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 주인공 윤상원은 공산주의 혁명 꿈꾸던 자…5.18 기념곡 지정 말도 안돼
‘임을 위한 행진곡’을 광주 5.18 기념곡으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고개를 들고 있다. 1980년 이후 노조, 시민단체 등이 국민의례 시 애국가 대신 제창하고 있는 이 곡은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다. 2008년 광주 5.18 행사 후 정부기념식에서 국민의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따라 본 행사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일부 단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기념식 행사에 불참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지정된 기념곡이 없다. 애국가도 물론이다. 애국가가 기념곡으로 지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기념곡으로 지정될 경우, 이는 우리나라 공식 1호 기념곡이 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북한에서 정치적 선전곡으로 이용된 곡이기도 하다.

이에 바른사회시민회의와 자유민주연구원은 광주 5.18 기념곡 지정관련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2일 프레스센터 석류홀에서 관련 전문가들과 긴급토론회를 개최했다. 아래 글은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문제점을 ‘임’과 ‘새 날’의 의미를 중심으로 풀어쓴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임을 위한 행진곡」의 문제점
‘임’과 ‘새 날’의 의미를 중심으로

1. 머리말

어떤 노래가 정부가 주관하는 국가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되려면(혹은 지정되지 않고 제창되려면)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그 가요(특히 가사)에 내포된 메시지가 기념하려는 사건의 정신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가요의 가사에 내포된 메시지가 그 나라의 정치·경제체제 및 존속·발전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것은 만국공통의 기준일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부주관 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되려면 앞서 말한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그 노래에 내포된 메시지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과 부합해야 한다. 둘째 그 노래에 내포된 메시지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부합해야하고, 대한민국의 존속·발전에 부합해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이 두 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면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하여 기념식에서 제창되어야 한다. 이 두 필요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 가요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되어서는 안 된다.

   
▲ 죽은 아버지 영정을 든 아이의 슬픈 모습을 보여주는 이 사진은 광주 5.18의 비극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영정에 나온 ‘조사천’씨는 칼빈 총에 의하여 사망하였고, 국립 5.18 묘지 공식 홈페이지에도 그렇게 밝혀져 있다. 5.18 당시 칼빈 총은 시민군이 쓰던 총이다. '조사천'씨는 시민군이 쓰던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사진=5.18기념재단, 독일 ‘슈피겔’지 사진을 인용 

국회가 이 노래를 기념곡으로 지정할 것을 결의한 마당에, 이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기념곡 지정의 법적 근거가 없다든지, △이 노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결의했으므로, △그 동안 제창되어 온 관례에 따라, △그 노래가 널리 애창되어왔으므로 등등의 이유를 들어 기념곡으로 지정하라고 떼를 쓰는 것은 반국가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의 메시지가 ➀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여부와 ➁대한민국의 정치·경제체제 및 대한민국의 존속·발전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그리고 주최 측에서 요청한 대로, 그 노래 가사 속의 ‘임’이 누구를 의미하며, ‘새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는 글이다.

2. ‘임’은 윤상원을 의미

혹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은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가요의 가사나 시를 정확히 이해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가사의 의미를 노래 부르는 사람이 제멋대로 상정·해석할 여지를 남겨두더라도, 작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그에 따라 가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한용운 자신은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군말』에서 “해저믄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작가 한용운의 의도이다.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상징어로 표현해야 할 ‘님’은 무엇일까? 당시 상황에서 ‘해저믄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양’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멸망한 ‘기룬’(그리운) 조국 혹은 국권을 상실한(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민족일 것이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한 말에서 ‘님’이 ‘헤어진 연인’일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러한 해석이 작가의 의도를 따른 해석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30세의 청년 투사 윤상원(일명: 윤개원)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윤상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작곡자 김종률의 기억과 제2 작사자 황석영(제1 작사자는 백기완)의 기억 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김종률과 황석영의 회고

