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제품의 질’ 아닌 ‘삼성인의 질’ 변해야”
이재용의 ‘목숨 걸고’…제2의 신경영 선언으로 화자
[미디어펜=조우현 기자]“바꾸려면 철저히 다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 1993년 신경영 선언하는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제공

1993년 6월 7일, 고 이건희 회장이 삼성 임원급들에게 ‘변화’를 강조하며 했던 말로, 29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화자되는 이야기다. 

같은 해 초 이 회장은 미국의 한 가전 매장에서 삼성 제품이 소니, GE에 밀려 귀퉁이에 전시돼 있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직원들이 세탁기 뚜껑 부문 부품이 맞지 않자 칼로 깎아내는 이른바 ‘세탁기 사건’을 영상으로 목도한 후 격노했다. 

‘삼성 제품의 질’ 아닌 ‘삼성인의 질’ 변해야

당시 이 회장은 제품의 불량은 그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의식의 불량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삼성 제품의 질’이 아닌 ‘삼성인의 질’이 변화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이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신경영 선언에 대해 “우리도 21세기에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어보자는 것”이었다“며 ”그러기 위해 처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할 정도로 과거의 관행과 습관, 제도, 일하는 방법 등 모든 것을 근본부터 바꾸자는 뜻”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이 회장의 강의를 들었던 삼성 임원들은 이 회장의 방대한 지식과 미래를 보는 혜안에 놀라면서도, ‘변화’에 대한 절박한 마음은 없었다는 것이 일관된 평이다. 실질적인 어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이 회장이 위기를 말하며 변화를 강조하자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2011년 7월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를 참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사장단 의견을 대표해 “질도 중요하지만 양도 중요합니다”라고 건의했던 비서실장은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했다. 이 회장의 절박함과 임원들의 갸우뚱한 마음이 충돌한 결과였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빛을 발한 건 그로부터 5년 뒤인 IMF 외환위기 이후다. 삼성 역시 외환위기 초기에는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휘청거렸지만, 빠른 회복세를 보이며 위기를 발판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후 삼성은 국내 1위 기업에서 명실상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신경영 선언을 기점으로 인사·조직 면에서 성과주의가 자리 잡았고, 휴대폰과 반도체 사업이 삼성의 매출을 견인했다.

△이재용의 ‘목숨 걸고’…제2의 신경영 선언으로 화자

다만 최근에는 삼성전자의 주력 사업인 휴대폰과 반도체 모두 실질적인 ‘위기’를 맞이했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명실상부 세계 메모리 시장에서 1위를 달리고 있지만, 미국 마이크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만 놓고 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2019년 ‘시스템 반도체 1위’를 선언했지만 대만 TSMC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휴대폰의 경우 미국 애플과 중국 업체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 상황이다. 기술적 격차를 단숨에 따라잡거나 도약을 꾀할 수 있는 대형 M&A도 2016년 하만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진행된 것이 없다.

이 같은 위기는 최근 이 부회장이 향후 5년간 450조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과 관련해 한 취재진에게 “숫자는 모르겠고 그냥 목숨 걸고 하는 것”이라고 밝힌 것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미디어펜 김상문 기자

실질적으로 삼성을 이끌고 있는 이 부회장에게 아직 신경영 선언 같은 것을 언급할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 이 부회장의 ‘목숨 걸고’라는 언급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과 같은 선상에서 화자 되고 있다.

이번 투자를 통해 미래 산업 기술 기틀을 닦지 못하면 삼성의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 그동안 공식 석상에서 ‘도전’을 강조해 온 바 있다. 특히 지난해 11월 고 이건희 회장의 1주기 때는 부친인 이 회장에 대해 “한계에 굴하지 않는 ‘과감한 도전’으로 가능성을 키워 오늘의 삼성을 일구셨다”고 추모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경영 환경이 녹록치 않은 상황인데다 이 부회장까지 다년간 재판에 묶여 그야말로 악재가 겹쳤다”며 “이 부회장의 ‘목숨 걸고 하는 것’이라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닌 절박한 심정을 표현한 것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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