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귀족 책임감은 내팽개치고 스스로 천민에 투항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2012년 11월 29일자 《조선일보》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클래식 전문 출판사 창고에서, 1897년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상연됐던 '코레아의 신부(Die Braut von Korea)’라는 발레의 악보가 발견되었다는 보도였다.

일본 배경의 오페라 '나비부인’(1904)이나 중국 소재 '투란도트’(1926)보다 앞서 한국을 소재로 한 발레가 음악의 중심지 비인에서 상연되었다는 것은 정말 이채로운 얘기였다. 기사는 악보와 함께 발견된 발레의 줄거리 텍스트(15쪽 분량)도 소개했다.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의 왕자가 나라를 구하려고 전쟁터에 나가고, 그를 사랑하는 조선 여인이 목숨을 걸고 함께 전장(戰場)에 뛰어드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시대적 배경은 청일전쟁(1894~1895) 시기로 추정되지만, 등장인물은 코레아의 왕자, 왕자를 사랑하는 여인, 사랑의 여신, 일본군 장군, 코레아의 장교, 의병, 보초, 기생 등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의 왕자가 나라를 구하려고 전쟁터로 나간다? 헐~~~.’

아마 그 대본은 조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국취미(exoticism)’에 푹 빠져 있던 작가가 썼을 것이다. 공간적 배경이 조선이고, 시간적 배경이 청일전쟁시기인지는 몰라도, 그건 실제의 '조선’이 아니었다.

발레의 대본을 쓴 작가로서는 외적(外敵)의 침략을 받은 나라의 왕자가 전쟁터로 나간다는 설정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이다. 실제 유럽의 왕족, 귀족들은 그랬으니까…. 유감스럽게도 조선에는 그런 전통이 없었다. 왕족, 귀족들이 전쟁터로 달려가는 전통은 삼국통일 당시의 화랑을 끝으로 사라졌다.

조선의 양반들은 서양의 귀족과는 달랐다. 그들은 '가진 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병역과 납세의 의무조차 거부하는 기생(寄生)집단이었다. 어쩌다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양반들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 “선비들을 우대하는 뜻에서 벗어난다”면서 기를 쓰고 반대했다.

나라가 망할 때에도 조선의 왕족, 벌족(閥族) 가운데서 목숨을 끊거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구례 촌구석에 박혀 살던 시골 선비(황현)가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몸을 바친 자가 한명도 없다면 어찌 통석할 일이 아닌가”라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일가가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회영과 그 형제들, 구한말(舊韓末) 대신(大臣)을 지냈다가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 몸담은 김가진 같은 분이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귀족문화의 전통이 없으니, 우리 사회에서는 '귀족’이라고 하면 특권을 누리며 인생을 즐기는 계층이라고 오해한다. '귀족노조’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이는 '귀족’에 대한 모욕이다. 회사나 나라야 어떻게 되든 자기 밥그릇만 챙기려 드는 집단에게 '귀족’이라는 수식어는 가당치 않기 때문이다.

아테네 - 衆愚정치의 요람

천민민주주의에 대해 얘기하라고 했더니, 난데없이 왜 귀족타령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천민성(賤民性)’에 대한 균형추(均衡錘)가 되는 것이 '귀족성(貴族性)’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democracy)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대중(大衆)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수많은 철인(哲人), 현자(賢者)들이 경고한 것처럼 '대중에 의한 통치’와 '중우(衆愚)에 의한 통치’는 종이 한 장 차이다. 투키디데스의《펠로폰네소스전쟁사》등을 보면, '민주주의의 요람’이었던 그리스(아테네)는 '중우정치의 요람’이자 '포퓰리즘의 요람’이기도 했다.

우리가 '민주주의혁명’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미국독립혁명이나 프랑스대혁명은 사실 '민주주의혁명’이 아니었다. '공화주의혁명’이었다. 당시의 혁명가들은 '대중에 의한 통치’를 꿈꾼 게 아니라 '자유의 정신을 바탕으로 교양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새로운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꿈꾸었다.

특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만든 체제가 행여 민주주의로 흘러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미국 헌법이 마련한 여러 장치들 – 대통령 간선제, 상원, 종신직 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 등-은 권력남용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정치가 민주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시대는 달라졌다. 이제 민주주의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조류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에서는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가 단순한 '제도’를 넘어서 '주의(主義)’, 즉 절대적 '이념’이 되어버렸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한때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쳐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민주주의의 과잉’을 걱정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물론 아직도 '민주주의의 후퇴’니 '유신독재의 부활’이니 하는 7080세대 유행가를 불러대는 인간들이 있기는 하다).

'민주주의의 과잉’의 다른 얼굴이 바로 '천민민주주의’다. 거짓선동에 취약하고, 자기 몫을 요구할 줄만 알고,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망각한 천민민주주의,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그토록 경계했던 '중우정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로 흘러가는 것이 대중, 중우만의 잘못일까?

