여년이 흘렀다. 하지만 전 세계 무역시장의 90% 이상은 여전히 선박으로 운송되고 있고, '섬국가'인 한국은 99.7%를 해상운송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꾸준히 해운·조선업을 육성·지원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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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 사진=산업은행 제공 |
항공업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로 세계 항공여객시장이 초토화된 가운데, 조원태 대한항공 대표이사는 유일하게 여객기 좌석을 대거 탈거하는 혁신을 선보였다. 내부는 방역물품, 수출화주들을 위한 긴급화물로 가득 채웠다. 대규모 운휴로 운임까지 치솟으면서 대한항공은 잭팟을 누릴 수 있었다.
세계적인 항공전문지 '에어카고뉴스'는 "조 회장의 경영사례를 해외 항공사들이 뒤따르고 있다"며 '월터 조(Walter Cho) 비즈니스모델'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이 작은 혁신이 없었다면 아시아나항공과의 빅딜은커녕 대한항공조차 경영위기에 놓였을 것이다. 우리경제를 수십 년간 이끌어 온 기간산업은 여전히 혁신하고 있고, 국부를 책임지고 있다.
물론 이 회장의 발언이 기간산업의 무조건적인 배제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산은 관계자는 "구조조정만 하는 게 아니라 미래산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기업을 육성하고 신산업도 재편하자는 취지"라며 "전통산업의 친환경·신산업 전환 등에 지원하고 미래를 위해 지원한다는 내용"이라고 해명했다.
이 회장도 구조조정과 관련해 "원칙을 준수해 새로운 관행이 되게 하자", "국가 전체의 회수율 제고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등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와 별도로 혁신을 가로막는 산적한 규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최근 폐막한 2022 CES에서 혁신상을 수상한 기업 404개 중 국내기업이 84개라고 한다. 그 중 벤처·창업기업은 74개사에 달한다. 하지만 이들이 개발한 기술부터 유전자검사·헬스케어·배달로봇·드론 등은 여전히 국내 규제 영향으로 산업 육성조차 안 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더불어 벤처기업 창업자의 경영권을 보호해주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복수(차등)의결권 도입 법안은 여당 일부 강경파의 반대로 무산됐다. 규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산은을 비롯한 국책금융기관의 자금지원도 끝내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구조조정 이슈로 그동안 상당한 압박을 받았을 이 회장이 신년사로나마 강경한 의지를 드러낸 점은 높게 평가하고 싶다. 또 혁신·탄소금융도 모두 취지는 좋다. 하지만 산업혁신과 정책금융이 제 역할을 하려면 손발부터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명료하고 강경한 메시지로 우리 경제의 폐부를 찌른 이 회장의 신년사가 조금은 아쉬운 대목이다.
[미디어펜=류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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