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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문화평론가 |
중앙일보 창간 1965년을 기점으로 국내 언론은 본격적 경영시대로 돌입한다는 게 예전에 나왔던 관훈클럽 보고서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은 경영 이전의 낭만시대쯤이 될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데, 당시에도 사세(社勢) 키우기와 지면 경쟁이 후끈했다. 단 경쟁구도는 지금과 전혀 달랐다.
일테면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의 고백대로 1960년대 초 무려 그 신문은 발행부수 6만5000부로 업계 꼴찌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당시 지면 경쟁을 주도했던 건 전통의 동아일보가 아니고 새내기 신문 한국일보였다.
사주 백상(百想) 장기영이 1954년 창간했던 그 신문은 젊은 이미지로 돌풍을 일으켰는데, 그걸 지휘했던 장기영의 사람 스타일에 전부터 나는 끌려왔다. 1968년 서울 중학동 한국일보 구사옥에 큰불이 났을 때다. 발행인은 그 경황 중에도 사진기자들에게 연신 외마디 소리를 질러댔다.
한국일보 왕초 기자 장기영, 조선일보 영광 일군 방우영
“저 불꽃을 사진 찍어라. 옥상의 불타는 사기(社旗)를 찍으란 말야.”그는 결코 만만치 않은 캐릭터였는데,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기자이자 시인이던 김요섭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장기영은 포에지(詩)의 아들이다. 불꽃, 그것이 그의 일생의 미학이 아닌지 모르겠다.”
맞다. 장기영은‘불꽃의 아들’인데, 그 만큼 많은 일화와 별명을 가진 이도 드문데, 대표적인 게‘보스’,‘왕초’내지 ‘장(張) 기자’,‘야전사령관’등이었다. 훗날 한국일보 사사(社史)는 그를 ‘제왕, 그러나 이따금 눈물을 떨구는 폭군’이라고 표현했다. 장기영 어록도 멋졌다.
“신문기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시와 그림이 가득 찬 신문, 이것이 미래의 신문이다.” 섬세한 시인이자 호방한 장군이던 그가 왜 중요한가? 세간의 통념과 달리 언론사 오너는 지면제작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친다. 그래서 게이트 키퍼 중의 게이트 키퍼다.
지면에는 어떻게든 오너의 퍼스낼리티와 가치관이 묻어난다. 그래서 사주는 기자 이상의 기자이고, 신문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핵심이다.(편집권을 무소불위의 기자 권리로 착각하는 민노총 소속 언론노조원만이 그걸 모른다.) 언론사주의 능력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게 앞에서 언급한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의 주인공 방우영 명예회장이다.
당시 꼴등 신문 조선일보를 일으켜 세우려는 그의 고심참담이 새삼 놀라운데, 그 역시 신문쟁이 중의 신문쟁이었다.(실제로 경제부기자 생활을 꽤 오래 했다.) 일테면 취임 초 그가 내걸었던 구호가 이랬다.
“조선일보라는 제호만 빼고 다 바꿔라”
삼성 이건희 회장이 내세웠던 신경영의 원조가 그였을까? 조선일보는 편집이 우수하다는 전통을 만든 것도 그가 취임한 뒤에 만들어졌다는 것도 상식이. 방 명예회장은 인간미도 있었다. 이런 일화를 나는 기억하는데, 1960년대 그때 신문배달을 위해 그 자신도 지프를 타고 서울 외곽을 돌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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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bc 메인뉴스의 진행을 맡고 있는 손석희 보도부분 사장./사진=jtbc 캡처 |
손석희의 jtbc 좌편향 전체를 공론화할 때가 지금
채 밝지 않던 그때 간혹 동네 멍멍이를 지프가 들이받을 때도 있었다. 요즘 정서론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걸 횡재라고 당시 수송부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날 오후엔 사내에서 보신탕 파티를 벌였다. 방 명예회장, 주필 선우휘도 가세해 꽤 푸짐했다. 그런 구수한 풍토에서 신문경쟁만은 치열했다.
