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전설 바비 존스 코스 디자인·창설…골퍼들에겐 꿈의 무대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방민준의 골프탐험(52)- 왜 마스터스에 열광하는가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매년 4월 둘째 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세계 골프팬들의 이목은 미국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 있는 오거스타내셔널 골프코스로 쏠린다.
마스터스는 골프선수들이라면 누구나 평생 한번이라도 참가하는 것을 최대 영광으로 여길 만큼 ‘꿈의 무대’다. 선수들은 4대 메이저대회 중에서 그린재킷을 입는 마스터스를 최고로 친다.
세계의 별들을 괴롭히는 골프코스 또한 세계 최고 명문코스의 하나로 꼽힌다.

골프팬들은 물론 골프 문외한들까지 열광케 하는 마스터스 인기 비밀은 오거스타내셔널 골프코스를 만들어 이 대회를 처음 창설한 ‘구성(球聖)’ 바비 존스(Bobby Jones)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골프 사가들은 로버트 타이어 존스 주니어(Robert Tyre Jones Jr.: 1902~1971), 즉 바비 존스를 20세기 최고의 골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당시 4대 메이저, 즉 미국과 영국의 오픈 및 아마선수권을 13회나 우승한 그를 골프 사가들은 ‘골프의 황제’ ‘구성(球聖)’이라고 칭송했다.
그의 기록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던가는 4대 메이저대회에 출전했던 기간은 겨우 13년, 그것도 9년은 고교와 대학시절로 평생 출전게임 52회 중 23회를 우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지성파 골퍼로 유명했다.
1922년 미국 아마선수권 쟁취 후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 조지아공대에서 기계공학, 에모리대에서 법률을 전공해 변호사자격까지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영국사, 독일문학, 고대문화사, 비교문학 등에도 조애가 깊었다. 그의 골프전성기는 학업에 열중하던 시기와 일치, 운동과 학문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탁월한 골프기량에 풍부한 학식, 뛰어난 유머감각과 겸손함을 겸비한 그에게 온갖 최상급의 찬사가 따라다닌 것은 당연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육군 소령으로 참전해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다섯 살 때 부모와 함께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스튜어트 메이든(Stewart Maiden)이라는 동네골프장의 프로를 만나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데, 그는 메이든을 만난 것을 골프인생 최대의 행운이라고 실토했다.

   
▲ 마스터스 인기 비밀은 오거스타내셔널 골프코스를 만들어 이 대회를 처음 창설한 ‘구성(球聖)’ 바비 존스(Bobby Jones)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훗날 그는 7년간의 슬럼프에 빠진 뒤 “모든 행운은 자신만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그 후 이것을 반성하면서 인간은 패한 경기에서야말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긴 경기에서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타고난 모방의 천재였다. 골프장 전속프로의 플레이를 모방해 좋은 기본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골프도 하나의 게임으로써 단지 개인적인 승부를 가리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스트로크 플레이보다는 매치 플레이를 즐겼다. 스코어란 어떤 사람과의 승부의 자료일 뿐이었다.

11살 때 그는 새로운 골프철학을 깨닫는다.
계기는 1913년 US오픈. 이 대회에는 ‘스윙의 시인’이란 명성을 듣고 있던 영국의 해리 바든(Harry Vardon), 그리고 같은 영국의 테드 레이(Ted Ray)가 출전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당시 19세의 미국 아마추어 프란시스 위멧(Francis Ouimet)이 두 영국 프로와 타이 스코어가 되어 연장전에 들어가 우승했다.

어린 존스는 이 경기야말로 진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아름답고 부드러운 스윙에 견실한 플레이, 모든 홀을 파를 목표로 주변과 초연한 자세로 플레이하는 해리 바든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린 존스의 눈에는 바든이 경쟁자나 갤러리들을 잊은 채 다른 그 무엇과 플레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든은 다름 아닌 현대골프의 표준그립인 오버래핑 그립을 고안한 사람으로, 매년 최저타를 친 선수에게 수여되는 바든 트로피의 주인공이다.

