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삼학'과의 경쟁…직업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으로 시장 승리자 등극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기업가연구회는 자유주의 학자 및 저술가 20여 명이 모여 발족한 모임이다. 한국 경제의 근간이 되는 기업가들의 업적을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업가정신과 시장경제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져 성황리에 연구회를 마무리 했다.

진로의 창업자인 장학엽에 대한 연구는 정소담 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가 맡았다. 정 아나운서는 발제문을 통해 장학엽이 끝내 관철했던 '자기 직업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이야말로 진로가 일궈낸 성공의 근본이라고 밝혔다. 아래는 정소담 아나운서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정소담 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한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잔 하고 싶은 그곳에서 “참이슬 한 병!”을 외치는 사람과 아닌 사람. 당신은 어느 쪽인가.

전자이든 후자이든, 그저 '쓴 맛’으로 치부되기 십상인 소주를 조금이라도 대중의 입맛에 맞게 빚어내기까지 '진로’가 걸어 온 그 도전과 모험의 역사는 누구에게나 읽힐 만한 가치가 있다. 진로의 창업주 장학엽. '진로’를 결정한 순간 그는 마치 운명처럼 그것을 자신의 인생으로 바꿔냈다. 지금부터 그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악마가 네 가지 동물의 피를 거름 삼아 빚어 인간에게 준 선물이기에,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에는 양같이 온순하나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납게 되고 조금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추거나 노래 부르며, 더 마시게 되면 결국 돼지처럼 추하게 된다.”

탈무드에 나오는 술의 기원이다.

한편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장진주(將進酒)』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다 흔적 없이 사라져도, 오로지 술꾼들만 그 이름을 남겼다네.(古來聖賢皆寂寞, 惟有飮者留其名.)"

인류의 시작과 발자취를 함께 하는 기나긴 술의 역사는 각 문화권마다 술에 관한 고유한 의미와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왔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술’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중에서도 '한국인의 술’ 소주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서민의 애환을 달래는 술이라는 수식이 곧잘 따라붙지만, 소주는 계층을 벗어나 연령, 성별, 직업, 지역의 구별 없이 보편화 된 한국인의 술로 보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인생이 쓸수록 소주는 달다는데 갈수록 먹고 살만해 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지표인지 덜 쓴 소주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는 독주(毒酒)로 대표되는 소주의 도수를 갈수록 낮추는 추세다. 1924년 35도로 출발한 소주는 절반가량인 18도까지 낮아지며 대중성을 획득했다.

소주에 대한 해외 인지도도 높아져 이제는 글로벌 한류식품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서구권에서는 '코리아 위스키’ 소주가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유튜브에는 파란 눈의 외국인이 찍어 올린 '소주를 마시는 법’ 따위의 동영상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민족의 술을 넘어 전 세계 애주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한 소주. 한국 소주가 걸어온 역사에는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쓰디쓴 소주를 삼켜 온 우리 민족의 애환과 희망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언제부터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을까?

소주, 증류식이냐 희석식이냐

소주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소주는 중세 페르시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됐다. 소주 만들 때 쓰는 주둥이가 달린 '소줏고리’가 몽고군에 의해 전해지면서, 이 땅에는 고려 후기에 급속도로 퍼졌고 평양의 문배주, 개성의 아락주, 안동의 안동소주, 진도의 홍주, 제주의 고소리술 등, 몽고군이 오래 주둔했던 곳에서 생겨난 증류식 소주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원리를 살펴보면, 증류식 소주는 단식 증류기를 이용해 만든 소주다. 원료로는 전분이 많이 들어 있는 쌀, 보리, 옥수수 같은 곡류와 감자, 고구마 등을 쓴다.

   
▲ 1959년 방송된 '진로'의 CF는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 광고이자 국내 최초의 'CM송 삽입' 광고였다. /사진=진로 CF 화면 캡쳐

반면 후일에 발명된 제조 공법에 의한 희석식 소주는 알코올 농도가 높은 주정에 물을 타서 희석하는 방식으로 만든다. 원료는 같지만 연속식 증류기로 주정을 만들기 때문에 95% 이상의 고농도 알코올을 얻을 수 있다. 이 주정을 20도 안팎의 농도로 희석해서 소주를 만드는 것이다.