김종률의 회고에 따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작된 직접적인 동기는 윤상원과 그의 야학동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은 전남대학교의 동문이었고,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야학운동의 동지였다. 젊은 나이에 결혼도 못하고 사망한(윤상원은 1980년 5월에 사망하고 박기순은 1978년 12월에 사망했다) 두 젊은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두 사람의 친구와 가족들이 두 사람의 넋을 달래기 위해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을 결혼시키기로 했다. 두 사람의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은 1982년 2월 윤상원의 시신이 묻혀있는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영혼결혼식을 가졌다.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있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광주의 문화운동가들은 그해 4월경에 당시 광주 문화운동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황석영의 집에 모여서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노래극 테이프를 만들기로 했고, 노래극에 들어가는 하나의 노래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한국일보』 인터넷판 2013년 5월 12일자에 게시된 김종률의 인터뷰 기사>

황석영의 회고에 따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작된 직접적인 동기는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3년(82년의 오기인 듯) 봄 황석영과 극단 ‘광대’의 잔여활동가들이 전개한 「자유 광주」 방송 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광주항쟁 과정에서 죽은 남녀를 주제로 한 넋풀이 극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노래이다. 황석영의 설명에 따르면, 「자유 광주」 방송 활동이란 한 달에 한 개 씩의 노래극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하여 배포하는 활동이었으며, 「임을 위한 행진곡」이 주제곡으로 들어 있는 넋풀이 노래극의 테이프는 「자유 광주」 방송의 세 번 째 작품이었다.<김대령, 『역사로서의 5·18(4): 5·18재판 법리의 모순』(비봉출판사, 2013), 227쪽에서 인용된 황석영의 회고담>

오늘날 윤상원의 평전을 저술한 사람들이나, 광주민주화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사람들, 그리고 광주5·18관련 단체에서 발행한 자료들의 압도적인 다수는 김종률의 회고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황석영의 기억에 동조하는 사람은 황석영 자신뿐이다.

『윤상원 평전』을 저술한 박호재와 ·임낙평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윤상원의 노래로 만들어졌다. 지난 1982년 윤상원의 선후배들은 들불야학 후배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거행하고, 분노와 슬픔과 투쟁의 결의를 노래에 담아 윤상원과 5월 영령들의 영전에 눈물로 헌정했다.”고 기술했다.<박호재·임낙평, 『윤상원 평전』(풀빛. 2007), 21쪽> ‘5·18민주유공자유족회’가 편집한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죽음으로 쓴 5·18민중항쟁 증언록』의 「윤상원」 편은 “친구들은 그들(윤상원과 박기순)의 아름다운 영혼을 하나로 맺어주었다. 영혼결혼식 전후로 작가 황석영 씨 등이 노래극을 준비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지만 노래극은 상연되지 못하고 노래극 테이프만 제작되었었다.”고 기술했다.<5·18민주유공자유족회 엮음,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죽음으로 쓴 5·18민중항쟁 증언록 2』 (5·18기념재단, 2005), 186쪽>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나 그 주변 인사들의 회고에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윤상원도 광주민주화과정에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므로, 이 노래가 직·간접적으로 윤상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오늘날 광주민주화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던 사람들이나, 광주민주화운동을 신성시하는 모든 사람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윤상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은 당시 황석영이 이끄는 문화운동 패의 일원이면서 전남대 학생으로서 대학가요제 입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 학생 가수이자 아마추어 작곡가였던 김종률이 맡았다. 작사는 황석영이 맡았다. 황석영은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 중의 일부 대목을 뽑아서 동석한 사람들과 협의하여 약간 수정해서 노랫말로 만들었다. 김종률에 따르면, “[노래극에서 이 노래가] 영혼결혼식이 끝나고 두 분이 용기를 잃고 풀죽어 있는 후배들한테 부르는 노래이며, 나중에는 전체가 다 합창하는 노래라서” 곡명을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정했다는 것이다.<『한국일보』 인터넷판 2013년 5월 12일자에 게시된 김종률의 인터뷰 기사>

3. 윤상원의 투쟁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의 기념곡 지정 필요조건 충족여부 판단

윤상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부주관 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지 여부, 즉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에 부합하고,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체제 및 대한민국의 존속·발전에 부합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작업을 순차적으로 전행해야 한다. 첫째,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기간 중의 윤상원의 사상과 활동상을 살펴봐야 한다. 둘째, 윤상원이 광주민주화운동기간 중 광주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의 대표성을 확보한 인물이었는지 여부를 추적해봐야 한다. 셋째,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재확인 해봐야 한다.