존스는 중얼거렸다. “골프란 어느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고 어느 것에 대해서 플레이하는 것이다.” ‘그 어느 것’이란 바로 파(PAR)였다. 홀마다의 파와 경쟁한다는 것인데 그는 그 무엇을 ‘올드 맨 파(Old man Par)’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의인화하고 외부의 경쟁자가 아닌 내부의 ‘올드 맨 파’와 게임을 하는 철학과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1916년 14세 소년으로 처음 미국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 출전, 전국대회 첫 준우승을 하게 되는데 이때 결승전에서 젊은 혈기와 흥분,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난 뒤 마음을 다스리는데 역점을 두게 된다.
이듬해에 그는 15세 나이에 챔피언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이후 2위 시대가 계속 이어지는 7년간의 길고 긴 슬럼프에 빠졌다가 1923년 US오픈에서 우승하고 1925년 US 아마추어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전성기를 맞는다.

1925년 US오픈에서 그는 골프사에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를 만들어낸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1타차 선두를 유지, 우승을 목전에 둔 존스는 러프에서 어드레스 하는 사이 볼이 움직이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지만 경기위원회에 자진 신고했다.

이를 두고 그의 친구이자 언론인인 O.B 킬러 기자는 “나는 그가 우승하는 것보다 벌타를 스스로 부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한 타가 없었더라면 플레이오프는 없었을 것이고 존스의 우승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보다 더 멋있는 것이 바로 존스의 이 신고사건이었다”고 기록했다. 이 사건을 두고 매스컴이 칭송하자 존스는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이다. 당신은 내가 은행 강도를 하지 않았다고 나를 칭찬하려는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미국의 프로 골프계에선 월트 해이건이 ‘왕’으로, 존스는 ‘불세출의 아마 황제’로 불려 졌는데 1925년 둘만의 72홀 매치플레이 시범경기에서 존스가 완패했다. 골프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존스의 기술적인 패배라기보다는 올드 맨 파의 룰을 스스로 포기, 처음부터 스코어카드 대신 해이건과 대결한 실수를 했다”고 평했다.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1930년 영국 오픈과 영국 아마선수권, 미국 오픈과 미국 아마선수권을 독차지하는 사상 초유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데 US아마 선수권대회에서 경기 중 한 레스토랑 주인으로부터 격려전보를 받았다.
거기에는 ‘E TONE E PISTAS’라는 그리스어가 쓰여 있었다. 영어로 ‘With it, or on it’(함께 아니면 그 위에)라는 뜻이다. 옛날 스파르타의 한 노모가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방패를 닦고 있는 아들에게 한 말로, ‘이겨서 방패와 함께 무사히 귀환하던지 아니면 전사하여 방패 위에 실려서 돌아오라’는 뜻이다. 과연 존스는 이 경기에서 이겨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운다.

   
▲ 바비 존스는 28세의 나이로 은퇴 후 금융계 친구인 클리포드 로버츠와 함께 1934년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 오거스타 내셔널코스를 만들어 마스터스 토너먼트를 개최함으로써 골프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매년 4월 열리는 이 대회는 4대 메이저대회 중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존스는 이 대회와 함께 불멸의 전설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는 1930년 11월 28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언론은 그를 ‘미국에서 로버트 리 장군 이래 가장 인기 높은 남부인’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골프계는 그가 은퇴선언을 하자 ‘존스 없는 골프는 파리가 없는 프랑스와 같다’는 말로 슬픔을 표했다.

그는 은퇴 후 금융계 친구 클리포드 로버츠와 함께 1934년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 오거스타 내셔널코스를 만들어 마스터스 토너먼트를 개최함으로써 골프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매년 4월 열리는 이 대회는 4대 메이저대회 중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존스는 이 대회와 함께 불멸의 전설로 살아남게 되었다.