전통 증류식 소주는 술을 빚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양조주에 비해서 쌀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희석식 제조공법이 개발된 이후 대다수 양조회사들은 증류식 소주에서 희석식 소주로 제조방식을 바꿨다.

1924년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한 장학엽은 그러나, 끝까지 우리 고유의 증류식 소주를 고집했다. 희석식 소주는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진로는 먼 후일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장학엽에게 위기는 어쩌면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시계 바늘을 1923년으로 돌려보자.

교편 내려놓고 술을 빚기 시작하다

1923년 4월. 황해도 곡산 공립 보통학교. 억압된 울분의 합창이 교사를 메웠다. 나라 잃은 청년들의 사무친 절규였을까.

“동국(東國) 춘산의 방초녹음(芳草綠陰)도 서풍추천(西風秋天)에 하염없고나. 적군(適君)은 청춘 소년 자랑 마시오. 어언에 백년낭발(百年浪髮) 가석(可惜)하도다. 귀함도 귀하다 가는 광음(光陰)은 일분일각이 천금이로다.”

권학가(勸學歌). 젊었을 때 세월을 낭비 말고 부지런히 공부해서 뜻을 세우라는 내용을 담은 곡에 불과하건만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의 붉은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맺혔다.

그 날 저녁. 조선어로 권학가를 합창시킨 교사는 교장실로 불려갔다. 후지야마 키요시라는 이름의 일본인 교장 앞에 불려가 모욕적인 힐책을 듣고 만 젊은 조선인 교사의 이름은 장학엽. 그의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

장학엽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삼화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진남포공립상공학교를 졸업한 그의 꿈은 변호사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밑으로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과 연로한 부모님. 결국 장학엽은 진남포에서 상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황해도 곡산에 소재한 곡산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교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교사는 일본인이었다.

무단정치로 말미암아 항일과 독립정신이 더욱 거세게 일어 3.1운동이 일어났다고 판단한 일본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조선 식민 통치의 방법을 변화시킨 때다. 그 일환으로 조선인 교사를 교단에 서게 하고 조선어 과목을 교육 기본과목으로 설정하도록 했으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시도까지 멈췄을 리 만무했다.

청년 장학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존경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가 사직을 강요받고 교단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됐다.

곡산 고등학교에서 사표를 쓰고 나온 장학엽. 이내 결심한다. '내 손으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의 실력 있는 젊은이들을 길러내야 한다. 그래서 내 강토, 내 산하를 더럽힌 일본 침략자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말리라.’

육영의 꿈을 이루자니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일본이 막대한 자금과 기술을 동원하여 광산, 철도, 금융 등 웬만한 사업은 독점하고 있던 때라 조선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이라야 정미소나 양조장 따위가 고작이었다.

고민 끝에 장학엽은 양조업의 경험이 있던 홍석조, 강기욱 두 동업자와 함께 양조업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각기 5백 원씩 투자한 자본금 1천5백 원의 합자회사 '진천양조상회’가 탄생한다. 술의 이름은 '진로’로 정했다. 1924년 가을, 그의 나이 21살 때였다.

치열한 술들의 전쟁, 사업은 실패로…

출범 첫해 '진천양조’는 700석의 소주를 생산했다. 이듬해에는 850석, 그 이듬해에는 880석, 그리고 1927년에는 900석을 생산하는 등 생산량은 해마다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경영 수지면에서는 적자가 누적돼갔다.

주둥이 달린 주전자와 마당만 있으면 누구나 양조업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양조업계의 경쟁은 너무나 치열했기 때문이다. 이미 자본을 확보한 대규모 양조장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진천양조상회는 3만 2천원에 달하는 부채를 남기고 간판을 내리게 된다. 당시 쌀 1석의 값이 33원 가량이었으니 얼마나 큰 빚인지 짐작할 만하다.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자 장학엽은 깊은 실의에 빠지고 만다. 노름에 손을 대고 술로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사업을 중단하고 절망의 나락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2년여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 때 고생은 도대체 어떻게 디내왔는디 모를 디경이디요. 오마니도 근심이 태산 같았어요.”

