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에 쌀장사부터 시작...조선을 대표하는 거대상인이 되기까지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기업가연구회는 자유주의 학자 및 저술가 20여 명이 모여 발족한 모임이다. 한국 경제의 근간이 되는 기업가들의 업적을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업가정신과 시장경제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져 성황리에 연구회를 마무리 했다.

화신의 창업자인 박흥식에 대한 연구는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이 맡았다. 김 원장은 발표문에서 박흥식의 활동을 "사업을 통해 조선이 근대적 문명개화로 나아가고 소비자에게 문명적 이기(利器)를 향유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정리했다.

또한 민족의 문명개화 및 교육사업을 전개하고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안창호같은 민족지도자를 지원했다는 측면에서 '민족주의자'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아래는 김광동 원장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박흥식은 조선사회가 식민시대를 포함한 격동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근대 기업가의 길을 개척한 인물이다. 1930, 40년대 모든 조선인이 열망하던 사업가 모델의 상징은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이었다. 그가 사업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작은 단위부터 사업경험을 축적하고 그 노하우를 근간으로 다른 대규모 사업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업은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쌀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평안남도 용강군의 문명개화 인사이자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박흥식이었지만 부친과 형님이 일찍 사망하게 되면서 사업의 길을 선택하였다.

평남 용강은 평양과 진남포항의 사이에 있으면서도 근대 문물이 교류되는 항구였던 진남포에 가까워 박흥식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되었다. 대대로 이어오던 농사를 이어받지 않고 부잣집 아들이던 그는 과감하게 1918년 용강지역에서 미곡업을 시작했고 주변 진남포항의 번성과 함께 성공을 이뤄냈다.

비록 싸전이란 미곡판매업에 불과했지만 사업 번창으로 박흥식은 오히려 부모대에 이룬 부에 필적하는 100정보의 대지주로 부상하였다. 박흥식에게 쌀장사는 사업의 첫 성공이기도 했지만 '장사’라는 개념을 체득하는 원초적 기반이 되었다.

미곡판매로 부를 축적한 박흥식은 그 자본의 일부를 투자하여 인쇄업에도 나서기 시작하였다. 조선이 전근대적 사회가 근대사회로 변모하면서 급격히 확대되던 활자문화시대에 인쇄물을 공급하는 사업이었다. <선광 인쇄소> 운영과 함께 평남 용강과 진남포에 인쇄물 공급업이 번창하자 박흥식은 자본금 10만원을 만들어 주식회사 <선광인쇄주식회사>를 설립하며 규모를 본격적으로 대형화하였다. 그 때가 그의 나이 18세였다.

미곡 판매업과 인쇄업을 하게 되면서 박흥식은 시장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체득한다. 장사라는 것은 소비자의 요구에 따른 시장변화에 따라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미곡상과 인쇄업을 넘어 그는 자연스럽게 창고 및 운송업으로 사업의 확대를 모색하였다.

1923년 그가 20세가 되던 해에 자본금 5만원을 투자하여 서선흥산(西鮮興産)주식회사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창고 및 운송업과 함께 위탁판매업을 하는 회사였다. 인쇄업을 통해서 근대적 문물의 도래와 생활방식의 변화로 발생하는 새로운 수요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음을 물론, 쌀장사와 창고운송업과 같은 유통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젊은 나이의 박흥식에게 사회변화와 산업변화를 체득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평남과 진남포가 좁다고 생각했던 박흥식은 드디어 종이를 공급하는 지물판매업에 뛰어들며 서울(경성)로 진출하였다. 자본금 26만원을 투자하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서울을 물론 전국에서 급격히 확대되고 있던 신식 종이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 신문용지를 공급하는 업체로 커갔고 그의 나이 24세였던 1926년부터는 스웨던, 캐나다로부터 국제무역을 통한 종이공급으로 조선에서 가장 값싼 신식 종이를 공급하는 업체였다. 그는 조선 최대 종이 공급업자의 하나가 되었고 오히려 일본에까지 종이를 수출하는 사업가로 발돋움하였다.

<왕자제지> 등 일본 지물공급업체들과 경쟁하면서 그는 시장에서 사는 방법과 시장지배력을 확보하여 사업성공의 모델을 확립하였다. 시장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과 그 어떤 소비자라도 싸고 좋은 물건이면 구입한다는 간단하지만 가장 어려운 성공적 사업모델을 확고히 정립하게 된 것이다.