마스터스의 명성은 골퍼라면 꼭 한번 밟아보고 싶은 아름다운 코스로 더욱 빛을 발한다.
코스를 조성할 때부터 자연미를 철저히 살리면서 난이도를 높여 골퍼들의 도전욕을 불태운다. 마스터스 대회 두 달 전부터 출입을 통제하고 대회가 끝난 뒤 5월부터 11월까지 문을 닫는다. 잔디를 보호하고 코스를 보수하기 위한 조치다. 좁은 페어웨이와 유리알 같은 그린으로 정상의 골퍼들을 시험한다. 특히 11, 12, 13번 홀로 이어지는 ‘아멘코너’는 오거스타내셔널 코스의 백미로, 이 코스를 무사히 통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들어설 때와 나올 때 ‘아멘’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고 한다.

이 골프코스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34대)와 관련된 일화로도 유명하다.
평소 골프와 브리지 게임을 좋아하던 아이젠하워에게 대중의 눈을 피해 이 두 가지를 즐길 수 있는 천국이 바로 폐쇄적인 회원제로 운영되는 오거스타 골프장이었다.

아이젠하워는 1948년 친구이자 당시 이 클럽 회장이던 클리포드 로버츠의 권유로 역대 미 대통령 중 유일하게 오거스타의 회원이 됐다.
대통령 취임 전 5차례, 재임 중 29차례, 퇴임 후 11차례 등 모두 45차례나 이 클럽을 찾아 골프를 즐겼고, 한번 방문하면 장기 투숙했다.

아이젠하워는 1910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27대) 대통령 이래 워싱턴 연고팀의 메이저리그 개막전에서 대통령이 시구자로 나서는 게 전통이 됐지만, 골프를 쳐야 한다는 이유로 재임 중 개막전 시구를 한차례 빼먹을 정도의 골프광이었다

골프장 내에는 아이젠하워와 부인 메미 여사가 묶었던 '아이젠하워 캐빈'이 지금까지 보존돼 있다.
9번 홀 등 파3홀 두 곳에 연못이 있는데, 이것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아이젠하워였다. 이 때문에 연못은 '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애칭) 폰드'로 불린다.

440야드짜리 17번 파4홀의 왼쪽 중앙에는 미송 한그루가 있는데, 아이젠하워의 티샷이 자주 이 나무에 맞아 골탕을 먹자 1956년 클럽 미팅에서 "저 나무를 베어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클럽 회장이던 로버츠는 고심 끝에 아이젠하워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 나무에 ‘아이크 트리’란 애칭이 붙은 이유다.

바비 존스는 불세출의 골퍼로서의 전설적인 삶을 살면서 많은 명언을 남겼다.
“위대한 영혼은 승리의 장미밭길이 아니라 실패의 불길 속에서 만들어진다.”
“골프선수권대회는 오믈렛(Omelets)과 많이 닮았다. 달걀을 깨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듯이 희망과 좌절함이 없이는 오픈에서 우승할 수 없다.”

“골프에서 운이란 상당 기간 길어지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간다.”
“골프란 그 누구도 정복할 수 없다. 스코틀랜드 사람이 말했듯 골프란 끝이 없는 게임이다.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골프를 자신이 생각한대로 플레이한 사람은 없었고 또 그 이상 절대로 더 잘 칠 수 없었다고 만족할 만큼 흡족하게 잘된 라운드를 해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골프가 모든 게임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다. 결코 인간을 상대로 플레이하지 말고 게임을 플레이하라. 오직 올드 맨 파와 플레이하라.”

“불운이란 나 혼자에게만 닥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닥치기 마련이다. 어느 경기에서나 실점을 만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초조감 없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인내로 대처해야 한다.”
“토너먼트 골프에서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챔피언십의 우리(The cage of championship)이다. 처음 골퍼들은 우선 그 우리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한번 그 속에 들어가면 계속 머물려 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 안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그리고 쫓겨나면 다시 들어가려고 노력하게 되는 기이한 우리이다.”
“좋은 스윙의 첫째 조건은 단순함이다. 스윙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임팩트 순간 불을 끝까지 쳐내는 것(hit through)이다. 결코 볼을 때리는 것(hit at)이 아니다.”

이런 유서깊은 마스터스 대회에 목요일 밤부터 시작됐다. 이번 대회에는 재기를 노리는 타이거 우즈, 신황제 로리 매킬로이는 물론 우리나라의 배상문과 노승열이 출전, 별들의 전쟁을 펼친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