윤상원은 누구인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던 자

윤상원은 1978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주택은행에 입사하여 서울에서 근무했으나 ‘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입사 6개 월 만에 주택은행을 사직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온 윤상원은 광주 청년·학생운동의 중심인물의 하나인 김상윤이 운영하는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노동운동을 위해 광주시 광천공단 내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일당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는 동시에 그 지역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들불야학’에 참여했다. 뒤이어 빈민청년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윤상원은 전남대 운동권 재학생들과의 연계도 강화했고, 1979년 가을 무렵엔 광주 운동권의 비중 있는 인물의 하나로 부상했다.

10·26이후 정치·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자 전국 각지의 운동권들이 활동을 확대했으며, 윤상원도 혁명적 노동운동을 준비하는 이태복과 1979년 12월 접선되어 혁명적 노동운동단체 결성에 참여했다. 1982년 당국에 적발된 ‘전국민주학생연맹 및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의 주범 이태복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1979년 12월 초순부터…윤상원 등과 만나 노동자조직 구성을 위해 활동하고, 1980년 5월 3일-5일 ‘전민노련’을 결성”했다.<대검찰청, 『공안자료 제1집(좌익사건실록 제13권)』(대검찰청, 1984), 348-349쪽> 윤상원은 전민노련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당국에 따르면, 이태복이 주도하고 윤상원이 참여한 전민노련은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집단으로서의 노동자 집단을 조직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대검찰청(1984), 25쪽> 윤상원은 또 그 해 봄에 결성될 예정인 기성인 운동권의 결집체였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전남지부’의 사무국장으로 내정되었었다.

5·18항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윤상원은 광주의 민족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80년 5월 14-16일 전남대 총학생회 주도로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학생·지식인 혼합 광주 지역 ‘민족민주화성회(民族民主化聖會)’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런 집회의 과정에서 대학생들은 만약 정부가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고 휴교령이나 휴업령이 내린다면 일차적으로는 그 날 오전 10시 학교 교문 앞에서,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12시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서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정부가 5·17 계엄확대 조치를 취하면서 운동권인사들을 예비검속하자 광주지역 민민운동권 인사 및 운동권 학생들의 대부분은 검속을 피해 광주를 떠나 타지로 피신했으나, 윤상원은 체포 경력이 없어 당국의 예비검속의 대상이 되지 않아 광주에 남아서 항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계엄확대 조치와 함께 휴교령이 내리자 전남대생들은 앞서 결의한 바대로 가두시위를 전개했으며, 윤상원은 전남대생들의 가두시위가 개시된 시점부터 녹두서점에서 광주에 잔류한 민민운동권 인사들과 학생 시위를 확대할 대책을 강구하고, 화염병을 제작하여 시위 현장에 공급하고, 화염병 투척방법을 지도했다. 또한 들불야학 팀을 동원하여 투쟁과 관련된 선전·선동물을 제작하여 배포했다.

돌로 공수부대원을 직접 살해했다는 윤상원

윤상원은 5월 19일에는 가두투쟁에 직접 참가하여 진압군에게 돌멩이, 깡통수류탄, 화염병 등을 투척하기도 하고 공수부대원을 직접 살해하기도 했다. 윤상원의 공수부대원 살해에 관해서는 항쟁기간 중 그를 추종하여 활동한 김효석이란 고둥학생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20일 날인가 내가 녹두서점에 점심인가를 먹을라고 와서 쉬고 있었던가 그랬는디 상원이 형이 용용하게 옵디다. 철모하고 단검을 하나 들고 오드라고. 내가 ‘뭔 일이요?’ 물어보니까 ‘내가 한 놈 죽여불고 왔다’ 하더라고. 상원이 형 이야기가 태평극장과 현대극장 사이에서 공수부대와 시위대가 밀고 당기고 했다는 거여. 천변로에서 계속 밀고 쫓기면서 돌멩이를 띵기고 했다는데, 시민들이 도망가면 계속 다들 일정 정도 좇아오다가 다시 대열로 돌아가는데 어떤 놈이 계속 끄트머리까지 좇아오더라 이거여. 근디 상원이 형이 그놈 보니까 비틀비틀하니 술 취한 놈처럼 그러더라 이거여. 그래서 ‘아 저놈을 봐 버려야겠구나’ 생각하고 도망가면서도 시민들한테 ‘저 놈 봐불자’ 그랬다는 거여. 도망가던 군중들도 돌아서서 보니까 혼자 좇아오고 있거든. 그래서 ‘와!’ 하니 좇아갔다는 것이여. 그러니까 그놈이 놀래서 하천으로 뛰어내려 분 거여. 시민들이 하천으로 뛰어 내려가 가지고 그놈을 밟아 부렀지. 그 때 상원이 형이 거기서 큰 돌팍을 들어가지고 대그빡을 찍어 부렀다는 것이여. 그 기념으로 철모랑 단검을 뺏어왔다는 것이여. 아마 그 공수부대원은 죽었을 거라는 거여. 그래가지고 녹두서점으로 철모하고 단검을 들고 왔어.”