박흥식이 지물업에서 성공한 것은 인쇄업 경험과 국제무역을 포함한 종이유통에 대한 경험이 있기도 하지만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변모하면서 교육, 행정 등에서 인쇄물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지(韓紙)시대가 종결되고 서양식 종이시대로 급격하게 대체되던 때였다.

인쇄업을 하며 박흥식은 사회변화에 따라 새롭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고 있었다. 쌀과 지물공급은 물론 무역과 유통을 겸하며 소비자의 수요와 상품의 유통구조를 알게 된 박흥식은 1931년 드디어 잡화상 운영에 나서게 된다. 처음부터 대규모로 시작한 잡화상은 아니었지만 당시 어려움을 겪던 화신(和信)상회를 자본금 100만원에 인수하면서 대규모 백화점 경영을 시작하였다.

화신백화점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3층 규모로 직원 숫자만 153명에 달하던 백화점으로 당시로서는 대기업이었다. 다음해 화신백화점 신축하고 연이어 동아백화점 인수하면서 박흥식은 1932년 당시 서울에 5층 규모의 대규모 백화점 사업자로 발돋움했다.

자신의 출신지였던 평남 평양과 진남포에 화신백화점 분점을 개점하기도 했다. 1937년에 들어서면 화신백화점은 매장 3천평, 지하 1층, 지상 5층에 매장 면적만 3천평에 달하는 근대 백화점이었고 조선과 서울의 대형 백화점으로 성장했고 미쯔코시(신세계), 조지야(미도파) 등 일본계 백화점들과 경쟁하였다.

박흥식은 백화점 운영과 함께 본격적으로 유통업과 무역업에 나섰고 <화신 스토어>라는 전국 유통망을 가진 450개의 연쇄점 체제를 갖추고 무역과 부동산업으로까지 진출하였다. 국제무역을 통해 지물공급을 담당하기도 했었지만 <화신무역>(1939년)으로 무역업을 본격화했고 1945년 해방 후에도 무역선 앵도환(櫻島丸) 등을 운영하며 홍콩 등 동아시아지역의 무역을 담당하였다.

그 외에도 1940년대 들어 박흥식은 방직업에 진출하여 <대동직물>과 <흥한피복>을 설립하여 피복 공급을 담당하거나 일본 총독부의 요청에 따라 비행기를 제작를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종결되기 직전인 1944년 박흥식이 주도했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자본금이 무력 6천만원에 달했고 직원 숫자가 2,800명에 달하는 거대 기업이었지만 일본 의 패배에 따른 종전과 함께 파산, 해체되었다.

비행기산업에 경험이 없던 상황에서 국제정세를 읽기 어려웠던 박흥식이 비행기제작 사업의 실패는 그가 겪은 최초의 커다란 실패였다. 화신백화점의 운영으로 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성공적 운영은 계속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박흥식이 사업에 실패하고 경영일선에서 떠나게 된 계기는 화학섬유인 비스코스 인견사 직물사업의 실패다.

1962년부터 흥한방직과 화신레나운를 설립하고 지금의 남양주지역인 도농에 17만평 부지에 본인 재산 3억원을 포함하여 8억 5천만원이라 당시로서는 초대규모 화학섬유를 제조하는 대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장건설 도중 자금조달에 실패하게 되며 부도 처리되었다.

흥한방직과 화신레나운이란 대규모 사업의 실패는 담보로 잡힌 화신백화점을 포함한 다른 사업체를 매각할 수 밖에 없었고, 최종적으로 박흥식은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면서 사업가로서의 활동을 마감하였다.

지물업의 선두주자로 등극

평남 용강에서 인쇄소를 운영하며 신식 종이시대를 보고 경험했던 박흥식은 서울로 진출하여 지물공급업으로 불과 26세에 조선 소매지물 공급의 20%를 차지하는 최대 업체로 키워냈다. 연이어 지물도매업으로 전환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대형 종이수요업체에 지물을 공급하는 것은 물론 전국 1천여 지물포에 종이를 공급하고 일본에 수출하는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성공을 이루었다.

박흥식의 사업성공 방식은 본인이 체득한 경험을 기반으로 하되 시장변화에 적극적으로 맞추는 것이다. 근대적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1920년대 종이공급을 하던 박흥식은 전근대적 필기도구인 '붓’으로부터 펜과 연필 사용의 시대가 본격화된고 활자식 인쇄방식이 수천년간 사용하던 한지(韓지)시대로부터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근대적 종이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읽었다.

