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경제이념 연구 초보단계…"작은 정부와 시장경제 주창"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시장경제 차원에서 집중 조명하는 연속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우남 이승만의 도덕철학과 시장경제”라는 주제로 3차 토론회가 개최됐다.

토론자로 참석한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은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이념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던 반면 이승만의 경제이념을 살펴보는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발걸음도 떼지 못한 상태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독립정신』을 집필했을 때, 그는 이미 통상과 개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래는 한정석 편집위원의 토론문 전문이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이념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다. 반면 이승만의 경제이념을 살펴보는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발걸음도 떼지 못한 상태로 보인다.

이승만의 경제이념이 어떤 사상적 입장이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은 쉽지 않아 보인다. 우남은 제헌입법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정치세력으로부터 지지와 견제를 받는 입장이었으며 미군정과 협상해야 했고, 6.25라는 전쟁을 거쳐 전후복구라는 과제들을 안고 있었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독립정신>을 집필했을 때, 그는 이미 통상과 개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아울러 백성들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불가불’필요하다고 썼던 것으로 보아, 이승만은 국가의 역할과 그 한계를 자유주의 원리로 이해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도미 유학시절, 경제에 관심을 많이 가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는데, 막상 이승만의 성적표에서 경제 과목은 낙제에 가까웠다.

당시 건강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생각했던 과목이 아니어서 실망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이승만의 경제정책을 통해 그 단면을 고찰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먼저 1948년 제헌의회에서 성립된 헌법의 경제체제 조항을 보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원리들이 뒤섞여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유권의 제약’, ‘주요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했다. 이는 당시 우파와 좌파, 그리고 중간파간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미군정은 해방공간의 과도기적 정치적 헤게모니를 사민주의적 색채를 띤 중간파를 협상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세력은 사유재산 보호를 헌법에 명시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소유권의 배타성을 확립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헌법 초안 제 5조는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各人의 자유·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는 조항이었다.

이승만의 우파세력은 이 조문에서 ‘경제’를 제외하자고 제안했다. 경제적 평등은 공산주의 국가에서조차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서 실제 생활에서 위헌의 소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장파 의원들은 경제적 평등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경제정책 , 특히 적산처리 여부에 의해 제1단계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 조문이야말로 국가의 중대한 근본지침이 되는 것이고 , 농지개혁과 공공사업 국영의 근거가 되는 조항이므로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태도로 보아 이승만의 경제이념은 자유주의 원리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 당시에는 전후 유럽에서 국가주도의 경제정책이 일반적이었고, 주요 기간산업이 국유화되었으며, 특히 1931년 소련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시기였으며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국민이 ‘평등’에 대한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지지를 보내던 상황이어서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우파는 현실적인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가장 시급한 경제문제는 역시 토지개혁이었다. 당시 좌파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고, 우파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중간파는 유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다. 이때 이승만과 우파는 중간파에게 유상몰수, 무상분배를 하게 되면 국가재정이 파탄이 날 수 밖에 없음을 설득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당시 사민주의 중간파의 경제인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 1949년 12.24일 이승만 기자회견 <경향신문>

이승만의 경제이념은 1949년 12월 기자회견에서 잘 드러난다.당시, 관료들과 우파 의원들의 대부분 공통된 입장은 ‘자본주의 계획경제’를 경제이념으로 삼았으며, 이를 통제경제로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통념에 대해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기자회견에서 밝힌다.

“정부안에나 민간 속에 중첩복잡하고 불필요한 기구가 없지 않으므로 이것은 조속히 없애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불요불급한 관리가 있으면 이것을 감원해야 할 것이고, 또 번잡한 공무원의 계위도 철폐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경제문제만 하더라도 통제경제책을 없애고 수요공급의 원칙에 의거한 자유경제책을 취하자는 것이 나의 본래 의도다”

이승만은 사회주의 경제이념이 만연하고 대공황으로 인한 뉴딜정책처럼 거대정부가 일반적인 상식이었던 시기에 작은 정부와 시장원리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이러한 생각은 그가 자유주의, 그 가운데서도 프랑스 혁명의 바탕이 된 합리주의적 구성주의보다는 미국독립혁명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즉, 섭리적 자유주의에 좀 더 가까웠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부분은 앞으로 이승만의 자유주의가 어떤 사조와 근원의 자유주의였던가를 밝혀보는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이승만의 자유주의적 경제이념은 6.25전쟁 중에 이승만이 재무부장관 백두진에게 전쟁 인플레대책을 묻자, 그가 ‘수입내지출’이라는 원리로 대답한 것을 즉각 이해하게 된 배경으로 읽힌다.