그러나 마냥 실의에 빠져 지내기에 그는 아직 젊었다.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부모님의 따뜻한 격려는 젊은 장학엽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실의를 딛고 일어난 장학엽이 찾아간 사람이 있었으니 평양에서 동원양조장을 경영하는 생면부지의 조동원이다. 장학엽이 계획은 그의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술을 용강에 들여와 팔아 보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중간 도매상.

조동원은 호의적이었다. 술은 얼마든지 대어 줄 터이니 용강에서 팔아보라고 승낙해 준 것이다. 그렇게 다시 양조업계로 돌아온 장학엽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뛰었다. 이익은 많이 나지 않았어도 기꺼이 열정을 다했다. 그 같은 성실함과 열정에 감명 받은 조동원은 장학엽에게 자신의 사촌동생인 조동식과의 양조장 동업을 권유했다.

결국 장학엽과 조동식은 각기 1천5백 원씩을 투자해 기양양조장을 인수한다. 상호도 예전의 진천양조상회로 바꾸고, 제품명도 다시 진로로 확정했다. 1927년, 절망을 딛고 재건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름만큼 독특한 맛, 흑국소주를 개발하다

그렇게 재기한 장학엽은 술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한다. 치열한 양조업계에서 경쟁력을 갖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주의 맛과 질에 있어 차별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없는 연구와 실험의 반복 끝에 그는 결국, 그 이름도 독특한 흑국(黑麴) 소주를 만들어 낸다.

흑국은 누룩을 만드는 씨가 되는 빛깔이 거무스름한 곡식이다. 흑국으로 만든 소주는 재래식보다 많은 양의 소주를 만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쓴맛을 지녀 일본인 양조업자들이 만드는 희석식 소주와 차별화하기에도 적합했다. 독특한 쓴 맛을 지닌 우리 고유의 증류식 소주. 마침내 '진로’ 특유의 쓴 맛을 지닌 소주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 1955년 진로 소주 라벨 /사진=하이트진로 홈페이지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장학엽의 '흑국 소주’는 특유의 씁쓸한 맛으로 애주가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당시 평양에 소재하던 한호 상회, 서연 양조상회 등의 대규모 양조회사와는 도저히 자본으로나 규모로나 경쟁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지만, 흑국소주가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끌어내면서 사업은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치열한 양조업계에서 열악한 조건을 딛고 품질 하나로 승부해 일궈낸 쾌거였다.

사업의 안정으로 빌린 돈 1500원도 곧 상환한 장학엽은 동생 장학섭을 불러들여 생산을 맡기게 된다. 자신은 돈을 변통하는 일, 술을 판매하는 일 등 주로 외야 측면의 활동을 하고 동생 장학섭에게는 내부 생산 관리를 전담하도록 하는 경영의 2원 구조를 닦아나갔던 것이다.

당시 형제가 가장 중요시 했던 것은 단연 품질관리였다. 치열한 양조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술을 잘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병 더!” 문화를 태동한 유리병 소주의 시작

앞서 언급한 시인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 편’이라던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시인이었다. '말술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의 이 사자성어에 등장하는 술 한말은 어느 정도의 양일까? 1말이 18L정도이니, 소주 한 말은 지금 우리가 마시는 소주의 50병에 해당하는 양이다. 그러나 소주를 원래부터 한 병, 두 병 셀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학엽 형제가 술을 만들어 팔던 1930년 대 초반까지만 해도 술은 으레 되나 말로 판매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 장학섭이 엉뚱한 제안을 한다.

“형, 외국에서는 술을 유리병에 담에 판다는데, 우리도 술을 유리병에 담아 팔면 어떨까?”