굳이 지금과 비교한다면 모바일폰이나 인터넷만큼이나 커다란 변화였다. 실제 근대적 종이시장은 년 2배 이상씩 시장이 확대되고 있었다. 1920년대 본격화된 서양과 일본식 종이를 말하는 양화지(洋和紙)시대로 의 전환과정에 박흥식은 양화지 공급의 주역이었다.

시장변화에의 대응과 함께 박흥식이 사업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종이공급에서 선점하고 있던 일본인 소유의 대기업과의 대결에서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인데 그가 보인 사업방식은 다음 몇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저가(低價)공급전략이다. 스웨덴 및 캐나다로부터 신문용지을 수입, 공급하였고 일본에 있던 스웨던(瑞典國) 대사관 직거래하면서 당시 일본의 왕자(王子)제지 및 북월(北越)제지와 같은 회사들을 압도하며 시장 지배력을 장악하였다.

박흥식의 두 번째 전략은 고객에 대한 신용(信用)주의다.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은 철저히 관철시켰다. 급격한 원료가격 상승 등으로 적자공급 상황이 오더라도 계약 내용을 바꾸거나 계약을 파기않고 손해를 감수하며 동일 조건으로 공급하였다. 그런 신용경영이 바로 박흥식이 지물업계의 선두주자가 되고 화신백화점이 서울의 대표 백화점이 될수 있던 자산이었다. 지물업 성공의 셋째 요인은 차별적 고객관리 전략이다.

일반고객과 달리 고정 고객에 대해서는 특별 대우하였다. 도매로 지물공급을 하면서 고정 고객에게는 차별적인 특별대우를 하고 금강산이나 일본 여행을 마련하는 등 고객에 대한 사후관리와 특별 서비스를 하였다. 사회 및 산업변화에 대한 신속 대응과 철두철미한 사업전략이 박흥식을 일본 선발업체의 경쟁을 물리치고 지물업에서의 성공을 거둔 이유다.

백화점업에서 선두주자로 등극

박흥식을 조선 최대의 사업가 반열로 만든 것은 역시 백화점업에서의 성공이다. 1920년대 서울로 진출하여 지물공급업을 하던 박흥식은 화신을 경영하며 선발주자였던 일본계 백화점과 경쟁해야 했다. 당시 서울의 백화점 판도는 현재 신세계백화점이 된 미쯔코시(三越), 나중에 미도파백화점이 된 조지야(丁子屋) 등과 히라다(平田), 미나까이(三中井) 등 일본계 4대 백화점이 석권하고 있었다.

조선인 소유로 소규모의 동아백화점만 있었다. 그러나 박흥식은 화신상회로 시작하여 1932년 동아백화점을 인수합병하고 곧이어 화신백화점을 신축하면서 화신백화점을 서울의 조선인 백화점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화신백화점은 1945년 광복전 이미 직원 700명에 달하는 거대 백화점이자 조선인 사업의 상징이었다.

   
▲ <표 1> 서울(경성) 백화점의 영업세액 추인(단위, 원)

<표 1>에서 보듯 박흥식이 백화점에 뛰어들었을 때인 1931년 전후 화신백화점은 미쯔코시나 조지야백화점의 1/4 규모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백화점이었지만 몇 년뒤 1930년대 중후반에 가면 이미 조선의 4대 백화점중의 하나로 발돋움했고 1940년에 들어서서는 1, 2위와 커다란 차이도 없는 3대 백화점의 위상에 올라 있었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일본계 백화점들은 일본에서 근대식 백화점을 운영해보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백화점 경영의 노하우를 갖고 시작했던 것이지만 박흥식은 그런 기반을 갖지 않았음에도 가장 비약적 성장을 이뤄냈다는 점이다. 그는 대규모 유통체제를 통한 '규모의 경제’를 추진했다.

1935년에는 평양, 1938년에는 진남포 에 화신백화점 지점을 내며 영업망을 확대하였고 연이어 지방 유통업체와 연계하여 450개의 연쇄점을 구축하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고 조선인이 그런 거대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박흥식은 주요한, 이긍종과 같은 조선의 최고 인재들을 영입하여 함께 사업을 확대하며 시장지배력을 확대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박흥식은 일본 백화점들과 비교되면서 조선인 사업가의 상징이자 우상이 되었다.

