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102번째 작품…연출·연기·리얼리티 아쉬워

   
▲ 정소담 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혹자는 이 영화가 ‘사실적’이라고 했다. 젊은 여배우가 전라를 드러냈음에도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된 건 죽음을 앞둔 암환자를 연기한 배우 김호정의 음부 노출이었다. 인터뷰에서 배우 스스로 ‘아름다워’ 만족한 장면이라는데, 과연. 암환자를 연기한 중년배우의 그 고운 음부가 주장한다. “삶은 이렇게 처절해요.”

‘사실’을 말해보겠다. 암환자에겐 음모가 없다. 그리고 이 영화엔 캐릭터가 없다. 중년배우 안성기와 예쁘장한 배우 김규리만 있을 뿐이다.

안성기가 연기한 오상무는 와인을 묘사한 추은주의 대사처럼 시간으로 깊어진 중후가 있는 한편 뜨거움과 서글픔을 함께 가진 남성이어야 했다. 화장(化粧)한 여인에 대한 갈망과 화장(火葬)된 아내로 인한 절망을 동시에 맞닥뜨린 중년. 그러나 안성기는 오상무가 될 듯 말 듯 끝내 되지 못한다. 혼재된 오뇌(懊惱)의 언저리만을 맴도는 그가 이내 광고에서처럼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믹스커피를 권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추대리도 없다. 미모와 능력을 모두 가졌으나 절반쯤은 평범한 회사원이어야 하는 젊은 여인은 이 영화에 없다. 영화 내내 예뻐 보이고 싶어 죽겠는, 그리고 영화 중 한 번은 춤 솜씨를 뽐내야 했던 여배우 김규리만 있다. 본인의 그 젊은 생기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모르는 커리어 우먼이 아니라 평생을 찬사 속에 살아와 자의식으로 가득 찬 여성. 그녀는 예뻐 보이고 싶어 카메라를 의식하는 것마저 관객에게 들켜버린다.

거장의 숨결도 없다. 바짝 말라 가벼워진 아내를 품으며 젊은 여인의 나신에 대한 상상으로 무겁게 짓눌리는 오상무.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여인이 누운 자리는 닿을 수 없을 만치 환상적으로 연출(演出)되어야 하건만 영화에선 그냥 지척의 허름한 여관방 같다.

   
▲ 거장의 102번째 작품이 언제나 102번째 거작이 되는 건 아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누가 외칠 것인가.
오히려 거장이 메가폰을 잡은 후유증이 눈에 띈다. 화려한 ‘우정출연진’이 그것이다. 주현, 안석환, 배한성, 예지원. 진지하게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에 이 정도 ‘급’의 배우들이 등장하면 관객은 그 배우가 극에서 어떤 일정 부분의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한다. 아무리 작은 역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런데 이 화려한 배우들은 진짜 그냥 ‘엑스트라’다. 거장의 영화이기에 가능한 눈부신 볼거리에 감사해야 할까. 관객 입장에서는 버섯대신 소시지가 들어가고 고추장 대신 케첩으로 비벼진 이상한 비빔밥을 먹고 나온 기분이다.

곱게 꾸며낸다. 육신을 불사른다. 중의도 이런 중의가 없다. 그런데 젊은 여인의 화장(化粧)도 나이든 여인의 화장(火葬)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감독의 연출은 어딘가 내내 부자연스럽다. 한국영화계에 굵직한 작품을 여러 편 남긴 거장의 일생은 아름답다. 여전히 메가폰을 내려놓지 않은 그 열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장의 102번째 작품이 언제나 102번째 거작이 되는 건 아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누가 외칠 것인가.

자, 영화가 들려주는 ‘삶이 녹록치 않은 이유’ 중 우리가 몰랐던 걸 말해 보자. 남자는 나이 들어도 남자다. 전립선이 망가져 간호원 앞에 바지를 까 내릴 때도 비아그라를 삼키며 그래 나는 남자다. 여전히 그 굴곡진 가슴골에 눈길이 간다. 세우고 싶다. 넣고 싶다.

세상엔 똥도 내 맘대로 못 누는 그런 병도 있다. 딸년이 이게 다 뭐냐며 어미를 울리는 그런 날도 있다.

이걸 모르는, 혹은 이것도 모르는 이에게 이 영화는 여운일 수 있겠다. 삶은 이렇단다. 교육영화로 상영되면 좋을 텐데 공교롭게도 청소년관람불가다.

고로, 나이 먹었으나 운 좋게 어린이인 그대에게 권한다. 삶의 절반은 비극임을 아직도 모른다면, 그래서 그 정도의 깨달음이라도 그대에게 놀라움일 수 있다면 이 영화를 보라. 훗날 삶의 절반 이상이 슬픔으로 가득 찰 때 그나마 그대에게 위안이 되리라. /정소담 칼럼리스트, 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