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정 막말 파문에 가려진 지휘자 정명훈의 도덕적 해이

   
▲ 이원우 기자
대학생 시절 나의 주된 칼럼 소재 중 하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열심히 경제학 공부를 하고 나면 언제나 원칙과 반대로 정책을 집행하고 있었던 문제있는 정치지도자인 그 사람. 하지만 나는 속마음으로도 그를 맹렬하게 미워하고 있었을까? 그건 좀 다른 문제다.

한 번은 이런 어이없는 망상을 해본 적이 있다. 20대 청년으로서 열심히 반(反) 정부적 글을 써대고 있는 나를 발견한 청와대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온다면 어떨까. 겉으로는 짐짓 비싼 척을 했겠지만 속으로는 만세를 불렀을거다. 그리고 대통령을 인터뷰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당연히 절대로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고 나자 신기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 뒷일 생각 안 하고 그저 뜨겁게 대통령을 비판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나의 펜 끝이 조금쯤은 누그러드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혼자만의 망상 속에서 글 쓰는 이의 지조와 자존심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고 나서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린다. 동료나 선배 기자들 중에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비판하고 싶지만 서울시청과 청와대를 출입하다 보면 마음이 누그러든다는 내밀한 증언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소재’로 삼았던 VIP급의 취재원이 내 글을 읽는다는 것. 그들이 내 글에 반응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부담스러우면서도 짜릿함이 공존하는 상황 아닌가. 망상 속에서 떠올렸던 ‘인터뷰’ 장면도 기자들 사이에선 마냥 비현실적인 일만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정명훈 아성에 도전 못하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들

‘박현정 성희롱 파문’으로 시작된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이후 어언 3개월이 지나고 있다. 그새 봄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여전히 겨울의 그것에서 별로 해빙(解氷)되지 못했다. 왜일까. 이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에 일종의 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울시향 문제에 파고들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인물이 있다.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다. ‘국가대표 예술가’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마에스트로급의 인물에 대해 냉정하게 고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서울시향 파문에 대해 의미 있는 담론을 생산할 수 없다.

문제는 정 감독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시점은 2014년 12월 2일. 이 날은 박현정 대표를 규탄하는 서울시향 직원들 17인이 각 언론사에 ‘호소문’을 배포한 시기다. 여성 CEO가 남성 직원들을 성희롱하고 각종 인사 전횡을 저질렀다는 쇼킹한 내용이 전해지자마자 온 나라는 들썩였다.

다들 놀라는 와중에 놓친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이 호소문의 ‘원작자’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왠지 17인이 한 자리에 모여서 기자회견이라도 한 번 했을 것 같지만 그런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문서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배포돼 결국 ‘박현정 대표 사임’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반면 정명훈 예술감독은 재계약에 성공했다.

지난 1월 하순 정명훈 감독에 대해 서울시 감사관이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자. 갑작스런 일정 변경, 항공권 부당지급 등 정 감독의 부적절한 행동이 공식적으로 포착됐다. 희한한 사실은 이와 같은 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여기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일종의 음모론적(的) 문제 제기를 해 보자면 이렇다. 대다수의 언론사에서 서울시향 관련 사건은 1차적으로 문화부 기자들에게 할당됐다. 문화부 기자들과 정명훈의 관계는 어떨까. 그 일단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지난 1월19일 정 감독의 신년 기자회견 때 나왔다.

정명훈 예술감독의 서울시향 부임 10년을 맞아 개최된 이 기자간담회는 정 감독이 박현정 대표와의 충돌 이후 처음으로 취재진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그의 입에 시선이 모아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50분 정도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밝히던 정명훈 감독은 갑자기 “지금까지 말로 다 설명을 했지만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된다”며 슈만의 음악 두 곡을 즉석에서 연주했다. 10분 안팎의 피아노 연주 이후 취재진들 사이에서는 박수가 나왔다고 한다.

   
▲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 3월11일 오전 10시 반부터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사진=연합뉴스TV 화면 캡처

언론계 말석에 앉아있는 기자가 감히 업계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두렵지만 그래도 한 마디를 하고 싶다. 그 어떤 원로배우의 연극에도, 그 어떤 뮤지컬 스타의 언론 리허설에도 이상할 정도로 박수를 치지 않는 게 대한민국 문화부 기자들이다.

자부심(?) 빼면 시체인 그들이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해명을 ‘연주’로 갈음한 정명훈 감독에게 박수를 보냈다는 것. 이 사소한 장면 하나만으로도 업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언젠가는 정명훈을 인터뷰 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는 그들 중 누구도 정명훈을 공격하는 ‘발칙한 작전’에 돌입하지 않았다는 이 불길한 음모론이 사실이라면 참담한 일이다. 대한민국 문화부 기자들의 ‘펜’은 정명훈의 ‘팬’으로 변해버린 것인가?

박현정 사건이 ‘산업부’ 기자들에게 할당됐다면

반쯤은 장난스런 생각이지만 박현정 사건이 경제부나 산업부에 우선적으로 할당됐다면 추이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CEO 마인드’로 서울시향의 현주소를 바라보면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제들의 상당수는 문화예술계 특유의 ‘끼리끼리’ 문화, 해외에서 인정받으면 국내에선 제멋대로 굴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사대주의적 발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언제까지 이런 풍경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할까.