박흥식의 백화점 경영전략은 대량 공동구매와 저가(低價)공급이었다. 그는 일본 경쟁업체와 대응하기 위해서는 구입가를 낮출 때만이 저가 공급이 가능하다는 확신에 따라 구입단가를 낮추는 방안을 대량의 공동구매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중 하나는 지방의 중소기업들과 연계하여 낮은 가격으로 공동 대량구입함으로써 더 낮은 가격에 팔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지방 중소업체의 생존방식이기도 했고, 일본 대형백화점들과 경쟁해야 했던 박흥식의 영업전략이기도 했다. 당시에 화신백화점이 자율연쇄점(voluntary chain store) 체계를 만든 것은 사업적이거나 유통업으로서 혁신중의 혁신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박흥식의 백화점 마케팅 전략은 최첨단이었고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금 백화점업계에서 활용하는 마케팅 방안의 대부분을 당시 박흥식은 앞서 추진하였다. 당시 봉건적이고 전근대적 상거래 관행이 지배하던 시기였기에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마케팅 방법을 구사하였다.

모든 물건에 대한 철저한 가격정찰제를 실시한 것이나, 구입한 물품에 대한 반품을 허용한 것, 전화를 이용한 통신판매와 방문판매 방식을 도입한 것 등이 다 당시 박흥식의 마케팅방법이었다. 구입 물건을 배달해주는 것이나, 상품권을 판매하는 방식의 판매도 화신백화점의 영업방식이었다. 그 외에도 신문과 라디오에 대대적 광고를 감행하거나, 물건을 구입했던 고객을 대상으로 추후 살만한 상품목록을 발송하는 것도 당시로서는 첨단이었다.

특히 전등 1만개를 사용한 네온사인에 의한 전광판 광고를 한 것이나 경품제를 도입하여 경품으로 주택(문화주택) 1채를 내건 것 등은 모두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지물업이나 백화점업에서 후발주자로 참여하여 선발주자인 일본계 사업체들과 경쟁하며 박흥식이 대성공했던 것은 바로 경험에 기반한 확신과 함께 놀랄만한 과감한 추진력으로 남들이 가지 않은 사업가의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기업가적 자질과 경영 철학

박흥식이 가진 기업가적 자질과 경영 철학을 평가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험을 축적시키고 그 축적된 경험의 연장선에 다른 기업을 운영하거나 사업 확장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쌀농사를 짓던 지주 아들로서 쌀의 유통과 관련된 싸전(미곡상) -> 인쇄업 -> 지물업 -> 잡화점업 -> 유통업 -> 백화점업 -> 국제무역업 등으로 나갔던 것 그것이다.

경험을 통한 업계 파악과 관련 지식으로 확신을 통해 다시 더 큰 영역으로 나아가는 기반으로 삼았다. 물론 경험 기반이 취약했음에서 진출했던 비행기제작이나 방적업에서는 커다란 실패로 끝났다. 경험적 기반을 갖췄느냐가 그의 성공을 좌우하였다. 물론 그에게 학교교육은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교육을 받지 않은 것이 사업가를 만들었다고 볼수 있다. 그의 후대로 볼수 있는 이병철이나 정주영회장 모두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

박흥식은 지금 초등학교 격인 보통학교만 졸업했다. 지주 아들로서 모두가 일본 등 해외유학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가 쌀장사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그를 만들었다. 그가 쌀장사가 아닌 해외유학의 길을 갔다면 그는 공무원이나 교수의 길을 갔을 지도 모른다.

둘째는 박흥식은 상품의 질이 같다면 <더 싸게 사서, 더 싸게 판다>는 사업성공의 기본개념이 확고히 하였다. 지물업이나 백화점업, 유통업 등 모든 영역에서 대량구매, 대량판매 방식으로 남들보다 더 저렴한 구입처를 찾아 공급받고, 그럼으로서 더 싸게 판다는 경영을 준수하였다. 그는 그것을 장사의 기본으로 생각했고, 그것이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는 철학을 견지하였다.

셋째, 박흥식은 관련 분야의 최고 경륜가에게 업무를 맡기는 방식을 취했다. 자신이 모르는 분야를 자신이 나서지 않고 당대에 그 분야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을 모셔와 그가 실력을 발휘하도록 했다. 동아백화점을 인수하면서 최남이란 동아백화점 소유자에게 그대로 경영을 맡긴 것도 그 대표적인 사례다.

