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경제는 수요자와 공급자의 자유로운 거래를 근본원칙으로 한다. 도서시장에서 어떠한 책이 집필되고 구매되는지도 기본적으로는 거래자들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기는 게 옳다. 이미 도서시장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거를 애도'하는 책부터 마오쩌둥‧호치민‧체 게바라의 전기를 동화로 각색한 책들까지 거의 무한한 정도의 이념적 다양성이 넘실댄다. 이들 도서는 독자들의 '선택'을 받아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다.
다만 정부 및 각 지방교육청이 세금으로 운영하는 '추천도서' 프로그램에 反대한민국 성향의 도서가 선정되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지는 다른 문제가 된다.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의 편향성 문제부터 부산시교육청‧서울시교육청 등의 추천도서 문제 등을 취재해온 이원우 기자는 4월 13일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이 개최한 제18차 교육쟁점연속토론회 ‘편향의 자유 마음껏 누리는 동화책 시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발제했다.
아래는 이원우 기자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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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지난 2월 초 제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6‧25전쟁과 미국에 대해 터무니없는 관점을 취하고 있는 책이 10대들을 대상으로 집필됐을 뿐 아니라 부산시교육청 산하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의 ‘추천’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전화를 받기 시작한 건 작년 봄부터다.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우수교양도서 ‘동화’ 부문 선정도서들이 체 게바라를 미화하거나 극렬반미주의 노선을 따르거나 민주노총의 노동관을 그대로 답습하는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내용의 심층보도가 나름의 반향을 이끌어냈던 게 시작이었다.
제보를 받고 나면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책의 내용을 확인하는 일이다. 서점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어린이 책들은 비닐에 봉인된 경우도 많기 때문에 도서관을 활용하는 게 빠르다. 제보 받은 책은 서울시 중구 옛 시청 건물을 쓰고 있는 서울도서관에서 대출이 가능했다.
실제로 확인해 보니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책은 제목과 걸맞지 않은 ‘살벌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 “인천 상륙 작전의 화려한 성공 뒤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상륙에 앞서 미군은 9월 4일부터 9월 15일까지 비행기로 인천 지역을 폭격했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지요.” (p.53)
- “미국은 전쟁을 단순한 방어전이 아니라 무력 통일 전쟁으로 확대하면서 세계 질서에 영향을 미치고 싶었죠.” (p.58)
- “미국은 자기들의 이익과 맞물려 있으면,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그것을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p.190)
6‧25 전쟁 당시의 미군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이 책의 한 축이라면 미군의 긍정적인 면모에는 ‘침묵’하는 것이 책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다뤄져 이젠 전 국민이 알게 된 미군의 흥남철수 작전에 대해 이 책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책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철저히 저자의 몫이다. 저자가 어떤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는 건 부당한 일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 전반적인 내용이 워낙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보니 10대들에게 미국(미군)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야 말겠다는 구체적인 의도가 있다고 판단된 건 사실이다. 어떻든 6‧25전쟁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라면 흥남철수 같은 예외적인 사건을 철저히 외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 책은 133~140페이지 ‘빨치산은 누구인가요?’라는 챕터에서 극렬 좌익세력 빨치산의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빨치산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토벌작전으로 그들이 입은 타격에 대해서만 서술하는 식이다. 몇 명의 빨치산이 사망했는지를 밝혀 그들이 피해자라는 뉘앙스를 내고 있지만 그 빨치산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얼마나 학살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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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 본문 中 |
반(反) 이승만 기조도 선명하다. 이승만의 실책을 부각할 뿐 긍정적인 서술은 책 전체를 통틀어 단 한 구절도 없다. 공공도서관이 건국대통령을 폄하 혹은 무시하는 책을 앞장서서 추천한 있는 형국이었다. 게다가 도서가 선정되면 부산시에 위치한 모든 공공도서관에 목록이 이관돼 책들이 비치된다.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이야기’ 역시 부산시 각 도서관에 비치된 상태였다. 공공(公共)의 추천을 받은 만큼 다수의 독서모임과 학교도서관에도 목록이 공유되고 있었다. 공공도서관의 도서 구입과 비치 및 배포활동은 당연히 세금으로 집행된다.