<김효석, 「나는 역사의 새벽을 보았다」, 김양현·강현정 엮음, 『5·18항쟁 증언자료집 Ⅳ』(5·18연구소 자료총서 4)(전남대학교 출판부, 2005), 106-107쪽>

윤상원은 21일부터 전 민중의 무장봉기를 촉구하는 선동물을 제작하여 살포했다. 그가 제작 살포한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궐기문」은 다음과 같이 선동했다.

“4백만 전남도민이여, 총궐기하라! 저 원한의 살인마 전두환을, 흉악한 국민의 배반자 유신 잔당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피토하고 죽어간 우리 아들딸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애국 근로자여, 손에 닥치는 대로 공구를 들고 일어서라! 애국 농민이여, 손에 삽과 괭이를 들고 일어서라! 삼천만 동포여, 모두 일어나라!”<박호재·임낙평 저, 『윤상원 평전』(풀빛, 2007), 318쪽>

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한 22일 오전부터 윤상원은 도청의 시민군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청을 점거한 시민군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동조자들을 포섭하고, 도청 앞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여 도청 시민군 지휘부로 하여금 계엄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계속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당시 도청 안에 있는 시민군 지휘부인 시민·학생수습위원회는 다수의 구성원들이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 바른사회시민회의와 자유민주연구원이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석류실에서 공동주최한 <5.18 기념곡 ‘임을 위한 행진곡’ 제정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긴급토론회 전경.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내역을 상세하게 밝히며 곡의 배경과 의미, 문제점에 관하여 발표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윤상원은 무장투쟁을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연일 개최하는 동시에 도청에 가까이 있는 YWCA 빌딩에 들불야학 팀, 극단 ‘광대’ 팀, 기타 운동권 대학생들로 구성된 행동대를 조직하여 도청 진입을 준비했다. 무장투쟁을 위해서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이 결정적인 순간에 투쟁지도부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 윤상원과 그의 민민운동 동지들의 생각이었다.<박호재·임낙평(2007), 364쪽>

윤상원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도청접수를 추진하면서, 계엄군과의 투쟁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광주에 거주하는 모든 미국인들을 도청에 인질로 잡아두는 계획을 동지들과 은밀히 검토하기도 했다. 군부의 광주 진압을 위한 병력투입은 미국의 승인 하에서만 이루어질 것이므로 도청에 미국인을 인질로 잡아두고 있으면 계엄군이 함부로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박호재·임낙평(2007), 379-380쪽> 미국인을 인질로 잡아두려는 윤상원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광주항쟁 지도부를 장악했던 강경파의 대변인, 윤상원