아울러 수입내지출의 민생경제 차원에서 미군정으로부터 넘겨받은 적산, 즉 귀속재산을 하루속히 민간불하해서 경공업에 의한 생필품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공급주의 주장을 이해하고 시행했다는 점에서다. 동시에 전시물자 통제가 아닌 영역에서는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했다. 그 결과 ‘삼백산업’이라는 민간 공급 시스템이 육성되었고 이는 전후 민간기업의 활성화로 이어져 박정희 시대에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한국 재벌기업의 모태가 된다.

6.25동란은 한국 산업인프라를 초토화시켰으나, 삼백회와 같은 민간생산기구가 재건사업에 민생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정부는 산업인프라 구축에 노력하는 민관협력 모델을 통해 1953년에는 이미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고도 국민소득은 15%이상 증가하게 된다.

특히 전후 경제복구를 위해 조직된 ‘재건위원회’는 탁월한 경제관료 백두진의 지휘로 화페개혁을 통한 통화안정과 자유경제제도의 초석을 놓게 된다. 이 시기에 이승만 정권에게는 경제발전을 위해 공공이익에 경도된 헌법 개정이 시급했다. 1954년 국무총리 백두진은 국회에서 이렇게 개헌의 필요성을 이렇게 연설했다.

<사유와 자유라는 것, 또 국유와 통제라는 것을 비교해 볼 적에 어떤 것이 더 많은 생산효과를 내며, 어떤 것이 더 빨리 경제부흥, 경제 혹은 산업의 재편성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자유진영 민주사회에서는 좀 더 낫게 살아보겠다는 의욕을 국법으로 보장할 적에 생산이 증강되고 산업이 빨리 재편, 발전해나가리라 하는 것을 여러분도 의심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한국경제의 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의 초석이 다름 아닌 6.25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결국 해방 후 제헌의회가 추동한 사회주의적 국가주도 계획경제가 전쟁으로 인해 불가능해지고 재정이 군비에 몰리는 바람에 민간경제의 활성화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6.25는 어쩌면 대한민국 발전에 축복이 아니었던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백두진을 수장으로 하는 ‘재건기획팀 ’은 전쟁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자유주의 경제의 재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전쟁 전부터 백두진은 원조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식 통제경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유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백두진은 모든 계획과 정책은 민영기업의 원리 속에서 구현될 것이며, 귀속재산의 조속한 불하를 통해 원조물자와 국내자본이 가장 능률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경영체제를 확립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원용석 기획처장은 구래의 “관리경제체제를 탈각하고 합리적 경제주의를 관철할 수 있는 자유경제체제를 점차 확립 ”하도록 할 것이라고 경제정책의 기본과제를 제시하였다. 안동혁 상공부장관도 가격정책에 있어서도 자유경제 원칙으로 가격이 결정되도록 그 장애요소의 제거에 노력할 것이며, 따라서 현재 행하고 있는 물자의 통제도 점차 해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재건위원회를 통해 헌법 내 사회주의적 색체들은 지속적으로 사라져갔고, 개인의 소유와 자유, 시장경제질서에 대한 원칙들은 보다 강화되어 갔다. 이에는 6.25로 인해 남한 정치권내 좌익세력의 궤멸로 인해 정치적 반대가 없어 추진이 수월했다는 점도 있다.

전후 이승만은 국방원조와 경제원조를 분리해서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음으로 군사비 지출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원조를 통해 중공업기반의 육성을 꾀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한국의 무리한 중공업 육성은 경제불안을 야기할 것으로 판단해 일본과 교역을 늘리고 국방에 치중할 것을 요구한다. 일종의 국제적 분업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될 경우 자립경제 기반이 성립되지 않아 자주국가의 꿈이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승만과 백두진은 미국을 이용해 안보비용을 줄이고 원조경제를 이용해 자립의 기반을 닦은 후 본격적인 자립경제를 추구한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미국의 입장과 갈등을 빚어 약속받은 원조의 집행이 순탄치 않게 되는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판단이 옳은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당시 전쟁 후 남북 간에 체제경쟁이 본격화된 시점이어서 이승만은 정치적 입장을 우선 고려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계획했던 경제부흥을 실현해 보지 못하고 4.19로 몰락하게 된다.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부의 모든 경제개발 계획과 추진의 원리는 이승만정부에서 기획한 내용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박정희정권의 경제성공은 이승만정권의 원조경제를 통한 수입대체가 아니라, 해외시장을 통한 수출전략이었다는 점이 결정적 차이었다. 사실 박정희 정부의 경제성공은 중공업 육성의 경제계획이 아니라 해외시장의 발견과 도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승만의 자유주의 경제초석에 대한 높은 평가를 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조경제에 의한 자립모델’이 과연 시행이 되었더라도 효과가 있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토론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생전에 통일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으리라 추측해 본다.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