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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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거일 소설가 |
한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들은 무엇인가?
빠른 경제발전으로 찬탄을 받다가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춤거리는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아마도 가장 긴요한 화두일 것이다. 그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강대했던 나라들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13세기에 세워진 몽골제국은 영토에서나 인구에서나 전무후무한 대제국이었다. 몽골지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중국과 조선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이란 코카서스 지방과 유럽 러시아를 정복했다. 통신과 교통이 그리 발전하지 못했던 중세에 그렇게 방대한 제국이 오래가기는 어려울 터였지만 몽골제국은 오래 존속했다.
몽골제국은 1206년 테무친이 몽골 부족들의 대한으로 추대되어 '바다처럼 강대한 임금' 이란 뜻을 지닌 칭기스칸(성길 사한)으로 불리면서 기초가 놓였다. 그 뒤로 한 세기 반 동안 몽골제국은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서쪽 킵차크한국의 후신인 크리미아 한국은 1783년까지 존속했다. 그렇게 큰 제국이 그렇게 오래 지속된 것은 경이롭다. 그 제국을 세운 사람들이 초원지대의 작은 유목민족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그런 경이로움은 훨씬 커진다.
몽골민족은 큰 국가를 이루거나 경영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들에겐 실은 국가의 개념도 없었으니 제국은 대한(大汗)의 재산이라기보다 황족 전체의 유산으로 여겨졌다. 징기스칸이 생전에 제국을 네 아들들에게 봉강(封彊)으로 배분한 것은 그런 사정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런 민족이 대제국을 세우고 오래 경영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그 흥미로운 물음에 대한 답의 단서 하나를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탈타아는 몽골관리로 고려 원종 11년(1270) 5월에 다루가치로 고려에 왔다. 그래서 고려 국왕의 통치를 감독하는 자리에 있었고 고려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그는 침착하고 공정하고 너그러웠다. 무엇보다도 인정이 깊었다. 그래서 안팎으로 어려움을 맞은 고려 왕실을 감쌌고 병란에 시달린 고려 인민들을 구휼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당시 고려는 몽골에 대한 태도에서 둘로 갈라져 있었다. 무신정권들 아래서 허수아비 노릇을 하다가 가까스로 권한을 되찾은 왕실은 몽골에 대한 항전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이미 1259년에 완전히 항복한 터였다.
백성들을 침입군들에게 내맡기고 섬에 들어가 항전하는 집권층에 대한 불만으로 민심이 떠났고, 최탄처럼 영토를 들고 몽골에 귀부하는 자까지 나왔다. 그러나 무신정권들을 떠받쳤고 몽골에 대한 저항을 주도해온 삼별초세력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1270년 왕실이 삼별초의 해체를 추진하자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렇게 불안한 상태에서 탈타아는 반 몽골 음모가 나와도 왕실에 대해 트집을 잡지 않았고, 고려 사람들이 약탈하는 몽골 군사들을 죽이고 모반해도 공정하게 재판을 하고 보복하지 않았다.
그는 몽골군사의 약탈로 남쪽 인민들이 살기 어렵게 되었음을 왕에게 얘기하고 안무사들을 보내 삼십년 동안의 병화를 겪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를 청했다.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하러 고려 군대가 출진할 때, 그는 고관들의 자제들이 종군하지 않았다는 것을 꾸짖고 고관들에게 말을 내도록 해서 군대에게 주었다.
그의 성품이 특히 잘 드러나는 대목은 죽음을 맞는 그의 태도다. 원종 12년 8월에 그가 병에 걸리자 고려의원이 약을 올렸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이제 병이 깊어서 내가 아주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이 약을 마시고 죽는다면 '고려에서 독약을 먹여 죽였다’고 너희 나라를 얽어 참소하는 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다.”그리고 끝내 그 약을 마시지 않고 죽었다.
정복지에 파견된 관리가 피정복민을 그렇게 감싸는 일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당시 고려처럼 저항하는 세력이 온존한 경우엔 특히 그렇다. 게다가 고려는 몽골과의 약속을 여러번 지키지 않아서 몽골군대의 침입을 무려 일곱 차례나 겪었고 몽골조정에 믿지 못할 나라로 인식된 터였다. 홍다구와 같은 역신들이 몽골에 붙어서 고려를 해치려고 갖가지 흉계를 꾸민다는 사정도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고려의 다루가치는 몽골 행정조직에서 그리 중요한 자리는 아니었을 터이다. 그런 자리를 맡은 관리가 그렇게 훌륭한 인품을 지녔고, 부임하자마자 소신대로 일을 처리했다는 사실은 당시 몽골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런 사람들이 나올 수 있고 제대로 뜻을 펼 수 있는 사회만이 몽골제국과 같은 위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몽골제국은 여러모로 제국다웠다. 몽골군대는 야만과 잔인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고 몽골제국은 인류문명에 기여한 것이 적다고 여겨져 왔다.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몽골군대는 정복의 대상이 된 나라에게 항복해서 전화를 피할 기회를 늘 주었다. 그리고 항복한 나라를 가혹하게 대하지 않았다. 몽골군대가 콰레즘제국과 서하를 철저하게 파괴한 것은 몽골군대의 야만성을 증명하는 사실들로 여겨졌지만, 그 불행한 사건들은 오히려 몽골제국이 자의적이지 않았음을 부각시킨다. 콰레즘은 칭기스칸 시절에 몽골 사신들을 죽였고, 오고데이칸 시절엔 몽골 대상들과 포로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서하는 이미 몽골에 항복했는데도 콰레즘에 대한 정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몽골은 실은 신의를 무겁게 여겼다. 제국의 건설과정에서 가장 길고 치열했던 남송과의 싸움도 금의 공략에서 연합했던 남송이 몽골을 공격해서 시작되었다. 이교도들과의 약속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긴 당시 기독교 십자군들과 비기면 그들의 태도와 행동은 돋보인다.
몽골제국의 제국다운 면모는 종교에 관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몽골제국은 늘 종교에 대해서 너그러웠다. 그래서 여러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대륙과 유럽을 연결한 제국이었으므로 인류역사에 미친 영향도 컸고 공헌도 많았다. 원의 수도에 찾아온 많은 유럽 사람들이 그 점을 유창하게 말해준다.
13세기와 14세기의 "몽골중심의 평화(Pax Mongolica)"는 "로마중심의 평화(Pax Romana)" 보다 피를 훨씬 덜 흘리고 이루어졌다. 제국의 특질은 보편성이다. 어느 모로 보나 몽골제국은 보편적이었다. 처음으로 세계사적 관점에서 쓴 사서가 일 한국의 사가 라쉬드 알딘 파둘라(1247~1318)에 의해 씌어졌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안타깝게도 몽골제국은 제대로 평가를 받은 적이 없었다. 인종적 편견이 심한 데다가 몽골군대가 유럽 군대를 잇따라 격파했으므로, 서양 사가들은 늘 몽골군대의 야만성과 잔인성만을 역설하고 근대 문명의 출현에 몽골제국이 한 기여는 깎아내렸다. 그리고 중국 사가들은 중국 전체를 정복한 첫 이민족 왕조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줄곧 깎아내렸다.
그런 악의적 폄하는 우리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고 지금 우리 사회에선 몽골제국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졌다. 동양을 대표하는 영웅의 이름을 요리에다 붙여도 부당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의 인종적 편견과 우리 자신들의 인종적 열등감이 큰 짐으로 얹힌 지금, 우리가 몽골제국의 참 모습을 새기는 일은 뜻이 작지 않다. /복거일 소설가