25일 오후 윤상원과 그의 동지들은 도청 접수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그날 오후 5시 경 도청의 학생수습위원회는 전체회의를 개최하여 무기반납문제를 토의하고 있었다. 회의에서 위원장 김창길의 주도 하에 무기반납에 동조하는 성원이 다수를 차지했고, 그에 반대하는 성원은 부위원장 김종배를 포함한 소수에 불과했다. 윤상원은 도청으로 들어가 김창길을 비난하는 고함을 지르며 회의를 무산시켰다. 회의를 무산시킨 직후 YWCA빌딩에 모여 있던 민민운동권 청년들과 지도급 학생들을 도청으로 불러들여 김창길에게 위원장 사퇴 압력을 가했다. 김창길은 위원장직 사퇴의사를 밝힌 후 그의 말에 동조하는 다수의 시민군들과 함께 도청에서 철수했다. 윤상원 일행은 일종의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윤상원은 저녁 8시 경 YWCA로 가서 도청진입을 위해 대기 중이던 청년 학생 1백여 명을 인솔하고 도청에 진입하였다. 도청에 진입한 윤상원은 시민·학생수습위원회에서 무장투쟁 지속을 주장해온 김종배 박남선 등 소수파 지도자들과 합세하여 청년학생투쟁위원회라는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구성했다. 위원장에는 김종배를 내세우고, 부위원장은 정상용과 허규정, 상황실장은 박남선이 맡고, 윤상원은 대변인을 자청하여 맡았다. 이때부터 광주항쟁의 지도부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의 광주 진입작전이 개시되자 새로운 항쟁지도부는 진압군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방침을 결의했다. 진압군이 진격해오면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을 무장시켜 저지하고, 저지에 실패하면 게릴라전을 대항하며, 최후의 순간이 오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켜 전원 자폭하기로 결정했다.<김영택, 『5월 18일, 광주』(역사공간, 2010), 521쪽>

8t 다이너마이트로 자폭하려던 윤상원과 광주항쟁지도부

항쟁기간 중 도청 지하실에는 8톤 트럭 1대 분량 다이너마이트(이리역 폭발사고의 10배 위력을 가진 분량)가 뇌관까지 설치된 상태로 비치되어 있었다. 윤상원 등이 계획대로 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켰더라면 광주 시내의 절반 이상을 쑥밭으로 만들고 수만 명의 광주 시민이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김창길 등 온건파가 군의 폭약전문가들과 협조하여 25일 밤과 26일 낮에 도청 지하실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킬 수 있는 뇌관들을 제거함으로써<지만원, 『12·12와 5·18 상』(시스템, 2009)462-464쪽> 광주 시민 수만 명을 자기들의 자살에 동행시키려던 윤상원 등의 다이너마이트 폭발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5월 26일 저녁 도청에서는 시민·학생 통합수습위원회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정원 30명 중 20여명이 넘는 성원들이 참여한 이 회의에서 김창길이 제시한 무기반납론이 또다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무기반납에 반대하는 소수파가 회의장을 떠난 가운데, 잔류 성원들은 무기반납이 의결되었다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윤상원은 무기를 휴대한 박남선 상황실장(시민군 군사지휘 총책)을 앞세우고 동지들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갔다. 박남선이 무기로 위협하는 가운데 윤상원은 무장투쟁 지속을 강조했다. 무기반납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자리를 떠났고 그들의 결의는 무효가 되었다. 이처럼 무장투쟁을 고수하는데 앞장선 윤상원은 27일 새벽 3시 경, 도청 무기고 앞에서 잔류 시민군 병사들에게 최후까지 저항할 것을 호소했고, 새벽 4시 경 공수대원의 사격에 복부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러한 사상과 활동경력을 가진 윤상원을 기리고 그 투쟁을 계승할 것을 다짐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정부주관 광주운동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필자는 그러기 어렵다 본다.

4. 가사 속의 ‘새날’의 의미

‘새날’의 의미에 대해서도 노래 부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임’의 의미를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새날’의 정확한 의미는 광주민주화운동의 틀 속에서, 특히 광주운동과 관련된 노래극에서 이 노래가 ‘영혼결혼식이 끝나고 윤상원과 박기순이 용기를 잃고 풀죽어 있는 후배들한테 부르는 노래’라는 노래극의 맥락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 노래의 작사자의 의도에 입각하여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속의 ‘새날’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 노래의 가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이 노래의 가사의 의미를 단락별로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는 단락의 의미를 분석해보면, “모든 것을 다 바쳐 일생 동안 함께 투쟁하자고 맹세했던 동지가 싸우다가 죽고, 그가 추구하던 투쟁목표(깃발)만 남았다. 동지는 죽었지만 새로운 세상(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지 말고 투쟁을 계속하자. 세월이 지나가도 동지들의 투쟁은 누군가에 의해 기억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단락의 의미를 분석해보면, “죽은 동지의 영혼이 깨어나서 살아남아 있는 동지들에게 뜨겁게 외쳐대기를 내가 투쟁하다가 먼저 죽었으니 너희도 나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라”라는 뜻이다.