나는 이 나라 '가진 자’들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한다. '가진 자’들이 응당 지녀야 할 '귀족성’이 결여가 그러한 천민민주주의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대중이 우중(愚衆)으로 전락하고, 그들이 아무리 천박하고 미개(우리나라에서 이 단어 잘못 쓰면 큰일 난다)하게 굴더라도 '귀족’들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그 사회는 건재할 수 있다.
 

   
▲ 현대적 관점에서의 '귀족’이란 교양, 상식, 소신, 애국심, 책임감, 비전, 배려 등 '천민성’과 대조되는 가치(價値)들을 체화(體化)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엘리트를 말한다. 그들은 정치인일 수도, 관료일 수도, 군인일 수도, 기업인일 수도, 학자일 수도 있다. /사진=연합뉴스 TV 캡쳐

귀족이라니! 민주주의 사회에서 귀족이라니! 하지만 오해는 말기 바란다. 내가 말하는 귀족이란 시몽 드 몽포르니, 말버러 공작이니, 오토 폰 비스마르크니 하는 세습귀족은 아니니까. 내가 말하는 '귀족’은 교양, 상식, 소신, 애국심, 책임감, 비전, 배려 등 '천민성’과 대조되는 가치(價値)들을 체화(體化)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엘리트를 말한다. 그들은 정치인일 수도, 관료일 수도, 군인일 수도, 기업인일 수도, 학자일 수도 있다.

'귀족’은 평상시에는 삶의 태도와 베풂을 통해 대중의 모범이 되고, 나라가 위난(危難)에 처했을 때에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는 존재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물론 모든 귀족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구미(歐美)에서 귀족문화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영국의 해리 왕자가 아프간 전쟁에 참전하고, 윌리엄 왕세손이 구급헬기의 조종간을 잡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부자들이 자선이나 사회발전을 위해 거금을 내놓는 것도 흔한 풍경이다.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사회의 균형추가 되고 있다. 선진국 대중민주주의가 표류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귀족성’이라는 든든한 닻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귀족성’은 대중민주주의가 부패하지 않게 해 주는 소금이다.

비겁한 '가진 자’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그런 의미에서의 '귀족’이 없다. 명품(名品)으로 몸을 휘감은 '명품족’은 많아도 '명품 인간’,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족’은 잘 안 보인다. 공직후보자 청문회 때마다 병역 면탈(免脫),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따위의 구질구질한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가진 자’들은 비겁하다.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가 약하다. 일례로 '가진 자’들이나 그들의 자제들 가운데 군대 제대로 갔다 온 사람이 몇이나 되나?

체제를 지키기 위해 비용을 부담하려는 의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계적인 R&D연구소를 만들거나 장학사업에 거금(巨金)을 쾌척하는 기업인은 있어도, 미국의 멜런 스카이프 가문처럼 보수계 싱크탱크나 잡지, 정치운동을 위해 돈을 내놓는 부자는 없다. 한국의 기업인들은 보수운동을 위해 돈을 내놓지 않는다. 어쩌다 돈을 내 놓아도 눈치를 보아가며 찔끔찔끔 인색하게 내놓는다. 그러면서도 왼쪽 동네 시민단체들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보니 '협박 없이 협찬 없다’는 수군거림마저 나온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왼쪽 동네 시민단체들 중에는 자기 빌딩을 올린 단체도 제법 된다. 재벌계 언론, 재벌계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왼쪽 동네 사람들과 한통속이 되어 노는 것도 흔한 풍경이다.

어디 기업인들뿐이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많이 누리고, 많이 배운 지식인 중에서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거나 아예 호적을 파서 왼쪽 동네로 옮겨간 자들이 적지 않다. 은수저 물고 태어나서 선거구까지 물려받아 쉽게 정치하면서 '진보코스프레’를 하는 자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愚衆의 共犯들

이처럼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귀족’으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주어야 할 이들이 먼저 '천민’들에게 투항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로 추락하지 않게 하는 균형추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이 나라 민주주의를 무저갱(無底坑)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레닌이 일찍이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라고 칭했던 이런 자들이야말로 '천민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가장 천한 자들이다.

'천민’들에게 투항하는 비겁한 '가진 자’들, '사이비 귀족’들을 보면서, '천민민주주의’와 맞서 싸워 온 의병(義兵)들은 맥이 풀린다. 나는 왼쪽 동네 인간들보다 그들이 더 밉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로 전락해 가는 것은 대중들, 우중들 때문만은 아니다. 체제를 지키기 위해 싸울 의지가 없는 비겁한 '가진 자’들 때문이기도 하다. 비겁한 '가진 자’들 - 그들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천민민주주의’로 추락시키는 우중(愚衆)의 공범(共犯)들이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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