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지 모르게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고 처음으로 느낀 건 2007년 무렵 ‘토이남’이라는 신조어를 들었을 때다. 유희열이 (감성)변태라는 걸 아직 사람들이 몰랐던 시절, 토이의 노래를 좋아하며 토이 노래에 나오는 것 같은 감성적인 삶을 사는 남자들을 지칭하는 말이 바로 토이남이었다.
정소담: ‘저 오빠들, 누구지…?’ (당시 10대)
이원우: ‘저 새끼들, 뭐지…?’ (당시 20대)
토이남은 사실 일본에서 2006년 무렵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초식계 남자 - 일명 ‘초식남’의 한국형 버전에 가까워보였다. 칼럼리스트 후카사와 마키가 유행시킨 이 단어는, 그러나 토이남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그 차이가 뭐냐고?
초식남의 본질은 그들이 ‘연애를 포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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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감성남 이원우
연애, 그 뜨거움을 포기한 사람들
같은 남자지만 마치 초식남들은 별도의 인종 같다. 연애를 포기했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바로 이 포인트에서 일본의 초식남과 한국의 초식남은 합쳐질 수 없는 갈림길을 넘어가게 된다. 일본 초식남들의 상당수는 ‘취미생활에 몰두’한다는 포인트를 공유한다. 그러려면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전제가 하나 있다. 그들이 경제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번듯한 직장, 나름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초식남이 될 수 있다는 의미.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프리터’나 구직 의지가 없는 ‘니트족’의 경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존재들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돈 문제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은 같다.
한국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엉뚱하게 확장됐다. 초식남, 그리고 초식남의 여성버전이라 할 수 있는 건어물녀가 ‘삼포세대’라고 하는 거대개념으로 포섭돼 버린 것이다. 이들은 연애뿐 아니라 결혼과 육아까지 포기한 존재들이다(※ 사실 연애를 포기하면 결혼과 육아는 자동으로 포기하는 셈인데 굳이 세 항목이 다 들어간 걸 보면 이 셋은 and가 아닌 or의 개념으로 묶였다고 볼 수 있다).
다분히 개인적이고 안온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던 초식남/건어물녀 개념이 한국으로 건너와서는 사회경제적 의미를 띠게 된 셈이다. 왠지 지금의 20대라면 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분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허나 세계인구가 70억이라면 그 안에는 70억 개의 고유한 특성과 존엄성이 깃들어 있다. 단순히 00세대, 00남 00녀로 전부 표현될 수 없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작은 물결을 넘어선 파도, 파도를 넘어선 조류(潮流)에 해당되는 ‘거대한 경향’이란 건 물론 존재한다. 유니섹스(unisex)라는 한 단어로 표현해도 좋겠지만 남자들은 점점 섬세함을 요구받고 있고, 여자들은 ‘1등’으로서의 당당한 자세를 더욱 자주 요구받고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논법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남자들은 감성(感星)에서 오기를, 여자들은 이성(理星)에서 오기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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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소담 칼럼니스트‧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
이성녀 정소담
고소영과 한예슬, 그 간극을 맴도는 욕망의 쌍곡선
한국에서만 27년을 살아온 여성으로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변화를 보면 감성남이 언급한 경향성이 조금 더 뚜렷해짐을 알 수 있다. 90년 대의 여신(女神)은 누구였나? 수많은 별들이 있었지만 정점에 섰던 하나의 전형(model)으로 꼽고 싶은 인물은 고소영이다. 흔히들 얘기하는 ‘고양이상’의 정석을 통과하고 있는 그녀의 마스크는 90년대를 주름 잡았던 ‘X세대’들이 욕망하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정말로 한 마리의 고양이처럼, 어떤 남자에게도 결코 호들갑 떨거나 따뜻하게 웃어주지 않을 것 같은 시크한 느낌. 예측이 불가능하게 톡톡 튀는 말과 행동. 기존의 통념과 상식을 간단히 깨뜨려 버리고도 너끈히 세상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유. 뭐 그런 것들을 대표하고 있는 90년대의 뮤즈가 고소영이다.
지금은 어떤가. 2010년대의 뮤즈이자 고소영의 자리를 훌륭하게 이어받고 있는 인물은 한예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소영과 한예슬의 차이가 곧 20년 세월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같은 ‘고양이상’이라도 한예슬은 “오빵~”으로 시작되는 콧소리 애교를 언제든지 발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강아지적(的) 고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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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서울여대 시각디자인 3학년 유한을 학생 |
다른 남자들에게는 콧대 높은 고양이 같은 느낌으로 장벽을 칠 수도 있지만 ‘한 남자’에게만큼은 말 잘 듣는 스윗한 강아지로 남아줄 준비가 돼 있는 여자. 바로 그런 여자를 지금의 20대는 욕망하고, 또 선망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 시대의 우리들은 거절을 당하는 모든 상황이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거절 당할까봐, 가고 싶은 직장으로부터 거부 당할까봐, 나 자신의 꿈으로부터 외면 받을까봐. 돌이켜 보면 거부당해 본 일이 별로 없는 인생들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마우스 클릭 하나면 세상 모든 물건들이 택배로 배달되는 세상만을 살아온 우리니까.
그런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려니 바다로 처음 날아든 나비처럼 불안하기만 한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인 법이므로 그런 불안도 꿋꿋하게 이겨내라고, 말은 쉽지만 현실의 벽은 그저 높기만 하다. 그런 식의 격려가 때로는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고. 사실 인생에 ‘멘토’란 있을 수 없는 게 아닐까.
감성에서 온 남자, 이성에서 온 여자
‘감성에서 온 남자, 이성에서 온 여자’는 바로 이런 두려움과 불안에 대해 말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두 사람의 필자는 각각 ‘말’과 ‘글’로 일을 하면서 수많은 20대들을 마주치고 있지만, 그래봤자 그저 평범한 20대 여자와 30대 남자일 뿐이다.
이런 두 사람이 세상에 대해 뭘 말할 수 있을까 싶지만, 이런 두 사람이니까 마음가는 대로 말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는 모든 주제를 커버한다. 연애, 진로, 대인관계, 외모관리, 두통, 치통, 척추만곡증 뭐든 좋으니 사연을 보내주시면 된다(이메일 주소: m_bishop@naver.com / bait001@naver.com)
비밀스러운 세상의 진리를 알려주겠다는 뻥은 치지 않겠지만, 적어도 당신의 물음표를 거절하지는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우리, 감성과 이성의 두 별 사이 어디쯤에서 만나도록 하자. /정소담 칼럼니스트‧전 사회안전방송 아나운서, 이원우 기자
(이 글은 대학생잡지 '바이트'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