두 단락의 의미를 합쳐서 정리하면, “새로운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다가 먼저 죽은 동지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세상이 실현될 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목숨 걸고 투쟁하자”가 된다.

이같이 정리해볼 때,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속의 ‘새날’은 흔들리지 말고 목숨 걸고 지속적으로 투쟁하여 실현할 새로운 세상을 뜻한다. ‘흔들리지 말고 목숨 걸고 지속적으로 투쟁’해서, 환원하자면 위험하고 어려운 과격한 투쟁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우선 광주운동과 관련된 노래극의 맥락 속에서 찾아보자. 노래극에서 이 노래는 죽은 윤상원이 살아있는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노래다. 그렇다면 ‘흔들리지 말고 목숨 걸고 지속적으로 투쟁하여 실현할 새로운 세상’은 윤상원의 사상 및 활동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전술한 윤상원의 사상과 활동상에 비추어볼 때, 그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목숨 걸고 지속적으로 투쟁해서 실현’하라고 당부한 새로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및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양립할 수 있는 세상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양립불가능한 세상일 것으로 판단된다.

   
▲ 바른사회시민회의와 자유민주연구원이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석류실에서 공동주최한 <5.18 기념곡 ’임을 위한 행진곡‘제정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긴급토론회 전경. /사진=미디어펜 

다음으로 제1 작사자 백기완의 의도에 입각하여 ‘흔들리지 말고 목숨 걸고 지속적으로 투쟁하여 실현할 새로운 세상’의 의미를 찾아보자. 작사자 백기완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성격을 ‘질곡에 빠진 오늘의 모든 변혁, 모든 진보의 거짓과 부패를 깨트리고 지난날의 민중의 싸움을 기리기만 하지 말고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노래라고 규정했다.<백기완, 「아, 임을 위한 행진곡」, 『경향신문』 인터넷판 2013년 5월 8일에 게시된 칼럼> 『윤상원 평전』의 저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성격을 ‘분노와 슬픔과 투쟁의 결의를 담은’ 노래라고 평가했다. <박호재·임낙평, 『윤상원 평전』(풀빛. 2007), 21쪽>

「임을 위한 행진곡」이 ‘지난날의 민중의 싸움을 기리기만 하지 말고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노래요, ‘분노와 슬픔과 투쟁의 결의를 담은’ 노래라면, 가사 속의 ‘새날’은 ‘지난날에 했던 것처럼’ 매우 거친 투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이다.

5. 모시의 틀에서 본 ‘새날’의 의미

그 세상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발췌해온 母詩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의 내용을 살펴봐야 한다. 몸통을 알면 가지의 참뜻을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묏비나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묏 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띠기로 언땅을 들어올리고
또 한발띠기로 맨바닥을 들어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몽창 들어 엎어라

들었다간 엎고 또 들었다간 또 엎고
신바람이 미치게 몰아쳐 오면
젊은 춤꾼이여
자네의 발끝으로 자네 한 몸만
맴돌라함이 아닐세 그려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이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을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시라

돌고 돌다 오라가 감겨오면
한사위로 제끼고
돌고 돌다 죽엄의 살이 맺혀오면
또 한 사위로 제끼다 쓰러진들
네가 묻힐 한 줌의 땅이 어디 있으랴
꽃상여가 어디 있고
마주재비도 못타보고 썩은 멍석에 말려
산고랑 아무데나 내다 버려질지니

그렇다고 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거라
팔다리는 들개가 뜯어가고
배알은 여우가 뜯어가고
나머지 살점은 말똥가리가 뜯어가고
뎅그렁, 원한만 남는 해골바가지