내용을 정리해서 미디어펜에 송고한 시점은 2월 6일 오전. 점심시간에 출고된 기사는 그 날치 석간인 문화일보의 눈에 띄어 한 번 더 보도됐다. 그리고 다른 일간지와 인터넷 매체들도 추격보도를 시작한 10일, 부산시립시민도서관(관장 김경자)은 재심의 회의를 열고 해당 도서를 추천도서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작년 한 해 동안 선정된 추천도서 목록을 담은 '공공도서관 추천 이달의 책 목록집'의 배부도 중단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일련의 상황은 거의 모든 일간지와 종편채널, 연합뉴스 등에서 보도가 됐다. 기자 4년차에 이렇게 큰 특종은 처음이었다. 언젠가 사석에서 조갑제 대표는 특종에 대해 “나(기자)로 인해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걸 피해선 안 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아직 내공이 부족했던 걸까. 그저 즐길 수만은 없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서울시교육청의 경우
이 보도 이후부터는 비슷한 제보전화가 좀 더 자주 걸려오기 시작했다. 3월 중순에는 서울시교육청 산하 마포평생학습관(관장 이백열)이 ‘청소년들의 진로 선택에 도움이 되는’ 우수도서로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를 심각하게 왜곡한 책을 선정했다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 왔다.
‘공부의 신 마르크스, 돈을 연구하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마르크스가 인류사에 남긴 부정적 여파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는다. 현재 대한민국이 채택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견하고 선동했던 그가 마치 위대한 인물인 것처럼 편향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마르크스를 예수‧부처와 동급으로 표현하고 있는 책의 서문 일부다.
“진리를 정신으로 남긴 사람을 우리는 위인이라고 부르지요. 이들 위인은 육신이 죽어서 사라지더라도 그 정신은 우리의 기억에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분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마르크스도 이런 위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면 자본주의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방안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원래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기 때문에 등장했고 그것 때문에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물질적 풍요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일까요?”
기업가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마르크스의 편향적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는 내용도 있다.
“사장이나 회장도 감시나 감독 등 노동을 한다는 생각이 들지요? 이것을 흔히 관리 노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치(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빚쟁이들에게 쫓겼고 유대인들을 경멸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크스의 인격을 미화하는 부분도 눈에 띈다.
“마르크스는 누구를 위해서 공부했을까요? 타인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타인은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포함하는 모든 타인, 바로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소유권 체계에 대한 고의적인 왜곡과 날조에 해당될 만한 내용도 있다.
“삼성전자 구미 공장에서는 휴대폰이 하루에 수백만 대가 생산됩니다. (…) 그런데 혹시 이들 노동자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이 직접 만든 휴대폰 하나를 슬쩍 호주머니에 넣어서 몰래 가지고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 그의 죄목은 ‘절도죄’입니다. 아니,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을 가져왔을 뿐인데 절도라니요? (…)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라는 제도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추종했던 나라들의 처참한 말로 또한 이 책은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까닭은, 그리고 그의 글이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모두 그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빼앗는 사회로부터 그 의지를 되찾아오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그의 가르침을 실천한 나라의 국민들은 실제로 그 의지를 되찾았던 것입니다.”
마포평생학습관 홈페이지는 해당 도서들을 ‘마포평생학습관 사서가 추천하는 청소년 진로멘토링 책꾸러미 도서 목록’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 목록에 선정되면 마포구 관내 초·중학교 내 도서관 방문이 어려운 학생들이 편하게 책을 볼 수 있도록 학교로 대출하는 서비스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마포평생학습관은 평생교육법 제21조 제1항 및 서울특별시 교육청행정기구설치조례 제30조(설치)에 의거 설치된 서울시교육청 산하기관이다. 공공기관의 도서 구입과 비치 및 배포활동은 역시 세금으로 집행된다.
기사가 출고된 시점은 3월 23일. 26일부터는 푸른도서관운동본부(대표 조형곤)의 교육청 비판 1인 시위가 시작됐다. 푸른도서관운동본부 조형곤 대표는 26일 오전 10시 "마르크스의 부활을 꿈꾸는 서울시 교육청, 차라리 공산당을 선언하고 심판 받으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에 나섰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 역시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본지 보도내용을 링크하며 "조희연 교육감의 커밍 아웃 환영합니다. 조희연 교육감 마르크스의 부활을 꿈꾸나! 어린 학생에게 마르크스 신격화" 등의 내용으로 글을 남겼다.
이튿날인 27일, 마포평생학습관 측은 '공부의 신 마르크스, 돈을 연구하다'를 추천목록에서 제외했다. 여기까지 진행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일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상황 전개가 빠를 수 있었을까. 제외 과정이 간단하다는 것은 선정 과정 또한 간단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일련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마포평생학습관 측에 전화를 걸었다.