무역업계의 최고실력자인 이창근이나 또 다른 당대 실력자들인 박경석, 이긍종, 이창근, 주요한, 오천석, 이해창, 장두현 등을 영입하여 자신이 잘 모르거나 경험이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그 분야 최고 전문가에게 업무를 맡아 하도록 한 것은 박흥식의 남다른 성공 방식의 하나였다.

   
▲ 미곡 판매업과 인쇄업을 하게 되면서 박흥식은 시장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체득한다. 장사라는 것은 소비자의 요구에 따른 시장변화에 따라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진=연합뉴스

넷째, 박흥식의 사업가적 특징은 숫자와 통계에 밝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숫자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이고 대국적으로 보았다. 그의 구상은 언제나 앞서갔고 획기적이었다. 1935년도에 지금의 불광동-수색지역에 신도시를 건설하여 전철 및 지하철로 종로와 연결하는 계획을 제안하고 추진하기도 했다. 비록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좌절되었지만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1961년에는 서울인구 증가에 맞춰 한강 이남(강남-삼성, 서초, 과천 및 가락)에 32만명 규모 신도시 건설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정부승인 불허로 좌절되었다가 1970년대 정주영의 현대건설이 중심되어 결국 착공되고 결실을 맺었고, 그 외에도 울산공업지역(1962), 포항공업단지(1967), 여천공업단지(1967), 구미공업단지(1969)를 구상하고 나중에 추진되었던 것이나 1937년에 이미 제주도에 제주흥업 설립하여 제주를 아시아의 관광 거점으로 추진한 것은 모두 박흥식의 사업가적 능력을 보여준 것이고, 그런 그의 사업능력이 한국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실들이다.

근대시대에 태어나 식민지 기업가로서의 박흥식에게 시장경제란 명확했다.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공급하고 공급받는 체제>가 바로 그의 시장경제관이다. 그런 시장에서 박흥식의 경영철학이란 세가지로 요약된다. <사회변화를 감안하여 시대에 맞추는 것>이면서도 <경험적 기반을 가짐으로서 자신감이 있는 사업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지속적이며 획기적인 방안으로 과감히 추진하는 것>이다. 그것은 굳이 도식으로 만든다면 다음과 같다.

* W = 30X + 10Y + 3Z
(W: 사업성공, X:시장상황과 변화, Y:경험 축적, Z:지속적 노력)


박흥식에게 사업을 성공시킨다는 것은 시장의 상황과 변화를 읽어내고 자신의 실제적 경험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단기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을 갖고 꾸준한 노력의 연장선에 얻어지는 것이다.

박흥식의 기업가적 평가와 의미 - 민족 기업 및 기업인의 상징

박흥식은 1920년중반에서 1950년대까지 조선 최고의 기업인(거상갑부)로 평가된다. 1934년 개점된 종로의 <화신백화점>은 명동과 충무로 쪽의 일본인의 미쓰코시(신세계) 조지야(미도파) 및 미나까이 등 일본인 백화점과 경쟁체제를 갖춤으로서 조선인 기업의 자부심이자 상징이었다.

박흥식은 '문명이기(文明利器)의 보급’를 내걸고 상공업 진흥 및 조선인 상권 보호와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화신(和信)의 성패는 민족적 명예소관”이란 글을 잡지 삼천리(三千里, 1934)에 기고하기도 했고 “경제적 신흥의 책임을 다하라”라는 글을 잡지 신흥조선(新興朝鮮, 1933)에 기고하는 등 조선의 문명화와 근대화의 선두에서 활동한 근대 기업가다.

박흥식은 전근대적 조선의 개화 및 문명화에 기여한 조선의 기업가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기업가 모델을 만들어 세웠고 관료나 군인이 아닌 사업을 통해 사회와 국민에게 기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 외에도 실력양성론, 민족개조론, 조선물산장려 등 민족주의 지향하였고 문명개화가였던 부친 박제현의 영향을 받아 안창호선생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문명도입에 힘썼고 안창호 석방 및 석방후 생활지원을 하였다.

또 교육사업으로 용강유치원(1924), 용강농업학교(1925), 협성실업학교(현 광신상고) 등을 설립하여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 모든 것은 조선이 근대화되고 문명화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민족기업인의 일관된 철학적 소신이었다.