그리되면 띠루띠루 구성진 달구질소리도
자네를 떠난다네
눈보다만 거세게 세상의 사기꾼
협잡의 명수 정치꾼들은 죄 자네를 떠난다네

다만 새벽녘 깡추위에 견디다 못한
참나무 얼어 터지는 소리
쩡,쩡, 그대 등때기 가른 소리 있을지니

그 소리는 천상
죽은 자에게도 다시 치는
주인놈의 모진 매질소리라

천추에 맺힌 원한이여
그것은 자네의 마지막 한의 언저리마저
죽이려는 가진 자들의 모진 채쭉소리라
차라리 그 소리 장단에 꿈틀대며 일어나시라
자네 한사람의 힘으로만 일어나라는 게 아닐세 그려
얼은 땅, 돌뿌리를 움켜쥐고 꿈틀대다
끝내 놈들의 채쭉을 나꿔채
그 힘으로 어영차 일어나야 한다네

치켜뜬 눈매엔 군바리가 꼬꾸라지고
힘껏 쥔 아귀엔 코배기들이 으스러지고
썽난 뿔은 벌겋게 방망이로 달아올라
그렇지
사뭇 시뻘건 그놈으로 달아올라

벗이여
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

꽹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노래 소리 한번 드높지만
다시 폭풍은 몰아쳐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고 그걸로도 안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걸로도 안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쑤셔넣고 아.........

그 어처구니없는 악다구니가
대체 이 세상 어느 놈의 짓인줄 아나

바로 늑대라는 놈의 짓이지
사람 먹는 범 호랑이는 그래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는데
사람을 산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먹는 건
바로 이 세상 남은 마지막 짐승 가진자들의 짓이라

그 싸나운 발톱에 날개가 찢긴
매와 같은 춤꾼이여

이때
가파른 벼랑에서 붙들었던 풀포기는 놓아야 한다네
빌붙어 목숨에 연연했던 노예의 몸짓
허튼춤이지, 몸짓만 있고
춤이 없었던 몸부림이지
춤은 있으되 대가 없는 풀죽은 살풀이지
그 모든 헛된 꿈을 어르는 찬사
한갓된 신명의 허울은 여보게 아예 그대 몸에
한오라기도 챙기질 말아야 한다네

다만 저 거덜난 잿더미속
자네의 맨 밑두리엔
우주의 깊이보다 더 위대한 노여움
꺼질수 없는 사람의 목숨이 있을지니

바로 그 불꽃으로 하여 자기를 지피시라
그리하면 해진 버선 팅팅 부르튼 발끝에는
어느덧 민중의 넋이
유격병처럼 파고들어
뿌러졌던 허리춤에도 어느덧
민중의 피가 도둑처럼 기어들고
어깨짓은 버들가지 신바람이 일어
나간이 몸짓이지 그렇지 곧은 목지 몸짓

여보게, 거 왜 알지 않는가
춤꾼은 원래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는 눈짓 말일세
그렇지
싸우는 현장의 장단소리에 맞추어

벗이여, 알통이 벌떡이는
노동자의 팔뚝에 신부처럼 안기시라

바로 거기선 자기를 놓아야 한다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한 춤꾼은 비로소 구비치는 자기 춤을 얻나니

벗이여
저 비록 이름 없는 병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어깨를 쳐
거대한 도리깨처럼
저 가진자들의 거짓된 껍줄을 털어라
이세상 껍줄을 털면서 자기를 털고
빠듯이 익어가는 알맹이, 해방의 세상
그렇지 바로 그것을 빚어내야 한다네

승리의 세계지
그렇지, 지기는 누가 졌단 말인가
우리 쓰러졌어도 이기고 있는 민중의 아우성 젊은 춤꾼이여
오, 우리굿의 맨마루, 절정 인류최초의 맘판을 일으키시라

온몸으로 디리대는 자만이 맛보는
승리의 절정 맘판과의
짜릿한 교감의 주인공이여

저 폐허 위에 너무나 원통해
모두가 발을 구르는 저 폐허위에
희대의 학살자를 몰아치는
몸부림의 극치 아, 신바람 신바람을 일으키시라

이 썩어 문드러진 놈의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땅의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네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 발띠기에 일생을 걸어라

위에 전재한 「묏비나리」 시 속에 들어있는 밑줄 친 부분의 의미를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한의 청년운동가들에게 보내는 당부

투쟁을 함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며, 목숨을 걸지 않으면 제대로 투쟁할 수 없다.