우선 해당도서를 목록에서 삭제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제외했다”는 게 학습관 측의 설명이었다. 본래 추천 도서 선정 과정에는 내부 선정위원 11명과 외부 인원 3명이 참가하는 회의체가 소집되지만 위 도서의 경우 선정위원의 심의를 거쳐 선정된 책은 아니라고 밝혀왔다. 즉 학습관 사서가 추천하는 형식으로 목록에 올라갔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학습관 측은 이 사업의 의도를 설명해왔다. 청소년들이 도서관에 올 시간이 없어 책을 읽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운 마음에 시작한 사업이라는 것이다.
“너희(청소년들)를 위한 책이 나오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학습관 측의 설명에는 사실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아동‧청소년용 도서시장이 편향돼 있을 경우 학습관 사서의 ‘좋은 의도’는 필연적으로 ‘나쁜 결과’를 파생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오쩌둥‧호치민‧마르크스 전기 읽히는 부모들
대한민국엔 수많은 도서관들이 있다. 그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추천도서를 선정한다. 공공도서관의 경우 추천도서 선정과 배포 과정에는 당연히 세금이 투입된다. 따라서 추천도서가 편향돼 있을 경우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서 반정부‧반시장 도서를 추천하는 촌극이 벌어지게 된다. 부산시교육청 문제가 그렇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을 보면 이 풍경은 많은 사람들에게 직관적인 불편함을 야기하는 것 같다.
공공도서관의 추천을 받지 않은 도서들로 논의를 확장하면 어떻게 될까. 공공의 추천을 받아 세금으로 구매 및 배포되고 있는 책은 아니지만 심각하게 편향돼 있는 책들이 시중에는 얼마든지 유통되고 있다. 학부모 사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세계위인전 'WHO' 시리즈를 보자.
다산북스(다산어린이)에서 간행중인 이 기획에는 총 100명 이상의 ‘위인’들이 다뤄지고 있다. (예비)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 시리즈에는 놀랍게도 호치민, 마오쩌둥, 체 게바라, 마르크스 등의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잔혹한 생애를 살았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과 상극(相剋)인 체제에서 활약한 지도자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위인으로 선정된 한국인으로는 김대중과 반기문 등이 있다. 마오쩌둥, 호치민 등이 선정된 위인전 시리즈에 건국대통령도 선정되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어디까지나 어떤 위인을 선정할지는 출판사의 재량에 달려있는 것일지 모른다. (네이버 'Who?' 카페(http://cafe.naver.com/dasankids) 게시판에서 인물추천을 받고 있기는 하다.)
‘시장의 선택’을 받은 이 시리즈는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대한민국 교육브랜드 대상’을 연속 수상한 바 있으며 ‘소년한국 어린이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 위인전 시리즈의 성공 이후 새롭게 시작된 'Who? 한국사' 시리즈는 좀 더 논쟁적이다. 한국 사회에 영향력 미치는 인물들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겠다며 내놓은 현대 대표위인 50인 시리즈로 시작된 이 기획은 1권 김연아, 2권 김택진에 이어 3권엔 ‘독재 정권 아래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다 희생당한’ 박종철·이한열을 위인으로 다루고 있다. 4권 이태석, 5권 류현진에 이어서 여섯 번째로는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을 다뤘으며 7권 정명훈 8권 박지성 등으로 목록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추천’은 없었지만 ‘지원’은 있었다
정부의 추천을 받은 도서가 아닌 위의 책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허나 대한민국의 출판업계는 정말로 ‘자유롭게’만 운영되고 있을까?
올해 초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김종덕)는 출판현장 수요에 부응하고 차세대 출판인재를 양성한다는 목적 하에 ‘2015년도 출판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확정하고 그 시행계획을 발표했다.
이 사업에는 출판 창업자를 위한 무료 교육 프로그램, ‘1인 출판사’ 대상의 경영지원 프로그램(출판창업보육센터), 우수 출판인력 해외연수 프로그램, 세계 유수 출판사에 인턴을 파견하는 장기훈련 프로그램, 출판 실무능력을 배울 수 있는 출판교육 실무 프로그램, 출판사 재직자 직무능력 향상 프로그램 등이 포함돼 있다. 국고 지원액은 28억 원 수준.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서 정부의 입맛에 맞는 책만 출간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국고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운영되는 출판사들이 체제의 방향성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의 책들을 ‘자유롭게’ 출간하고 유통하는 풍경에 아무런 위화감도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도서 시장이 누리고 있는 편향의 자유는 어디까지 무죄일까.
편향된 내용의 책들이 자아내는 아이러니를 그저 짚어내기만 해도 당신은 특종기자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 특종 기자가 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씁쓸한 방법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