그는 동생의 의견을 받아들여 최초로 유리병에 담긴 소주를 판매하게 되는데, 뜻밖의 아주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생산과 출고의 일률적인 관리가 용이하고 시장까지 전달되는 과정도 한결 간편한 유리병소주가 도매상과 소비자들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흑국’과 '유리병’이라는 차별화로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진천양조상회’는 생산량을 대거 증가시켜 나갔다. 일본인 양조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법으로 묶어놓은 생산량도, 다른 양조장을 흡수 또는 병합함으로써 증대시켜 나갔다.

재건 첫 해에 160석으로 시작한 진천양조의 생산량은 1934년에는 무려 3000석에 이르렀다. 당시 국내 양조업계에서 13위를 기록하게 된 놀라운 성장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브랜디를 만들다

장학엽의 새로운 도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중국으로 나가던 사과의 수출길이 막혔던 때다. 썩어 가는 사과가 산더미를 이루는 것을 본 그는 사과를 이용해 소주 대신 브랜디를 만들어 보리라고 결심한다.

사과를 이용해 브랜디를 만들면 틀림없이 애주가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실험 끝에 마침내 40도의 알코올 성분을 가진 맛좋은 사과 브랜디를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이 땅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브랜디였다.

사과 브랜디 역시 흑국소주에 이어 대성공이었다. 무엇보다 사과 브랜디는 소주나 막걸리와 달리 그 생산량을 제한 받지 않았고, 사과 특유의 독특한 맛으로 애주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 무렵 우리 민족은 역사적인 1945년 8․15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은 절망을 딛고 성공적으로 재기한 장학엽의 인생에 다시 한 번 먹구름을 드리운다.

국제시장에서 장학엽의 눈에 들어온 건…

6.25 동란으로 가족들과 뿔뿔히 흩어진 장학엽은 피난 대열에 끼어 부산까지 흘러 내려온다. 지난 날 젊음을 모두 투자해 일군 사업과 공장, 재산은 모두 이북에 남겨둔 채 대동강을 건너 남쪽 땅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월남한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마흔이 넘은 장학엽도 먹고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고구마와 감자로 연명하는 고난의 세월이 시작됐다. 이미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한 차례 성공적으로 재기의 역사를 썼던 장학엽. 다시 찾아온 역경의 시절에 두 발을 딛게 된 부산 땅은 과연 장학엽에게 기회의 땅이 되었을까?

어느 날 국제시장을 배회하던 장학엽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상점 진열대에 놓여 있는 소주 한 병이었다. 당시 부산에는 소주 공장이 한 곳밖에 없었다. 그는 그 길로 그 소주를 만드는 동화양조를 찾아간다. 동화양조 사장 오명구는 그가 이북에서 '진천양조상회’를 운영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 장학엽이 양조업을 시작한 이유는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꿈 때문이었다. 이미 향리에서 야학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던 장학엽. 자라나는 학생들을 훈도하고 민족의 자각심을 고취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던 그의 꿈은 그렇게 첫 발을 내딛었다. /사진=하이트진로 홈페이지

장학엽은 그 자리에서 오명구에게 동업을 제의했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오명구는 기꺼이 동업을 수락했다. 자본주인 오명구는 자기 소유의 공장과 설비 및 원료 등을 출자하고 장학엽은 기술 제공과 판매를 담당하되 이익금은 반분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자본과 기술이 결합하게 된 동화양조는 이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동화양조의 1일 판매 실적은 80상자를 넘어서게 된다.

자본 없는 기술자로서의 설움

그러나 이때부터 장학엽의 설움은 시작된다. 사업이 흥하자 오명구가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명구는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이익금을 반분하기는커녕 인건비조차 지불하지 않았다. 장학엽은 처음의 계약은 차치하고 생활비만이라도 수중에 들어오면 계속 일하려했으나 그나마도 받지 못했다.