남한의 사회구조는 살인마의 구조이니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엎어라.

썩은 세상(곧 남한의 현실)을 뒤엎고 역사를 바꾸라.

투쟁하다 죽게 되면 아무데나 버려질 것이지만 그걸 두려워하지 말고 투쟁하라

주인놈-가진자, 곧 자본가들이 죽은 혁명투사들의 영혼마저 죽이려고 혁명투사들의 시체를 매질할 때 대지의 힘을 받아 부활하여 자본가들의 채죽을 나꿔채야 한다.

투쟁하다 죽더라도 다시 부활하여 군부정권을 쓰러뜨리고, 미국(코배기)을 박살내고, 민중의 혁명의지를 고무하라.

민중과 함께 봉기하여 분단의 벽과 미제국주의를 모두 쓰러안고 무너뜨리고 죽으면, 먼저 죽어간 투사들이 새로운 세상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싸우기 위해 봉기하라,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앞서간 죽은 투사들의 뒤를 이어 목숨걸고 투쟁하라고 호소할 것이다.

봉기했다 실패하면 늑대=자본가들이 달겨들어 모진 고문과 고통을 줄 것이다.

늑대=자본가가 죽음의 고통을 줄 때는 살겠다고 버둥거리지 말고 죽음을 각오하고 밑바닥으로부터 타오르는 분노의 불꽃으로 그들에게 맞서면 민중이 들고 일어나 투사들을 살려줄 것이다.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투사들은 봉기한 노동자계급의 품어 안겨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고 사라져야 한다.

투사들은 민중과 힘을 합쳐 가진자들과 이 세상의 껍질을 깨버리고 해방 세상을 이루어내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시, 『묏비나리』의 메시지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하여 「묏비나리」의 메시지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➀남한의 청년 혁명운동가들이 혁명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처음부터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고 운동에 나서서, 썩어문드러진 살인마 구조인 남한 사회구조를 뒤엎어야 한다.

➁혁명투쟁을 하다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더라도 죽은 자의 영혼까지 죽이려는 지배세력=자본가들의 채찍소리를 장단 삼아 대지를 딛고 다시 부활하여 그들의 채찍을 빼앗아서 군사정권과 미국을 박살내고 민중의 혁명의지를 불 질러서 분단의 벽과 미제국주의를 모두 쓰러 안아 무너뜨리고 죽어야 한다.

➂투쟁하다가 죽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새로운 세상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싸우라, 앞서 죽어간 투사들의 뒤를 이어 목숨 걸고 투쟁하라는 호소가 된다.

➃혁명봉기에 실패하게 되면 늑대=자본가들이 달려들어 모진 고문과 죽음의 고통을 줄 것인데, 그러한 때 투사들은 살겠다고 버둥거리지 말고 죽음을 각오하고 밑바닥으로부터 타오르는 분노의 불꽃으로 그들에게 맞서야 하며, 그러면 민중이 들고 일어나 투사들을 살려줄 것이다.

➄민중혁명이 일어나면 투사들은 봉기한 노동자계급의 품에 기쁘게 안기어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고 사라져야 하며, 민중과 힘을 합쳐 가진자들과 이 세상의 껍질을 깨버리고 해방 세상을 이루어내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시인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 비추어 본 ‘새날’은 민중혁명을 통해 反자본주의-反미가 실현된 노동자가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반체제세력은 이 노래를 애지중지하며, 기필코 이 노래를 광주운동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되도록 총역량을 경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고 목숨걸고 투쟁할 것을 촉구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정부주관 광주운동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되기 위한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백보를 양보하여, 설사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만으로 볼 때 ‘새날’의 의미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와 양립하는 것이라고 억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가사를 발췌해온 모시가 이와 같으므로 그런 시에서 따온 구절들로 이루어진 노래를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한다는 것은 용날될 수 없는 일이다. 그 부분만을 노래하더라도 그 노래의 모시를 알게 되면 사람들은 그 가사를 모시와 연결시켜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에 해로운 독나무(毒樹)에서 떼어 온 가지에는 독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독수독지(毒樹毒枝).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