근대적 국제 상업무역 개척

박흥식은 전근대적 조선에서 근대적 상업의 길을 개척한 기업가다. 조선인에 문명이기(文明利器)를 보급하는 것이 사업가의 업으로 알았다. 그에 따라 조선에서 감해 생각하지 못한 방식이었던 국제무역으로 유럽 및 북미에서 종이를 수입하여 공급한 것이나 무역을 전담하기 위해 화물선 구입, 운영했고 항공화물 방식을 통한 신속한 유통 체제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특히 선박무역 개척하고 중국, 일본, 홍콩, 해방후 원산 등을 통한 무역업을 하였고 조선인이 태국에 운동화 150만컬레 수출하는 것이나 텐진, 방콕, 사이공 출장소 설립하고, 아프리카까지 무역업으로 진출했던 것은 박흥식이 왜 근대적 상업무역가의 태두인지를 보여주는 사실이다.

유통체인화와 획기적 마케팅 전략

마지막으로, 박흥식의 사업 역량은 전근대에 머물던 한국사회의 유통업 및 마케팅 기법에 확고한 영역을 개척하고 선례를 남겼다. 13개 시도 및 군 및 읍지역에 450개 <화신>점을 개점함으로써 전국에 근대적 문물과 상품을 공급한 것은 체인스토어화 사업의 시작이었다.

모든 물자를 적어도 동아시아 무역업에 연결하고 일본, 홍콩, 상하이는 물론 스웨덴, 케나다 등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는 것은 조선인 최초의 글로벌 경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옥외 대평 전기판광고 방식, 통신판매, 경품전략 등 특히 획기적 마케팅 방식 도입 정착시킨 것은 박흥식이 개척한 유통업과 마케팅전략의 근대화였다. 그 모든 것은 봉건적 농업사회에 머물던 조선인에 전국적으로 값싸게 근대 문물을 접촉하고 수혜를 누리도록 하는데 맞춰져 있었다.

시장을 보지 않고 정부를 보다

박흥식도 실패는 있었다. 그 실패는 시장을 보지 않고 당시로는 정부에 해당하는 총독부를 보고 사업을 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사실 그것은 그의 사업철학과도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총독부 요구로 1944년 자본금 6천만원의 조선비행기(주)를 설립, 16%는 그가 직접 자본투자하였다.

2천명이 넘는 직원을 가진 군수무기 공장체제를 갖췄으나 비행기를 만들기도 전에 일본 패망 및 종전으로 운영도 못해보는 타격을 보았다. 커다란 실패였다. 물론 사업실패와 함께 그것 때문에 친일 기업인이란 정치적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박흥식은 광복직후인 1945부터 1960년 기간 사회혼란과 6.25전쟁기간 등을 전후해서는 정부견제로 사업을 확대하지 못했고, 전쟁기간에는 화신백화점 화재 손실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또 다른 커다란 실패이자 좌절은. 1962-66년대 흥한화섬을 설립하면서 인견사 비스코스공장 건설에 대한 투자로부터 발행하였다. 그 사업을 계기로 재기를 도모했으나 감당 어려운 대규모 프로젝트(외자 1,051만, 내자 41억원 등 총 2,600만달러)였는데 추가 투자를 유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대출을 받지 못하며 공장건설 과정에서 좌절되었다. 그후 화신소니, 화신레나운 등을 설립했으나 재기에 실패했고, 1980년 300억원 부도로 화신관련 모든 기업이 도산하면서 사업계를 떠나며 기업가로서의 활동을 마감하였다.

결론적으로 비행기제조를 하게 된 일본 총독부의 요청에 응한 것이나 이승만정부의 견제와 친일 기업인이란 정치적 분위기의 지속, 그리고 박정희정부의 요구에 의한 인견사 사업은 모두 박흥식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거기에는 정부와 정치가 있었다.

시장을 보고 했던 사업은 성공했으나 최대 사업가가 된 후 정부와 함께 했던 사업은 그를 실패로 끌고 들어갔다. 결국 기업가 박흥식의 후기 실패는 사업가의 판단이 시장보다 정부에 의해 좌우됨에 따른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업가에게 정부와 함께 하는 것은 분명 커다란 유혹이지만 그 유혹은 떨치지 못하면 사업가로서의 본질을 잃는 것이다.