그러다 그는 다시 구포양조라는 공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박건백이라는 자가 소유하고 있던 구포양조는 당시 빚만 1억원 이상 지고 있는 부실 공장이었다. 장학엽은 이번에도 이윤을 반반씩 분배하는 조건으로 공장 경영을 맡게 된다. 그러나 구포양조의 낡은 설비로는 도저히 양질의 소주를 생산하기 어려웠다.

생각다 못한 그는 '선금 판매제’를 생각해냈다. 도매상으로부터 먼저 계약금 성격의 선금을 받자는 것이었다. 황당무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소주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 하는 당시 실정에서는 전혀 근거 없는 얘기도 아니었나 보다.

그의 판단은 맞아 들었다. 도매상들로부터 선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자금으로 구포양조의 낡은 설비를 대폭 개선해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이렇게 탄생한 것이 낙동강 소주다. 낙동강 소주는 부산에서 크게 이름을 날렸다. 이로써 빚더미에 놓여있던 완전부실공장이었던 구포양조는 배신자 오명구의 동화양조와 치열한 경쟁 관계가 되었다. 동화양조 역시 장학엽의 기술력으로 탄생한 소주를 팔고 있었으니, 모든 것이 엇비슷해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새롭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된다’

고심하던 장학엽은 새로운 전략을 짜낸다. 구포양조의 소주를 광고할 노랫말을 공모하는 신문 광고를 낸 것이다. 그렇게 뽑힌 노랫말에 곡을 붙이고 가사를 적은 인쇄물을 소주병에 붙여 판매했다.

얼마 뒤부터 그 노랫말이 몇몇 술집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노랫가락에 실려 입소문을 타게 된 구포양조는 오래지 않아 동화양조를 누르고 우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포양조의 박건백이 돌변한다. 자본주가 아닌 경영 전문가, 공장주가 아닌 기술자의 비애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차별화된 경영 능력, 독보적인 기술도 자본 앞에 밀리는 현실 앞에 장학엽은 절망했다.

자본과 경영의 합작이 어려운 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이해관계와 경영자의 경영전략이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진로가 이뤄낸 사업적 성공은 경영 기술을 가진 자로서의 승리로 봐도 좋은 만큼, 자본가가 아니더라도 경영을 잘하는 이가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본보기를 장학엽은 제시한 셈이다.

상경

1953년. 오랜 전쟁은 마침내 휴전에 들어간다. 부산에 있던 장학엽도 환도와 함께 서울로 상경한다. 서울로 온 그는 변일규라는 사람으로부터 동업을 제의받고, 서울 영등포 신길동 소재의 1천 4백여 평의 땅을 매입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신길동에 공장이 들어서고 회사명은 서광주조주식회사로 확정됐다.

무엇보다 의미 있던 건 '진로’라는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다. 그간 자본주, 공장주가 아닌 설움으로 사용하지 못했던 '진로’ 두 글자는 제품명으로 비로소 다시 살아나게 된다. 장학엽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진로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진로의 상징 '두꺼비’. 그러나 원래 진로의 상징 동물은 두꺼비가 아니었다. 해방 전 이북에서 사용하던 건 원숭이 마크였다. 이북에서 원숭이는 지혜와 영리함의 상징이었으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땅에서 원숭이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일찍이 브랜드 이미지를 통한 마케팅에 주력했던 장학엽이 이런 지점을 놓칠 리 없었다. 복을 가져다준다는 두꺼비로 진로의 상징동물을 바꾸고 소주에 두꺼비 마크를 새긴 채 1954년 7월, 두꺼비 진로는 첫 선을 보인다.

당시 서울에는 시장의 최대 강자였던 '명성’을 비롯해 '백마’, '명마’, '청로’, '새나라’, '보배’, '옥로’ 등 다수의 업체가 난립하고 있었다. 진로가 생산을 개시하자 그는 곧 주류 도매상을 찾았다. 그러나 그 어느 도매상도 인지도 없는 진로 소주를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명성, 백마 등은 하루에 400 상자씩 팔리고 있었다. 부산에서 가장 잘 팔리던 낙동강 소주가 하루에 70상자씩 팔렸으니 그 수량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차이에 장학엽은 크게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이 무한한 잠재 시장을 정복하겠다는 뜨거운 욕구가 가슴 깊이 솟구쳤다.

