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304명의 소중한 생명이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꺼졌다. 세월호라는 이름의 배에 올라탔던 이들의 예기치 못했던 참사였다. 남녀노소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지만 세월호가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 것은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꽃다운 나이에 바다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1주기를 맞아 미디어펜은 세월호의 의미를 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살펴보고자 하는 취지로 소설가 복거일 선생과 대담을 나누었다. 복거일 작가는 세월호 유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구하면서 세월호의 본질과 변질에 대한 지적 거인으로서의 통찰력을 전해주었다. 미디어펜은 복거일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은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아래 대담은 1회에 이은 두 번째 연재다. [편집자주] |
세월호 본질과 변질-복거일 인터뷰[2]
- 세월호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295명이며 시신을 건지지 못한 실종자는 9명입니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지켜 보면, 죽음에 대해 절제된 태도로 애도하는 문화가 부재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감정과잉이자 자신의 감정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파쇼 등의 행태도 엿보입니다. 슬픔에 대한 절제가 없는 사회, 슬픔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회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럴까요? 과거로부터 전해져온 문화적 속성이 있는지. 각자에게 내재된 ‘사자에 대한 정서’랄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예로부터 관혼상제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관은 성인식, 혼은 결혼식, 상은 장례식, 제는 제사를 말합니다. 이 중 우리나라에는 죽음에 대한 큰 의식-상-에 대한 관념이 여전합니다. 관혼상제 중 관과 제는 거의 사라졌고 혼과 상은 남아있습니다.
혼은 허황된 면이 많습니다. 셋방 들여서 사는 신혼부부가 일생에 한번 밖에 없다는 얘기로 정당화해가며 큰 곳에서 결혼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특별한 이유 없이도 시체를 그냥 두고 매장을 안 합니다. 먼 곳에서 온 일가친척이 모인 다음에 뒤늦게 묻었던 것이 ‘상’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3년간 움막을 지어놓고 시묘를 하는 풍습도 얼마 전 얘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를 효도의 근본으로 삼았던 나라입니다.
임금의 특별한 명령 없이 이를 중단하면 만시지탄을 받았습니다. 외화, 겉으로 화려하게 함을 과시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사자가 돌아가시면 곡을 하는 것을 아직도 예의로 하고 있습니다. 곡을 할 때 멋지게 구슬프게 잘 하는 것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굴곡된 형태로 아직도 이런 풍습이 남아있습니다.
혼인과 상례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겉으로 꾸민다는 특질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망자의 모습을 속으로 기억하며 조용히 추모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음을 설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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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사고로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실종자. 그들을 기리는 노란리본이 보인다. /사진=미디어펜 |
일단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의식하는 습성이 남아있습니다. 남을 많이 의식합니다. 조용히 성숙하고 원숙한 태도로 자기감정을 절제하는 태도가 부족하기도 합니다. 손님이 오면 곡을 하고, 곡 잘하는 사람을 고용해서라도 곡을 하도록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우리의 정서가 그렇습니다.
다만 세월호의 경우, 이것이 변질되었습니다. 유족이 아닌 주위 사람들이 ‘유족의 뜻’이라 그러면서 소리 내어 애도합니다. 상주나 유족이 아닌데 애도하면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합니다. 진심으로 제대로 애도하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유족이 문제가 아니라 유족을 둘러싼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가령 진도에서 청와대로 가자며 깃발 들고 행진하는 순간, 세월호는 유족의 애도와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그것을 누군가 차단했어야 했는데 이를 하지 못했습니다. 향후에는 큰 비극이 닥쳤을 때 사회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월호가 그 계기입니다.
- 세월호 사고를 대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염두에 놓고 보면, 아직 우리나라에는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이며 집단적 정서를 중요시하게 생각한다고 여겨집니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바로 서기 위한 덕목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는 도덕심을 갖추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도덕심을 좁게 보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보는 도덕심은 본질적으로 더 넓은 뜻입니다. 도덕은 사회를 하나로 묶는 힘, 응집력입니다. 도덕심은 사회적 응집력을 주는 힘입니다.
도덕이 없으면 상대를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으면 거래가 힘듭니다. 거래비용이 늘어납니다. 그러면 사회가 비효율적이 됩니다. 이로 인해 갖가지 부정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도덕은 사회를 사회답게 만들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넓은 정의로 삼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요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덕적 태도를 ‘상호적 이타주의’라 부릅니다. ‘상호적 이타주의’는 이타주의로서 언제나 꼭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협력을 하고 신의를 지켜야 나도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와 내가 상호적 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도덕, 상호적 이타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가 못하면 응징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응징이 없습니다.
파란 불이 켜져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은 보행자의 엄연한 재산권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횡단보도를 지나는 차량은 이를 지키지 않습니다. 차량은 ‘나의 보행권’이라는 재산을 해친 것입니다. 그럴 경우 차량의 운전자에게 그러지 말라고 일러야 합니다. 일종의 응징입니다.
나는 되도록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언성을 높이는 상대 앞에는 응징이 힘듭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응징이 힘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응징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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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거일 소설가 |
물론 이는 개인적인 영역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에는 ‘떼법’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법 없어도 살 사람들도 백명 이백명 모이면 야수로 변합니다. 이것이 떼법의 속성입니다. 개가 한 마리면 얌전하지만, 떼로 모이면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사나워지듯이 말입니다. 사람의 도덕심은 인원수에 반비례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떼법’을 사회가 응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도덕이 설 수 없습니다. 여기에 법치의 역할이 들어갑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합니다.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도덕이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진부한 얘기지만 결국은 법을 잘 지켜야 사회가 바로 서고 도덕이 바로 섭니다. 법을 지키지 않는 이에게 응징을 해야 합니다.
인정에 약한 것과 법치는 별개여야 합니다. 예컨대 수사대상이 자살하면 수사를 마치지 않고 종결하는 것은 잘못된 행태입니다. 가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무슨 마음으로 절벽에서 몸을 던졌는지는 몰라도 그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것을 밝혀야 한다. ‘공소권 없음’이라 밝히며 종료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작한 일은 끝까지 밝혀야 합니다. 이번 성완종 회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완종 회장에게는 자살이 자기 가족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살을 이유로 진상을 밝히지 않는 것도 안 됩니다.
과잉수사, 별건수사는 형평에 어긋날뿐더러 법의 권위를 훼손하고 사회에 큰 피해를 입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죽었다며 진상을 제대로 밝히지 않는 수사도 사회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이번 성완종 회장에 대한 검찰수사는 반성해야 할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미디어펜=김규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