조선일보의 경쟁 상대는 전통의 동아, 젊은 패기의 한국과 함께 1965년 막 창간됐던 세련된 중앙일보였다. 막강 자금력에 창간 직후부터 좋은 지면으로 무장한 이 신문 앞에 방 명예회장은 실로 긴장했다. 당시 조선일보의 상황을 그는“앞뒤로 꼽추 신세”였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중앙일보는 1등 할 생각 마십시오. 1등하면 재벌신문이라고 얻어 맞으니 2등만 하세요.”
당시 신문협회 부회장이던 중앙일보 홍진기 사장에게 그가 그렇게 언중유골의 농담을 하곤 했다. 그만큼 경쟁은 치열했다. 자, 옛날 얘기는 여기까지다. 지난 주말 나는 “리콴유 29일 국장(國葬)…박근혜 참석”이란 막말 자막 사고를 낸 종편 jtbc를 화끈하게 때렸다.
의외로‘애물단지 jtbc’에 대한 비판은 드물다는데, 언론권력이기 전에 공공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 관심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 자막 파문은 국가수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 그 사고는 얼치기 좌파 손석희의 jtbc가 만든 집단적 사고의 하나라는 게 내 비판의 요지였다.
더 중요한 건 이 기회에 선동보도로 일관했던 보도부문 사장 손석희의 jtbc 좌편향 전체를 공론화하자는 요지였다. 그래서 감성팔이 앵커 손석희에 대한 경고만큼 홍석현 회장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선대(先代) 회장이 어렵게 키워온 중앙일보, 사업보국 기치의 삼성그룹과 연고가 있는 이 언론사가 이렇게 막가는 책임을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중앙일보와 jtbc를 걱정하나?
중앙일보 출신인 내가 나서서 비판의 글을 쓰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만나는 분 모두가 중앙일보와 jtbc를 걱정했다. 역사학자 이인호 선생도 KBS 이사장이 되기 훨씬 전부터 날 붙잡고 그 얘기로 땅이 꺼졌다. 그건 거의 분노에 가까웠음을 밝혀둔다.
중앙일보 출신이지만 훗날 조선일보 주필을 지냈던 언론인 류근일 선생도 “선대 회장께서는 그렇게 안 했는데….”라며 어이없어 했다. 그런 여론을 홍 회장이 알아야 한다. 아니 그 스스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지난 글대로 홍 회장은 중앙일보-jtbc 좌편향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우파인데 아들 홍정도가 좌파라서…”라고 변명한다. 그런 무책임과 달리 중앙일보와 jtbc가 해야 할 일은 정통언론으로 이 나라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 그리고 다가올 통일을 전후한 의미있는 사회적 기여가 아닐까?
이미 홍 회장이 백상 장기영이나 방우영 명예회장과 또 다르게 이 나라 언론역사에 기여한 분이다. 세상이 그걸 안다. 1990년대 이후 가로쓰기와 섹션신문을 시도했고, 글로벌 감각을 지면에 불어넣는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유연하고 지적인 이미지에 주미대사를 지낸 그는 이미 한국사회의 거물이다. 그리고 올해로 창간 50년인 중앙일보는 현대한국의 재보(財寶)가 맞다. 옛 TBC의 영광을 살릴 jtbc를 손에 넣으면서 종합미디어그룹의 날개를 단 것도 멋진 일인데, 현상적으론 실망스럽다.
특히 jtbc의 좌파 상업주의 처신은 기대를 저버린 일이다. 장기영의 저돌성, 방우영 명예회장의 뚝심과 또 다른 매력을 가진 홍 회장의 변신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걸 완성시키는 게 3세 경영인 홍정도의 임무다. 젊은 층을 잡는다며 좌파 코스프레로 틈새시장을 노리는 잔꾀 따위는 정도(正道)에서 크게 멀다.
그렇다면 막말 자막 사고는 jtbc와 중앙일보가 거듭날 수 있는 좋은 계기일 수도 있다. 한국사회를 그걸 기대한다.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이 모든 조언이란 현대사와 함께 해온 증언자 중앙일보와 jtbc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린, 당신의 변화를 기대한다. /조우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