장학엽은 여러 도매상을 찾아다니며 떠맡기듯 진로 소주를 넘겼다. '팔지 못하겠으면 맛이라도 보라’며 각 도매상으로 진로를 배달한 것이다. 그리고 영업부 사원들을 프로 세일즈맨화하여 진로소주를 리어카와 자전거 등에 싣고 거리로 나서게 했다. 그렇게 길거리와 시장 곳곳을 누비며 '진미의 진로’라는 이미지를 일반인들에게 심어 나가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같은 마케팅과 진로만의 독특한 톡 쏘는 감칠맛은 점차 시장에서 인정받기 시작한다. 도매상들은 진로의 맛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진로의 시장 점유율은 점차 높아져갔다.

창업 첫 해엔 1050석에 불과하던 생산량은 불과 4년 뒤인 1958년에는 무려 그 10배인 1만 석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생산량이 늘어나면서부터는 일반 대중에게 진로의 이미지를 알리는 마케팅에 더욱 주력했다. '진로 한잔 하고’라는 CM송이 라디오 광고를 통해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CM송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에니메이션 광고를 선보인 것도 진로다. 귀에 쏙쏙 박히는 스피디한 음조는 라디오와 티비를 통해 유행가처럼 퍼져나갔다. 이와 함께 진로는 서서히 한국의 소주 업계를 지배하는 '민족의 술’로 자리매김해 갔다.

1963년에는 항공기 한 대를 전세 내 진로소주병을 매달고 고중을 비행하며 일반 대중에게 '소주는 진로’라는 각인하기 위한 이색적인 광고 전략을 펴기도 했다. 1964년 진로의 시장점유율은 10%대에 안정적으로 진입했다.

숙명의 라이벌, 삼학소주와의 경쟁

진로가 일반대중에게 참신한 맛과 이미지로 시장 점유율을 높여갈 무렵 커다란 강적이 등장한다. 호남 메이커인 삼학소주가 그 주인공.

당시 삼학소주는 고구마를 원료로 한 주정으로 생산하는 이른바 희석식 소주였다. 누룩을 쌀이나 조 등에 배양하여 제조하는 진로소주의 증류식보다는 기술적으로 혁신된 방법이었으므로 제조 공정에서나 원가에서 비교가 되지 못했다.

   
▲ 누군가는 '악마가 인간에게 준 선물’로 묘사했던 술은 한국인들의 삶 속에 착 달라붙어 위로와 다독임을 주는 이슬방울[眞露]이 되었다. /사진=하이트진로 홈페이지

그러던 중 1965년 정부가 소주 제조에 쌀 사용을 금지하는 '양곡관리법’을 발효한 것은 진로에 큰 타격이 되었다. 장학엽 역시 종래의 증류식 소주에서 희석식 소주로 제조 방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삼학과의 소주 전쟁은 진로 반세기의 역사상 가장 어려운 고비의 시간이었다. 종래의 증류식에서 희석식으로 바꾸기 위한 시설 투자를 강행해야 했다. 선발 기업으로서 시장을 구축했으나 기술 혁신으로 무장한 삼학과의 경쟁에서는 고전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삼학소주와 진로소주는 주당들의 기호를 완전히 분열시켰다. 당시의 애주가들은 순하고 단 맛의 삼학소주를 선호하는 '삼학파’와 독하고 쓴 맛의 진로소주를 선호하는 '진로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이 치열한 경쟁은 의외로 간단히 승부가 난다. 삼학이 탈세 사건에 연루되어 회사 문을 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학이 탈세 사건으로 문을 닫지 않았다면 지금의 진로도 없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진로는 삼학과는 달리 차별화 된 마케팅 전략을 끊임없이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당시는 남산과 장충단 공원을 연결하는 지역에 이른바 '방석부대’라는 간이 술집들이 번성하던 때였는데, 진로는 이 방석부대의 여인들을 상대로 보자기, 부채 등 '뇌물’을 전달하며 진로를 손님들에게 권하는 방식의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다고 한다.