정명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늘 돌아오는 대답은 ‘세계적인 예술가니까 좀 봐줘도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반론들이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공식적으로는 독립된 재단법인이지만 서울시의 출연금(出捐金)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그렇게까지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세금으로 돌아가는 오케스트라에서는 일하지 않는 게 정답 아닐까.

자유로운 예술가는 물론 매력적인 존재지만, 예술가라고 해서 범죄를 저질러도 되는 건 아니다. 봐줄 수 있는 건 도덕의 영역까지만이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가치 앞에서는 대통령도 서울시장도 국가대표 예술가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냉정한 관점에서 서울시향을 바라보자. 박현정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서울시향의 방만 경영은 수차례 지적을 받고 있었다. 논란 직전인 2014년 11월27일, 서울시의원 문형주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의 시정 질문 내용은 정명훈 예술감독과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성토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정명훈 예술감독은 부임 10년을 맞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서울시의회의 호출에 응한 일이 없다. 이날 시정질문에서도 정감독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대타’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문형주 의원이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은 예의 ‘일정변경’ 문제다. 문 의원은 “작년 9월 빈 국립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이 갑자기 사임을 하게 되면서 정명훈 감독에게 오페라 공연 지휘 요청이 들어온 일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정 감독은 빈 오페라 공연 지휘를 하고자 이미 오래 전에 확정이 되어 있던 시향의 공식 공연일정을 네 개나 변경했다”고 지적했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작년 4월부터 확정돼 있던 통영 공연이다. 국제음악제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 소도시에서 정명훈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터. 서울시향의 공연 소식에 티켓이 700장이나 판매된 상황이었지만 정 감독은 이 일정의 급작스런 변경을 요구했다.

이 결정은 박현정 당시 서울시향 대표와 정 감독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빈에서의 정명훈은 ‘동양의 실력 있는 음악가’ 중 하나일 뿐이지만 통영 시민들에게 정 감독은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럼에도 통영시의 그 마음을 저버렸다는 점을 좌시할 수 없었다는 게 박현정 전 대표의 주장이다.

시정질문에서는 정 감독이 ‘개인을 위한 협찬에만 주력한다’는 사실도 지적됐다. 정명훈은 서울시향 예술감독 이외에도 사단법인 미라클오브뮤직 이사장, 사단법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등을 함께 맡고 있다.

개인적 활동 성격이 강한 나머지 두 단체에 대해서는 상당한 협찬을 끌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서울시향에 대해서만은 협찬 실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 지적됐다. 피아노 리사이틀 전국순회공연 수익금이나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나온 공연‧협찬 수익금을 정 감독의 개인 재단인 미라클오브뮤직(MoM) 기금으로 펀딩했다는 내용도 나왔다.

정 감독의 ‘비행기 티켓’ 논란은 이미 과거에도 불거진 적이 있는 ‘고질적 문제’다. 2009년 매니저에게 제공된 비즈니스 항공권을 아들과 며느리가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1300만원이 환수된 사실이 있다.

실제로 사용되지 않은 항공권 비용으로 4100만원이 지급된 적도 있었다. 제주도의 한 여행사에서 왕복항공권 2매를 구입했다는 내용으로 서울시향으로부터 돈을 지급받았지만 결국 티켓은 당일 취소됐다는 것이다.

이외 서울시향이 계약서에 명시되지도 않은 고급호텔 투숙비를 지급한 사실, 스스로 설립한 사단법인 MoM에 기부금을 낸 후 소득공제를 받은 사실 등 숱하게 많은 ‘돈 문제’가 불거져 왔음에도 ‘예술가 정명훈의 아우라’는 거의 모든 논란을 덮어버린 채로 2015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 감독이 돈 문제에서 명확하지 않은 태도로 일관한다는 인상은 박현정 대표와의 인터뷰에서도 여러 차례 감지됐다.

17인의 호소문...박현정에 가혹하고 정명훈에 관대했다?

다시 ‘17인의 호소문’으로 돌아가자. 이 문서에서 제기된 ‘박현정 저격’ 내용은 그나마 박 대표의 사임으로 일단락됐으니 잠시 뒤로 미뤄두겠다.

익명으로 작성됐다는 점 이외에도 이 문서의 진짜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다. 성희롱과 폭언 부분을 제외하면 호소문의 상당 부분이 ‘정명훈과 호흡을 맞춰주지 않는 박현정’을 성토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문서에는 ‘박현정 대표이사는 본인의 문제를 예술감독의 문제로 전가’ ‘본인의 책임을 방기하고 예술감독에게 전가’ 등의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박 대표가 정명훈 감독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점을 ‘자질부족’ 항목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대표이사가 예술감독에게 불만을 제기하면 자질이 부족한 것인가? 익명의 17인들은 이 호소문에서 정명훈의 편에 서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들켜 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한편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소속 수사관 8명은 지난 11일 오전부터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시향 사무실 압수수색을 시작했다. ‘17인의 호소문’의 원작자를 밝혀달라는 진정인(박현정 전 대표)의 진정서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어떤 여성 CEO의 폭언 스캔들로 촉발된 이 사건은 어디까지 더 커질 수 있을까. 국민들은, 그리고 대한민국 문화부 기자들은 이 사건의 본질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을까. 촛불 하나를 켜드는 심정으로 계속 이 사건을 주목해 볼 작정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

(이 글은 굿소사이어티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