식민체제 지원에 대한 평가

박흥식이 사업을 하면 일제 식민체제를 지원했다는 것으로 친일 기업인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가 태평양전쟁 동원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이나 일본천황의 황민으로 자각하고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권유했던 것,

그리고 천황과 총독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었고, 일본 승전을 기원하며 20만원의 전쟁기부금을 낸 것 등이 그것이다. 물론 당시 박흥식이 일본이 전쟁에 승리하기를 바랐고 태평양전쟁체제에서 전시 동원에 협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행적으로 박흥식은 해방후 친일반민족행위특별법에 의해 제1호 피의자로 1949년 4월 검거, 구속되었다. 각종 친일행위에 대한 조사를 거쳐 103일간 감옥에 있다가 보석으로 나온 뒤, 다시 9월에 있었던 공판에서는 무죄 판결받고 해결되었다.

당시 그가 무죄판결을 받게 된 것은 조선인으로서 민족상권을 지켰고, 민족자본 육성과 민족긍지와 명예를 떨쳤으며 총독부에 협조했다는 것만 가지고는 친일 기업인으로 처벌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편파적인 것이라는 취지였다.

실제 박흥식은 기업가였지 친일체제를 만들고 영속시키는 행위를 했거나 친일행위로 이익을 얻지도 않았다. 사업체를 운영하며 손해를 보고 싶은 않은 소극적 의미의 친일행위였다는 평가가 정확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박흥식은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지도 않았고 중추원 참의직도 거부했으며 그렇다고 창씨개명에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친일(親日)도 없었고, 반일(反日)도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한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돈 그 자체에는 리(利)도 없고, 해(害)도 없다. 물론 돈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라는 것이다.

박흥식은 사업을 통해 조선이 근대적 문명개화로 나아가고 소비자에게 문명적 이기(利器)를 향유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히려 민족의 문명개화 및 교육사업을 전개하고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안창호같은 민족지도자 지원했다는 측면에선 민족주의자로 보아도 무방하다.

전쟁물자가 되는 비행기제작에 참여한 것이나 군복으로 사용되는 피복생산에 참여한 것으로 박흥식을 친일 기업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박흥식의 본질이 아니다.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을 경영한 사업가란 것이 본질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의 일생과 그의 중심적 활동을 전반적으로 평가하면 조선과 대한민국에 기여한 것이며, 친일이란 잣대는 매우 협소한 평가다. 1945년 전후 사회주의 확산과 국가주의 잔재에 따라 재산많은 자를 대상으로 한 '재산 내놔라’ 및 '재산 나눠갖자’는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상징적 희생자가 되었을 뿐이다.

5.16이후 부정부패 혐의로 다시 구속 수감되었다가 43일만에 벌과금 부과후 석방되기도 한 박흥식이었지만 그 후 박정희정부 및 박정희대통령의 자문역으로 근대 산업화 과정에 사업보다는 기획자문 활동 등으로 기여하였다.

결론적으로 박흥식은 전근대적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기업가의 길을 개척한 사람이다.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16세의 어린 나이에 편한 길을 가지 않고 쌀장사와 인쇄업을 하면서부터 체득한 경험에 기반하여 다양한 사업수완을 보였고 근대적 신사업으로 확장해나서 성공을 거듭했다.

특히 조선의 상징이었던 화신백화점의 성공은 근대 상업 및 유통과 무역의 개척자로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결과였다. 종이공급, 유통업, 백화점업 등의 사업으로 박흥식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고 조선 민족의 자부심이자 상징으로 남았다. 박흥식은 유통업과 무역업 등을 통해 문명적 근대 이기물을 대중적으로 싸게 공급함으로서 민족의 문명개화에 기여하였다.

특히 획기적 사업방식과 놀라운 마케팅 방안을 창출, 정착시켰다. 첨단적 화신백화점의 마케팅과 450개의 연쇄점 운영방식은 물론이고 대규모 신도시건설, 지하철건설, 아시아관광지로의 제주개발안 등을 추진한 것은 사업을 통해 한국에 새로운 문명사회를 구축하는데 기여한 것이다.

더불어 한계와 실패까지 지적한다면 대동아전쟁('37) 및 태평양전쟁(’41) 따른 전시동원체제 이후 펼쳐진 정부(총독부)의 시장개입과 그 이후의 시장혼란은 박흥식이 사업실패로 가는 원인이 되었다.

기업가 박흥식은 조선과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시장의 변화와 흐름까지도 꿰뚫어보며 사업을 성공시켜갔지만 세계 시장의 변화와 그에 따른 국제질서, 그리고 새롭게 동아시아에 형성되는 정치군사적 질서까지를 보고 대응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