삼학이 폐업한 이후 진로는 명실상부한 소주 업계의 독점적 강자로서 자리매김하였다. 1966년에는 중앙 발효를 인수해 주정 일체를 자급자족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서 종합 주류 메이커로서의 진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진로는 그 이후에도 인삼주를 국내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했고 매실주, 포도주 등을 개발했으며 그 후에는 양주 생산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진로 반세기의 경영 전략상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창업자의 철저한 직업 정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공의 이유를 이렇게 자평한다.

“다른 게 있겠습니까? 성심과 성의 하나로 남을 속일 줄 모르고 일하는 데 있겠지요. 이것은 나의 천성적 기질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집안의 불문율의 가훈 같은 것이 작용을 한 것이지요. 평안도 사람의 기질이 있잖습니까? 남을 잘 되게 하고 나도 잘 되자는 것이 그거죠. 선전만을 잘 한다고 해서 기업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은 품질이 중요한 것이지요.”

오랜 숙원이었던 학교 설립, 그 꿈을 이루다

장학엽이 양조업을 시작한 이유는 앞서 이야기 했듯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꿈 때문이었다. 양조업을 통한 자산의 축적은 그에게는 곧 학교의 설립 자본이 쌓여가는 과정을 의미했다. 청년 장학엽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고향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그 꿈은 현실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38년, 한 번의 실패를 딛고 재기에 성공한 장학엽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평안남도 용강에 2년제의 중학교인 명덕학원을 설립했다. 아울러 유치원도 개설했다.

이미 향리에서 야학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던 장학엽. 자라나는 학생들을 훈도하고 민족의 자각심을 고취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던 그의 꿈은 그렇게 첫 발을 내딛었다.

고향 땅에서 뜻을 미처 다 이루지 못하고 이북을 떠나 월남한 이후에도 그는 육영 사업의 꿈을 접지 않았다. 진로를 한국 정상의 주류업체로 성장시킨 그는 1974년, 비로소 학교법인 우천학원을 설립한다. 산하에 우신 중,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최신식 건물과 시설로 이 땅에 배움의 요람을 세우고자 한 꿈을 이뤄내고야 만 것이다.

명실상부한 주류업계의 강자로 우뚝 선 이후에도 그는 사회에 봉사하는 기업, 성실과 신뢰의 경영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각종 지원 사업과 장학 사업을 이어나갔으며 1972년에는 도원 관광을 설립해 높이 112미터의 부산탑을 건립하고 이를 부산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장학엽의 이 같은 사회 공헌 이념에는 민족 자본으로서의 사명이 담겨 있다.

“우리 진로는 지금까지 성장해 온 기반이 내수시장과 관련돼 있어요. 말하자면 한국인이 만든 술을 한국인들이 마셔줌으로써 세워 올린 기업이지요. 이 점을 우리는 깊이 인식하고 민족 자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려고 합니다.”

장학엽의 기업가 정신 : 자기 직업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

누군가는 '악마가 인간에게 준 선물’로 묘사했던 술은 한국인들의 삶 속에 착 달라붙어 위로와 다독임을 주는 이슬방울[眞露]이 되었다. 억압된 울분의 합창을 지휘하는 것에서부터 비전을 키운 진로 창업주 장학엽의 역사는 마냥 이슬방울처럼 맑지만은 않았다.

한 잔 술에 담긴 정신을 혼탁하게 만들려는 움직임은 사방 곳곳에서 공격을 거듭했다. 그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진로(進路/眞露)를 잃지 않게 만든 건 오로지 장학엽이 관철했던 직업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이었다.

한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소주의 역사를 알고 나니 오늘 저녁 “참이슬 한 병!”을 외치고픈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 사람과 아닌 사람. 전자이든 후자이든, 자기 직업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진로를 국내 최대 주류기업으로 일궈낸 장학엽의 기업가정신은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정소담 사회안전방송 전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